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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윳따니까야』 ⑬

기자명 법보신문

업력이 다양한 존재를 만들어낸다

『쌍윳따니까야』의 「존재의 탐욕에 대한 경」은 삶의 자양분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물질적 자양분과 접촉의 자양분, 의도의 자양분과 의식의 자양분을 다루고 있는데, 이 경에서 특수한 것은 그러한 자양분에 대한 탐욕과 환희와 갈애가 생겨나면 의식이 그곳에 머물러 성장하면서 윤회를 전개시킨다는 내용이다. 윤회하면서 생노병사를 경험하는 우리는 슬픔과 불행과 근심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윤회하는 우리의 모습은 부처님에 의하면 “어떤 디자이너나 화가가 염료나 도료나 울금이나 인디고나 꼭두서니로 잘 닦여진 널빤지나 벽이나 흰 천에 여자의 모습과 남자의 모든 몸뚱이와 팔다리를 합하여 그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디자이너나 화가는 창조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업력에 의해서 성장하는 우리의 의식을 의미한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업력은 세상에서 다양한 존재의 생성을 유발시킨다는 뜻이다. 어떠한 존재가 행복한가 또는 고통스러운가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이 화가의 위대하거나 저열한 재능에 의존하듯이 업의 성격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붓다고싸의 주석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세계에 사는 인간을 비롯한 욕계의 천신이나 지옥·아귀·축생은 널빤지에 그려지고 있는 그림에 비유될 수 있다면, 미세한 물질계에 사는 하느님들의 세계는 벽에 그려지고 있는 그림에 해당하고 비물질계에 사는 하느님들의 세계는 흰 천위에 그려지고 있는 그림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존재의 탐욕의 경」에서는 이 위대한 화가를 다시 태양의 빛에 비유한다. 그 경에서 부처님은 제자에게 묻는다.

“집이나 누각이 있는데, 북쪽이나 남쪽이나 동쪽으로 창이 나 있었다. 태양이 떠오를 때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면, 어디에 멈추겠는가?” “서쪽 벽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서쪽 벽이 없다면, 어디에 멈추겠는가?” “땅바닥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땅바닥이 없다면, 어디에 멈추겠는가?” “물 위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물이 없다면, 어디에 멈추겠는가?” “멈출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기서 햇빛은 앞의 화가의 비유에서처럼 업의 존재로 비유되고 있다.

화가의 세 가지 캔버스가 각각 삼계(三界)로 비유되듯이, 여기서 태양의 빛이 닿는 서쪽 벽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세계, 땅바닥은 미세한 물질계, 물 위는 미물질계로 각각 삼계로 비유되고 있다.

화가는 태양의 빛처럼 그 빛이 닿은 곳에서 그림을 그린다.

아침에 태양이 비추면 그 빛이 와 닿는 곳에서 장엄한 자연의 풍광이 드러나는 것은 화가가 그리는 그림과 같은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상·인간·수라·아귀·지옥은 육도윤회의 세계는 업력의 빛이 와 닿는 곳에서 그려지는 그림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한, 이 육도윤회하는 장엄하기도 하고 무시시한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노병사를 끊으려면 그림 그리기를 멈추어야한다. 가장 위대한 화가는 그림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위대한 화가에게는 널빤지나 벽이나 흰 천과 같은 삼계라고 하는 존재의 화판도, 서쪽벽이나 땅바닥이나 물위라고 하는 빛의 캔버스도 지니고 있지 않고 탐진치에 의해 성장하는 의식의 붓도 없다.

그래서 위대한 화가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태양빛이라는 화가는 빛이 와 닿는 지점에서, 즉 빛이 서쪽 벽에 닿으면 욕계의 그림을 그리고, 빛이 땅바닥에 닿으면, 미세한 물질계의 그림을 그리고, 빛이 물위를 비추면 비물질계의 그림을 그리지만, 위대한 화가는 가시적인 태양의 빛을 뛰어넘어 투과하는 불가시적인 빛처럼 그러한 캔버스가 없는 그림, 그림 없는 그림을 그린다.

번뇌를 부순 거룩한 님에게는 그의 업존재의 빛이 와 닫는 삼계라고 하는 캔버스가 없다.
거룩한 님에게는 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선악의 의도적 해위가 성립될 수 없다. 그가 몸을 가지고 있더라도, 착하고 건전하거나 악하고 불건전한 업을 행하지 않으며, 그의 행위는 모든 장애를 넘어서 있으며 단지 작용적이고 업보를 낳지 않는다.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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