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⑮ 네덜란드 침략과 승가의 민중운동

기자명 법보신문

문화말살 정책 맞서 전통 지켜낸 승가의 힘

<사진설명>네덜란드는 스리랑카에서 포르투갈의 세력을 몰아낸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그들의 세력을 구축해 나갔다. 지금도 네곰보 등 해안가 도시에는 네덜란드인들이 세운 요새와 교회 등이 즐비하다.

“스리랑카에 가게 되면 가면과 바틱을 꼭 보세요. 스리랑카하면 흔히들 홍차를 떠올리지만 스리랑카의 전통과 문화가 담겨는 문화상품은 바틱하고 가면이에요.”

성지 순례 이력이 꽤나 화려한 한 지인이 서울에서 당부한 충고가 생각났다. 스리랑카에 도착한지 꽤 여러 날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거리 구경을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거니와 스리랑카의 바틱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바틱 상점을 찾아갔다. 사실 스리랑카의 바틱은 그리 유명한 편이 아니다. 바틱은 채색이 아닌 염색을 통해 문양이나 그림을 만드는 인도의 전통적인 염색화 기법으로 인도 여행객이 많아지면서 국내에서도 인도산 바틱이 많이 유통되고 있기 때문에 바틱은 인도풍이라는 인식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도의 델리나 캘커타 등 유명 관광도시에서는 어디서나(심지어는 길거리의 노점상에서 조차) 쉽게 바틱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스리랑카에서는 바틱이 그리 많이 눈에 띠지 않는다. 꽤 규모가 있어 보이는 기념품점이나 혹은 바틱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전문 상점을 찾아야 스리랑카의 바틱을 만날 수 있다. 스리랑카 바틱에서 즐겨 사용되는 주제는 페라헤라 행렬, 문스톤, 시기리야 바위궁전의 시기리야 레이디 등이다.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내걸고 바틱을 생산한다는 풍만한 풍채의 상점 주인은 상점 뒤에 자신의 바틱 작업장이 있다면서 작업과정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주인이 안내한 바틱 장업장에는 물을 가득 담아 놓은 몇 개의 수조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바틱들을 걸어 놓은 건조대 그리고 작은 의자와 화로 몇 개가 전부다. 어떻게 이곳에서 바틱을 만들까. 장사 수완이 좋은 주인답게 이런 궁금증을 눈치 챘는지 재빨리 바틱 제작 과정을 보여주겠다며 사람들을 부른다. 16, 17살로 보이는 앳된 소녀들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나오더니 화로위에 밀랍을 녹인 물로 보이는 액체를 올려놓고는 쇠꼬챙이 같은 작은 침으로 밀랍 물을 찍어 천위에 한 방울씩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저렇게 일일이 밀랍을 발라 말린 후 염색을 하면 밀랍이 묻지 않은 부분만 염색이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색의 염색이 끝나면 천을 삶아서 밀랍을 다 녹여내 완전히 건조 시킨 후 다음 색을 염색할 부분만 남겨놓고는 다시 밀랍 그림을 그린다. 저 소녀들은 하나의 바틱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몇 번이고 쇠침으로 밀랍을 찍어 한 방물씩 그림 그리기를 반복해야 한다. 쇠침으로 한 방물씩 그림을 그리는 그들의 섬세한 손놀림도 놀랍거니와 몇 번이고 그 작업을 반복하는 그들의 인내력과 고단함에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색이 많이 사용된 바틱일수록 가격이 높다. 저 화려함 속에 배어있는 고단함이 떠올라 가격 흥정도 맘대로 못한 채 지갑을 열고야 말았다.

문화·역사 보여주는 바틱-가면

<사진설명>스리랑카의 전통 가면. 나무를 조각해 만든 가면은 축제나 주술적 의식에 주로 사용된다.

화려하기로는 스리랑카의 가면도 바틱에 못지않다. 가면은 주로 남서부 해안가 마을을 중심으로 제작되는데 나무를 깍아 만든 가면은 그 모양도 정교하고 이국적이지만 무엇보다도 화려한 채색이 더해져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도대체 나무를 깍아 만든 이 무거운 가면을 어떻게 쓰고 춤을 추거나 연극을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가면 상점 주인은 “배우들은 모두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하나도 무겁지 않다”며 순례객을 안심시킨다. 스리랑카의 가면극은 주로 축제나 주술적 의식에서 주로 사용된다. 특히 가면에는 주술적 힘이 들어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스리랑카 사람들은 가면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룬다.

바틱과 가면은 가장 스리랑카다운 문화상품이다. 어느 나라든 외국을 찾은 이방인에게 가장 즐거운 일의 하나는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가 물씬 묻어나는 무엇인가를 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민족, 혹은 국가의 역사와 전통, 그들의 생각은 물론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작은 창과도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리랑카처럼 오랜 기간 외국의 지배를 받은 국가가 자신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는 것은 국가 그 자체를 지키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럼 점에서 지난 17, 18세기 네덜란드의 지배는 그 어떤 서구 열강의 지배 시기보다도 고난했던 시대였다.

17세기 들어 네덜란드는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자 스리랑카는 이 시기를 틈타 포르투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불교 재건을 위해 진력했던 위말라 다르마수리야 1세(Vimala Dharma Suriya I. 1591~1604)가 포르투갈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네덜란드와의 접촉을 시도한데 이어 라자싱하 2세는 네덜란드의 세력을 이용, 1658년 스리랑카에서 포르투갈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포르투갈의 세력을 축출한 이후 한동안 스리랑카에는 평화가 찾아오는 듯 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불교에 대해서도 매우 우호적이며 존중하는 자세를 보였다. 1753년 구족계 계단의 복원을 위해 씨암(지금의 태국)으로부터 비구 스님들을 초청해 올 때 네덜란드에서 그 수송을 담당하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세력을 몰아낸 네덜란드 역시 또 다른 외국의 지배세력일 뿐이었다. 평화로운듯 보이는 모습은 단지 커다란 전쟁이 없을 뿐이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로 이어지는 이교도 세력의 지배로 인해 스리랑카 불교는 이미 고사 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로부터 빼앗은 해안가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는 정도였지만 그 속에서는 불교에 대한 지능적인 박해가 이뤄지고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곳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지역의 교육체계였다. 그들은 모든 학교를 교회 안에만 세웠으며 교장은 물론 교사까지도 기독교 선교사가 역할을 겸했다. 출생은 물론 결혼 신고도 학교, 즉 교회에 해야 했으며 이를 거부할 때에는 사법적인 처벌까지도 가해졌다. 기독교 교인이 아니면 공직에 나갈 수 없었으며 재산의 상속도 불가능했다.

네덜란드의 이런 정치적 영향력 속에서 불교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포르투갈의 박해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교세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교세의 쇠퇴는 승단의 기강 붕괴와 왜곡으로 이어졌다. 스님들은 대부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청정한 계율 정신도 흐트러졌다. 스님들 중에는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거나 점을 봐주는 이들도 생겨났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속가 가족을 부양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승가의 생활상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네덜란드 지배기의 왕들은 불교의 부흥과 청정한 승단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쇠락의 수렁에 빠진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사 직전 불교 살린 사라낭까라

<사진설명>바틱을 만드는 스리랑카의 소녀들. 여러차례 반복되는 염색과 밀납처리 과정이 모두 이들의 노동으로 완성된다.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고 했던가. 스리랑카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왈리위따 핀다빠띠까 스리 사라낭까라(Valivita Pindapatika Sri Saranakara. 1698~1778) 스님이 등장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사라낭까라 스님은 16세에 출가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흩어진 경전을 모았다. 또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전하는 한편 스리랑카가 부처님의 정법을 따르는 땅이라는 국민적 자부심을 회복시키는데 주력했다. 사라낭까라 스님은 당시 사미의 신분이었지만 그의 이러한 종교적 자긍심 회복 운동은 흐려진 법등의 불을 다시 밝혀야 한다는 국민들의 자각으로 이어졌다. 초기 사라낭까라 스님의 민중 중심 운동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끼르띠 스리 라자싱하 왕은 사라낭까라 스님의 결연한 의지에 감동하여 그에게 구족계를 수계할 스님들을 초청하기 위해 사신을 씨암으로 보냈고 마침내 1753년 완전한 승단의 재건을 이룩할 수 있었다.

1658년부터 1796년까지 138년간의 네덜란드 지배시기는 포르투갈 지배시기 같이 피로 얼룩져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시기 네덜란드인들은 교육과 좋은 일자리를 미끼로 그리고 불교와 전통 문화에 대한 파괴를 통해 국가와 왕에 대한 충성심과 승단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정법을 지켜온 불제자로서의 자긍심을 철저히 유린해 나갔다. 이러한 때 민중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 민족과 국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북돋으며 스리랑카 불교의 소멸을 막아낸 사라낭까라 스님의 노력이 없었다면 스리랑카는 영영 붓다의 향취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namsy@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