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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법신비상분 2

기자명 법보신문

여래의 본래 자리는 별고 없었습니까?

<사진설명>경주 불국사 대웅전의 석가모니 삼존불.

有相身中無相身 金香爐下鐵崑崙 頭頭盡是吾家物 何必靈山問世尊 如王秉劍

모습 있는 몸 가운데 모습 없는 법신이여, 금향로 아래에 무쇠 곤륜이로다. 하나 하나 모두가 우리 집안 물건인데, 영산의 부처님께 물을 것이 뭐 있는가? 왕이 칼을 쥔 듯 하거늘~

〈보충설명1〉 모습 있는 가운데서 법신을 보자면 화려한 것이나 누추한 것이나 모두가 법신입니다. 법신에 머물러 사물을 대하면 예쁘던 못났던 모든 것을 자재롭게 다루게 되는데 그 것은 마치 왕이 칼자루를 쥐고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과 같습니다.

〈보충설명2〉 철곤륜은 검은 빛의 무쇠를 말하는데 화려한 금향로에 반해 초라한 것을 비유한 것이지만 이것 또한 법신불입니다.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이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色相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어서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보충설명〉 금강경에서는 수보리존자가 ‘희유하십니다’라는 찬탄으로 세존의 뜻을 헤아리고, 법화경에서는 가섭존자가 세존께서 연꽃을 들어 보이셨을 때 미소로 응답하여 세존의 뜻을 헤아립니다. 상근기 대중은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세존의 가르침을 즉각 알아챕니다. 그러나 이심전심이 어려운 중근기나 하근기 대중을 위해서는 그 근기에 알맞은 가르침이 나름대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중근기 대중을 위해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 확실히 본다는 ‘見’으로 偈頌함)’ 라는 사구게(四句偈)로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근기 대중을 위해서는 진리(법신)를 상호(相好)의 추측이나 판단을 통해 볼 수 있다고 오해할까봐, 수보리에게 ‘가이삼십이상 관여래불?(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 추측하여 안다는 ‘觀’으로 질문함)’ 라고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해 도장 찍듯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려고, 위와 같이 색상(色相)으로 여래를 구하는 것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라고 설(說)해주는 것입니다. 만일 상호를 통해 법신을 유추한다면 32상을 갖춘 전륜왕도 법신이라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전륜왕의 32상은 선업(善業)에 의해 갖추어진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당체가 되어 32상을 갖춘 부처님과는 다릅니다. 부처님께서는 견(見)이 떨어져 나가 견(見) 그대로 법신(法身)이 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법신은 32상으로나 보고 듣는 대상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六祖}若以兩字 是發語之端 色者 相也 見者 識也 我者 是一切衆生身中 自性淸淨無爲無相眞常之體 不可高聲念佛 而得成就 會須正見分明 方得解悟 若以色聲二相 求之 不可見也 是知以相觀佛 聲中求法 心有生滅 不悟如來矣

‘약이(若以)’ 두 字는 發語의 단어다. ‘색(色)’은 모양이요, ‘견(見)’은 아는 것이요, ‘아(我)’는 모든 중생의 몸 가운데의 자성청정한 무위무상의 진실되고 항상하는 본체니, 높은 소리로 염불한다고 해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바른 견해가 분명해야 바야흐로 깨달을 것이다. 만약 색과 소리의 두 모습으로 구한다면 볼 수 없으니, 모습으로 부처를 관하거나 소리 가운데서 법을 구한다면 마음에 생멸이 있어서 여래의 본자리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보충설명1〉 ‘아(我)’는 진리의 당처.
〈보충설명2〉 ~회수정견분명(會須正見分明)~의 ‘회(會)’는 부사로서 ‘반드시’의 뜻.

{冶父}直饒不作聲色求 是亦未見如來在 且道 如何得見

비록 소리와 색으로 진리를 구하지 않더라도 이 또한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또한 일러라. 어찌 해야 볼 수 있겠는가

不審不審

‘별고 없었습니까?’ 하는 문안 인사로다.

〈보충설명〉 ‘불심(不審)’은 중국에서 ‘별고 없었습니까?’ 하는 뜻으로 아침저녁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공손히 문안인사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소리와 모양으로도 여래를 구하지 말라 하고, 다시 또 소리와 모양으로 구하지 않는다 하여도 진리를 얻어 볼 보장이 없다고 하니까, 진리가 멀리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상 진리는 아침저녁 문안인사처럼 가까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별고 없었습니까?’ 하며 문안 인사드릴 바로 그 때 우리 스스로 법신을 굴리기 때문입니다.

見色聞聲世本常 一重雪上一重霜 君今要見黃頭老 走入摩耶腹內藏  此語三十年後 擲地金聲在

색을 보고 소리를 들음이 세간의 평상 모습이지만 설상가상이로다. 그대가 지금 부처(진리)를 보고자 한다면 마야부인 뱃속에 달려 들어갈지어다. 이-잇! 이 말은 30년 지난 뒤, 땅에 떨어져도 금덩이 소리가 날지어다.

〈보충설명〉 마야부인은 부처님의 어머니이고, 부처님 어머니의 뱃속은 어머니와 아기가 한 몸을 이룬 진리의 뱃속입니다.

화엄경의 三身頌 맛보기

法身頌

螟眼睫起皇州  玉帛諸侯次第投

하루살이 속눈썹에 황제의 나라를 세우니, 옥백으로 장엄한 제후들이 나란히 섰네.

天子臨軒論土廣  太虛猶是一浮

천자가 조정에 나가 땅의 넓이를 논하니, 태허공도 오히려 하나의 거품에 지나지 않는구나.

〈보충설명1〉 시(詩)는 눈앞에 전개되는 풍광을 읊은 것이며, 송(頌)은 앞에서 전개된 많은 이야기를 압축하거나 생략하면서 운(韻)에 맞춰 노래지은 것입니다.

〈보충설명2〉 위의 법신송은 법신의 광활함을 비유한 노래입니다. 화엄경에서의 법신은 일체의 모습을 여읜 진리 그 자체이며 작은 티끌이 시방세계를 다 머금는 오묘한 자리입니다. 법신의 자리에서 보면 태허공조차도 물거품에 지나지 않아서 아무리 넓은 국토의 제국이라도 하루살이의 속눈썹에 세운 것처럼 작고 보잘 것 없습니다.

〈보충설명3〉 옥백(玉帛)은 제후들의 의상을 꾸며주는 옥장식과 비단을 말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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