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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臨濟宗 설립운동과 의의

기자명 법보신문

친일불교 대항한 불교계 첫 자생적 항일운동

1911년 송광사서
임제종 탄생

1912년 서울에
중앙포교당 설립

총독부 사찰령으로
임제종 탄압 폐쇄

임제종 설립주역
항일세력으로 진화

<사진설명>1911년 2월 11일 송광사에서 300여 명의 승려가 모여서 조선불교 원종과 일본 불교 조동종의 연합맹약에 반대하면서 설립한 임제종의 발기 취지서. (사진제공=민족사)

원종(圓宗)은 불교계의 공론을 거쳐 성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종단이다.

종정 이회광은 1910년 10월 6일 전국 72개 사찰의 위임장을 받아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 7개조’를 성립시켰다. 조일불교 연합책동은 나라가 망한 지 39일 만의 일이었다. 이러한 이회광의 매종책동은 1910년 12월 경 원종종무원 서기에 의해서 통도사에 전해짐으로써 불교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불교계는 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민족적인 성향이 강하였던 박한영(朴漢永)·진진응(陳震應)·김종래(金鍾來)·한용운(韓龍雲) 등이 중심이 되어 이회광의 매종행위를 저지하고 나섰다. 이들은 1910년 10월 5일 전라남도 광주 증심사(證心寺)에서 규탄대회를 가지기로 하였으나 참석자가 적어 성사되지 못하고 다음 해 1월 15일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이 승려대회 이전인 1911년 1월 6일 김학산(金學山)·김보정(金寶鼎)·김율암(金栗庵)·아회성(阿檜城)·조신봉(趙信峯)·김청호(金淸浩)·장기림(張基林)·박한영(朴漢永)·진진응(陳震應)·신경허(申鏡虛)·송종헌(宋宗憲)·김종래(金鍾來)·김석연(金錫演)·송학봉(宋學峰)·도진호(都振浩) 등 15명이 광주군 서석산(瑞石山) 아래 증심사 내에서 회합을 가지고 교학(敎學)을 쇄신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이회광의 매종책동을 저지하는 차원을 넘어서 신교(信敎)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은 신세계 종교인의 의무라고 밝혔다.

1911년 1월 15일 송광사에서 개최된 승려대회에서는 임제종을 탄생시키고 임시종무원 관장으로 선암사의 김경운(金敬雲)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김경운은 연로하여 직책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무대리로 한용운에게 직무의 수행을 대신하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임시종무원은 송광사에 두기로 하였다. 임제종 설립의 주역들이 조동종과의 연합을 반대하는 까닭은 조선 불교의 종지는 선종으로 임제종 계통인데 같은 선종이기는 하지만 조동종과는 계파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논리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적인 이유는 이회광이 체결한 연합책동의 내용이 굴욕적이라는데 있었다. 임제종은 조일불교 연합책동의 차원을 넘어서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섰다.

1911년 10월 경 김학산·장기림·한용운 등은 영남의 통도사·해인사·범어사 등 여러 사찰을 찾아가서 통도사·해인사·송광사를 삼본산으로 정하고 범어사에 임제종 임시종무소를 두기로 하였다. 임제종 설립 운동은 범어사가 중심이 되어 영·호남지역을 넘어서 중앙에 포교당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임제종 설립의 주역들은 중앙에 포교당을 건립하고, 본격적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1912년 3월경부터 시작된 중앙포교당 건립 사업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동년 5월 26일 경성 사동(寺洞) 28통 6호에서 개교식을 가지게 된다. 임제종 중앙포교당 개교식 상황을 전하는 당시 신문기사 내용을 보면 이러하다. ‘5월 26일 오후 세시부터 중부 사동에 있는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에서 성대한 개교식을 거행하였는데 한용운 화상의 취지 설명, 백용성(白龍城) 화상의 교리 설명, 정운복(鄭雲復)·이능화(李能和) 양씨의 연설, 호동학교 생도 이리동의 창가 음악대의 주악 등이 있었다.

당일에 입교한 남녀가 800명에 달하였으며 구경꾼이 1300여명이 되어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성황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렇듯 임제종의 중앙포교당 개교식은 800여명이 즉석에서 회원이 되었고 참가자가 1,300여명에 달한 것으로 보아 불교도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불교의 정통성 수호를 고집하던 임제종 설립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1911년 사찰령의 공포로 불교계를 장악한 총독부는 임제종의 활동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았다. 사찰령의 시행으로 불교계는 30본사 체제로 전환되었고 각 본사마다 사법(寺法)을 제정토록 하였다. 종명은 조선시대 ‘조선불교선교양종’을 표방하였다. 총독부는 1911년 6월 사찰령의 시행하면서 30본사 체제를 확립하고 본사 주지의 임면에 대하여 사전 인가권을 가짐으로써 불교계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사찰령 체제 하에서 1912년 6월 17일에 원종종무원에서 최초의 30본사 주지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범어사 주지 오성월(吳惺月)은 사법을 같게 하자면 먼저 종지를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 의견에 대해서 김용사 주지 김혜옹(金慧翁)은 현재 원종과 임제종이 양립하고 있으므로 어느 하나를 폐하고, 다른 하나를 존속시킨다면 시비만 분분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선교양종은 조선시대 경국대전에 있는 종지이므로 종지를 선교양종으로 하자고 제안하여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30본사 주지들이 새롭게 성립된 종단의 종지를 확립하여 종회를 구성하지 못하고 조선시대 선교양종 체제로 회귀한 것은 이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30본사 주지들의 이와 같은 결정이 내리자 이회광은 중부 박동에 있는 각황사와 사동에 있는 임제종 포교당을 병합시키고자 하였으나 범어사 주지로서 중앙포교당의 당주였던 오성월의 반대에 부딪혀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12년 6월 21일 경성부는 한용운과 이회광 그리고 강대련을 소환하여 임제종과 원종의 문패를 철거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서 원종측은 1912년 6월 17일부터 22일까지 개최된 30본사 주지회의에서 대한제국 시기에 성립하였던 원종을 ‘조선불교선교양종각본산주지회의원(朝鮮佛敎禪敎兩宗各本山住持會議院)’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고 하여 승인을 받았지만 임제종은 해산되었다.

같은 날 한용운은 사전에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포교당을 건립하기 위해서 기부금 4,000원을 걷었다는 죄목으로 북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경성 지방 법원은 한용운에게 기부금품 모집 취제규칙을 위반한 죄목으로 벌금 30원의 형을 선고하고, 관련 일체 서류를 몰수한다고 처분하였다. 일제는 한용운이 주축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던 임제종을 폐쇄시킬 명분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총독부는 한용운에게 기부금 불법 모금운동 전개라는 죄목을 씌워 임제종의 폐쇄를 강요하였던 것이다. 총독부의 이러한 방해 공작으로 인하여 임제종은 문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사진설명>일제가 한용운에게 사전 허가를 받지 않고 임제종 중앙포교당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였다고 30원의 벌금형을 선고한 판결문. (사진제공=민족사)

임제종이 폐쇄된 이후 중앙포교당의 포교사 한용운은 문탁(文鐸)·김호응(金浩應) 등과 함께 1914년 8월경 불교계를 사찰령에 의해 확립된 30본사 체제에 편입되지 않는 조선불교회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30본사 주지들의 반대에 부딪혀 성사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불교회를 설립하고자 하였던 인물들은 북부 경찰서 고등계로 불려가서 조사를 받고 이 단체를 조직하지 못하도록 엄중한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한용운은 30본사 주지들과의 알력과 일제의 제지로 설립할 수 없었던 조선불교회를 불교동맹회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설립하려고 하였다. 1914년 8월 22일자 『매일신보』에 의하면 한용운은 각지의 청년들에게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 동소문 밖 청수동(淸水洞) 근처 청암사(靑庵寺)로 모이라고 통문을 보냈다고 한다. 이 회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북부 경찰서는 한용운을 재소환하여 불교동맹회의 설립을 중지하라는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한용운은 불교동맹회를 합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신고서를 북부 경찰서에 제출하였으나 일제는 30본사 주지의 직권을 벗어난다는 이유로 인가를 거부하였다. 임제종 설립운동은 일제의 간섭으로 좌절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사찰령의 통제를 벗어나 불교계의 자주적인 운영을 도모하려는 데까지 이어졌음은 더욱 큰 의미를 가진다.

원종은 개항기 불교계의 자주적인 노력에 의해서 성립한 근대 최초의 불교종단이었다. 그러나 종정이었던 이회광은 제국주의 세력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조일불교 연합책동을 벌였다. 이러한 이회광의 망동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남쪽 지방에서 임제종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불교계는 북쪽의 원종과 남쪽의 임제종으로 양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조선 불교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하였던 임제종은 총독부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임제종 설립운동은 친일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에 연합시키려는 책동에 반발하여 일어난 불교계 최초의 항일운동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임제종 설립운동의 주역들은 이후 3·1운동과 1920년대 초반 불교계 개혁세력으로 변모하여 불교계의 자주성을 수호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게 된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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