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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일본 마키타 타이료(牧田諦亮) 전 교토대 교수

기자명 법보신문

민중의 불심 드러낸 중국 僞經 연구의 대가

백제 무광왕(武廣王)은 지모밀지(枳慕蜜地)로 천도하여 정사(精舍)를 새로 경영하였다. 정관(貞觀)13년 세차(歲次) 기해(己亥, 639년) 겨울 11월에 하늘에서 큰 뇌우(雷雨)가 쳐 제석정사(帝釋精舍)에 화재가 나 불당 7층 부도(浮圖)와 낭방(廊房)이 일거에 불에 탔다.

탑 아래 초석속에는 가지가지 칠보와 불사리, 수정병이 들어 있고, 또한 구리로 종이를 만들어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베껴 목칠함(木漆函)에 넣어 저장했었는데 초석을 열어보니 모두가 불타고 오직 불사리병과 반야경칠함만이 그대로 있었다. 수정병의 안팎을 보니 뚜껑의 움직임이 없는 데도 사리 전부가 없고 그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병을 대왕에게 보냈는데, 대왕이 법사를 청하여 참회하고 병을 열어보니 불사리 6과가 모두 병안에 있고, 밖에서 보아도 그것이 모두 보였다. 이에 대왕과 모든 궁인은 공경과 믿음을 배가하여 공양하고 다시 절을 지어 안치하였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선화공주와 무왕의 러브스토리를 다룬 TV드라마 서동요에는 열광했지만 역사적으로 무왕과 관련한 백제 천도설 논쟁에 기름을 부은 결정적인 문헌학적 발견이 위의 짧은 기록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구체적인 사실은 일본 교토(京都)에 소재하는 청련암(靑蓮庵)에 비장되어 있던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나오는 구절이다. 중국의 6조(六朝)시대의 불교신앙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데 88편의 응험기중 마지막 「백제무광왕(百濟武廣王)」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물론 무광왕은 무왕을 말한다.

이것을 세상에 드러내 빛을 보게 한 학자는 다름 아닌 마키타 타이료(牧田諦亮) 교수이다. 평생을 중국불교연구에 몰두한 학자로 몇년전 필자를 마지막 제자로 강의를 접었는데 여전히 아흔이 넘은 노익장을 과시하며 건재하다.

마키타는 1912년생으로 교토의 불교전문학교(佛敎專門學校, 현 佛敎大學)와 오오타니(大谷)대학을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현 京都大學)에서 연구 중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반에 상해의 동아동문서원(東亞同文書院大學)의 조수로 근무한다. 일본의 침략야욕이 막바지로 치달을 즈음 전쟁터냐 귀국이냐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우여곡절 끝에 귀국선에 올라타게 된 마키타는 이후 교토대학의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중국불교 연구에 정열을 불태우게 된다. 돈황문헌에서부터  경록, 대장경, 위경, 중국근대에 이르기까지 평생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원텍스트와 씨름하며 차근차근 학문적 성과를 쌓아가기 시작한다.
 
이 가운데 중국의 양(梁)ㆍ당(唐)ㆍ송(宋)ㆍ대명(大明) 고승전 색인 7권은 마키타가 중심이 되어 70년대 초기에 나왔다. 그 당시는 아직도 일일이 손으로 기록해가며 색인을 만들던 시대였던 만큼 그 지난한 작업은 후학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중국불교연구에 하나의 획을 그은 것은 1976년에 나온 『의경연구(疑經硏究)』였다. 의경은 마키타의 말에 의하면 위경(僞經)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를 합쳐서 의위경(疑僞經)이라고도 한다. 마키타는 인도나 중앙아시아, 또는 중국에서 찬술하였거나 원전을 묘출(描出)하여 경록(經錄)에 입장(入藏)하여 놓은 것을 총망라하여 위경의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간헐적으로 연구되어오던 위경연구에 종합적인 시각을 제공함과 동시에 이후 경록연구에도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삼계교(三階敎)연구나 민중불교연구에도 지대한 영향을 키쳤다. 지금은 고인이 된 카마타 시게오(鎌田茂雄, 1927~2003)의 역작 『중국불교사(중국불교사)』의 위경부분은 거의 대부분이 마키타의 연구에 의존하고 있을 정도이다.

위경연구는 아직 한국불교연구에는 거의 개척되지 않은 분야다. 마키타는 위경을 도교나 유교의 영향을 받은 것 등으로 분류하여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 경록상에서는 위경이 후에 편자에 의해 진경(眞經)으로 판명되거나 진경이 위경으로 판명되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하더라도 이는 민중의 요구에 의해 명맥을 유지해왔고, 더불어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은 시들 줄 모른다. 동진(東晋)의 석도안(釋道安, 312-385)이 편찬한 『종리중경목록(綜理衆目錄)』(『도안록(道安錄)』이라고도 함)은 산실되었지만 일부분이 양(梁)의 승우(僧祐, 우445-518)가 편찬한 현존 최고의 경록인『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석도안은 당시에 유통되던 경전 중에 위경을 어떻게 하면 진경과 구별해서 후세에 전할 것인가에 대한 고뇌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안의 개인적인 고뇌가 비록 불교인의 역사적인 고뇌로 확대되었다 하더라도 오늘날 불교는 진(眞)과 위(僞)의 이분법적인 논리를 초월한 불교 본래의 포용성에 하나의 거대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하겠다. 

마키타의 말을 빌리자면 “위경은 시기상응(時機相應)의 경전으로써 불교의 발전적 역사 속에서도 그 가치가 보존돼 오고 있는 것”이다.  일본 근대불교사에서 논쟁의 하나였던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의 문제도 기실 위경에 의해 그 문제의 근저를 제공하고 있다 하겠다.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종파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라는 것도 많은 분야에서 위경에 근거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유교계통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은 비록 중국찬술 경전이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민중경전의 소중한 위치를 오늘날도 여전히 점하고 있다. 카세트테이프에 의해 집집마다 들려오는 부모은중경의 천편일률적인 독경소리를 들으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은 때로는 눈물을 때로는 회한으로 몸서리를 치면서 불심에 깊이 젖어 들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누가 이 경전을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거부할 수 있겠는가.

『목련경((木蓮經)』이나 『선악인과경(善惡因果經)』『조왕경(王經)』『지장경(地藏經)』등은 우리 선조들의 일상에 하나의 삶의 텍스트로써 군림한 지 오래되었다. 더군다나 동국대의 김호성 교수에 의해 그 연구의 성과가 집대성되고 있는『천수경(千手經)』 은 한국의 사원에서는 아침저녁 예불때 빠지지 않는 경전이다. 우리의 신앙과 수행에 지침이 되고 궁극적인 지향의 대상으로 삼는 고원한 경전들 가운데에는 넒은 의미에서 위경의 범주에 드는 경전들이 많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오늘날 위경연구는 텍스트(text)와 컨테스트(context)의 문제로 다시금 조명해야 할 중요한 연구의 한 분야이다. 텍스트 속에 컨텍스트로써의 삶의 한 부분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면 불교의 본질에서 과연 멀어졌다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에 깊은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순환과 상보의 관계는 불교 해석학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마키타의 위경연구는 위경을 포함한 삼장을 장경(藏經)으로 수록해 온 선인(先人)들의 불교적 지혜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 계기가 되고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마키타의 연구족적은 바로 이런 부분에서 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일본의 각종 사원에서 비장해 오던 경전이나 문서들을 오늘날 다시 복원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와 더불어 많은 불교학자들이 신앙의 중심지였던 사원연구의 바탕이 되는 이러한 작업에 동참하여 많은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가 빛을 보게 된 계기, 즉 그의 『육조고일관세음응험기(六朝古逸觀世音應驗記)의 연구』는 이러한 정신에 바탕하여 나온 성과이다. 영험이나 응험은 불교가 다종다양한 문화나 관습을 지닌 땅에 토착화하기 위하여 겪어야 했던 굴절된 현상이라 하더라도 삶의 고단함에 빛을 던져준 소중한 유산으로 구비 혹은 기록으로 전승되어 온 역사적 유산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마키타는 늘 말하기를 “민중의 삶의 역사를 응시하지 못하는 불교 역사는 무미건조한 이론의 나열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불법이 누구를 지향하며 누구를 통하여 면면히 흘러왔는가를 불교역사가들은 통찰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하겠다.

원익선(동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학자의 학문적 성과는 세상에 드러낼 때 빛이 돼”

e-mail 인터뷰

▶중국불교사 연구에서 풀기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어떤 점입니까?

- 흔히 중국의 역경사(譯經史)는 현장(玄藏, 602-664)을 중심으로 신역(新譯)이라하고 이전을 구역(舊譯)시대라고 합니다만, 참으로 어려운 문제는 그 많은 번역의 원서들이 어디로 사라졌을까 하는 점입니다. 인도와 중앙 아시아를 통해 들여온 많은 원본이 중국에는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한역본(漢譯本)만이 남아 오늘날 아시아권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는 역사상 중국대륙인들의 문화와 관습을 포함한 내적의식과도 관련된 문제로 앞으로 풀어가야 될 숙제라고 생각됩니다.

▶불교학을 공부하는 학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 두 가지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반드시 저서를 통해 세상에 내어 놓을 것, 둘째는 인연을 소중히 할 것입니다. 첫 번째는 학자로서 학문적 성과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져야 다음 연구 단계로 이어져 발전된다는 점입니다. 동경대 모 교수가 일본에 산재해 있는 돈황문헌이 연구를 통해서 위조된 것이라는 견해를 사석에서는 늘 말하곤 했지만 연구업적으로써 세상에 드러내지 않음으로 인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다른 사람의 연구에 의해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반드시 학문적 성과를 공표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의 인연이라는 것은 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우리 인생은 인연의 이합집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불법의 가르침은 그런 면에서 인간에게 삶의 깊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특히 학인들은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자신의 학문에 득이 되고 손실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되도록이면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잘 가꾸어서 자신의 뜻을 펼쳐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마키타 교수는

1912년생. 불교전문학교(佛敎專門學校, 現佛敎大學)및 오오따니대학 문학부(大谷大學文學部) 동양사학과 졸업.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現京都大學)문학부 동양사선과(東洋史選科) 수료. 상하이 동아동문서원대학(東亞同文書院大學) 조수. 교토대학(京都大學)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기후교육대학(岐阜敎育大學) 교수. 시가현야스정(滋賀縣野洲町) 염불사(念佛寺) 주지. 사이타마공업대학(埼玉工業大學) 전 상임이사·학원장.

주요저서로는 『中國近世佛敎史硏究』(平樂寺書店,1957年, 『六朝古逸觀世音應驗記の硏究』(平樂寺書店,1970年), 『五代宗敎史硏究』(平樂寺書店,1971年), 『中國高僧傳索引』전7권(平樂寺書店 ,1972-78 ) , 編?校記『弘明集硏究』상ㆍ중ㆍ하 (京都大學 人文科學硏究所, 1973-75), 『疑經硏究』(京都大學 人文科學硏究所,1976年), 『中國佛敎史硏究』1,2,3(大東出版社,1981-1989), 『善導』(講談社, 2000)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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