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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불교부흥의 신호탄 ‘파아나두라 대논쟁’

기자명 법보신문

스리랑카 불교 명운 걸고
기독교에 맞서 ‘진검승부’

<사진설명>이른 아침 탁발을 나서는 스리랑카 스님들. 스님들의 탁발은 지계의 상징인 동시에 승가에 대한 공경을 표시하고 공덕을 쌓는 기회이다.

아침 6시. 오늘 아침도 변함없이 쾌청하다. 벌써 고개를 쑥 내밀고 올라온 아침 해 곁으로 구름이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기는 하지만 해를 가릴 정도는 아니고 비를 품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스리랑카 사람들 정말 부지런하다. 자전거 패달을 열심히 밟으며 출근하는 사람, 차를 기다리는지 삼삼오오 길거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 간단한 먹거리를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노점상. 이른 아침이지만 거리는 벌써 꽤 많은 사람들로 술렁인다.

탁발은 스님의 위상 가늠하는 기준

이렇게 일찍 거리에 나온 것은 인근 사원의 스님들이 오전 7시 즈음 거리 탁발에 나서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우리나라에서는 스님들의 탁발 모습이 거의 사라져 특별한 행사처럼 돼버렸지만 남방 상좌부 불교권에서 탁발은 여전히 스님들의 일상이다. 다만 탁발을 하는 시간이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그것은 아마도 그 지역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조정된 것이 아닐까 싶다.

조금 기다렸을까. 길 건너 사원의 문이 열리더니 어린 스님 몇 명이 줄줄이 문을 나선다. 가방 같이 보이는 불룩한 발우 자루를 목에 걸고 노란색 양산을 펼쳐든 스님들은 나란히 한 줄로 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10대로 보이는 어린 스님들이지만 발우를 매고 양산을 든 채 한 줄로 서서 걸음을 옮기는 모습만큼은 여법한 수행자로서 손색이 없다. 스님들은 100여 미터 가량 걸어 간 후 기다리고 있던 ‘툭툭’이라고 부르는 삼륜차에 몸을 싣는다. 사원 인근은 주택가가 아니어서 탁발을 위해 주로 시내의 주택가로 간다고 한다.

사실 스리랑카에서도 스님들이 직접 거리로 탁발을 나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신도들이 집에서 만든 음식을 조금씩 싸가지고 아침에 사원을 찾아가 스님들께 공양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새로 태어나거나 학교를 가는 등 집안에 좋은 일이나 기념할 만한 일이 생기면 스님을 집으로 초대해 공양을 올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탁발 자체가 낯선 풍경은 아니다. 탁발은 여전히 스님들의 기본적인 생활 모습이며 재가자들이 보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진다. 그래서 스님들이 탁발에 나서면 주민들은 탁발 시간에 맞춰 음식을 마련해서 기다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사진설명>구나난다 스님이 기독교도와 논쟁을 벌여 승리한 자리에 세워진 파아나두라의 랑콧트 사원(위)과 구나난다 스님의 동상.사진제공=도서출판 운주사.

탁발은 수행자로서 스님의 위상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어떤 스님이 수행을 잘해서 높은 덕을 쌓으면 그 스님에게는 공양 올리려는 재가불자들이 줄을 서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재가불자들이 보시를 거부해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되기도 한다. 탁발은 승가에 대한 존경의 표시인 동시에 오직 승가만이 탁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승가의 위상이 드러나는 중요한 의식의 하나인 셈이다. 오늘날 탁발하는 스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승가가 계율을 지키고 수행에 소홀하지 않으며 승가에 대한 스리랑카 사람들의 존경이 여전히 변함없음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영국이 스리랑카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 불교의 위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약화됐다. 국교로서의 지위를 사실상 빼앗긴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독교 전파를 통해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영국의 정책으로 민중 속에서 조차 그 설자리는 점점 좁아져만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암울한 시기 고사할 듯 위태롭게만 보이던 법등이 다시 찬란하게 타오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1873년 8월 26일, 콜롬비아 남부의 작은 시골 마을 파아나두라(Panadura)에서는 스리랑카 불교의 명운을 건 역사적인 설전이 벌어졌다. 불교를 우상 숭배의 미신 정도로 비하하며 무차별적인 선교를 감행하고 있던 기독교에 맞선 한 스님의 공개적인 토론회가 열린 것이다. 스리랑카 불교 부흥의 사명을 안고 대론에 나선 주인공은 모호티왓테 구나난다(Mohottiwatte Gunananda. 1823~1890) 스님이었다. 구나난다 스님은 영국인 데이비드 드 실바 목사와 사리만나 전도사를 상대로 기독교 교리의 모순과 불교에 대한 그들의 비하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공개적인 논쟁을 벌였다.

1만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파아나두라의 대론장에서 구나난다 스님은 기독교인들이 전지전능하다고 말하는 유일신의 허점과 윤회, 연기, 깨달음 등 불교의 주요 교리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무지를 지적하는 논리 정연한 대론을 펼쳐 나갔다. 어떻게 해서든 불교를 저급한 종교로 전락시키려는 기독교인들의 반박도 거셌지만 물러설 수 없는 논쟁의 장에 나선 구나난다 스님의 결연한 의지와 정법의 교리로 무장한 정연한 논리는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논쟁의 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논쟁이 끝났을 때 목사와 전도사는 불교의 승리를 인정하는 참가자들의 환호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패배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교도의 무지 논리적으로 반박

이날의 논쟁은 동양의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고 비하하려했던 기독교의 오만한 세력 확장에 대해 불교가 정법의 교리로 맞서 승리했다는 표면적인 의미와 함께 불교국가 스리랑카 사람들의 자부심을 고양하고 정법의 힘으로 이교도에 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해준 역사적 전환점으로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

파아나두라 대논쟁으로 불리는 이 역사적인 사건은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미국 남북전쟁의 참전 영웅이었던 올콧트(H.S.Olcott. 1832~1907) 대위와 그의 부인 브라밧츠키(H.P.Blavatsky)는 구나난다 스님의 대론을 보고 감명하여 미국인 최초의 불교도가 되었다. 올콧트 경은 1875년 뉴욕에서 신지협회(The Theosiphy Society)를 설립해 인도와 스리랑카 불교 부흥 운동의 원동력으로 삼은데 이어 1880년에는 스리랑카로 건너와 불교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올콧트 경은 스리랑카에도 신지협회를 설립하고 승가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한편 경전에 대한 연구와 전승에도 힘을 기울여 내부의 역량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또한 재가불자를 결집해 신문과 각종 포교 책자들을 발행했으며 각 지역마다 학교를 세워 아이들이 더 이상 기독교계통의 학교에서 불교에 대한 왜곡된 교육을 받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아나가리까 다르마빨라(Anagarika Dharmapala. 1864~1933)와 같은 불교 부흥 운동의 걸출한 지도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스리랑카 불교부흥 견인한 올콧트

<사진설명>구나난다 스님의 대론에 감명을 받아 불자가 된 후 스리랑카 불교의 부흥을 위해 헌신한 올콧트 대위와 부인 브라밧츠키.

스리랑카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다르마빨라는 청년시절 ‘데이비드’라는 서양식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당시 대다수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계통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구나난다 스님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청년 데이비드는 올콧트 경이 스리랑카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당시 그를 수행하며 통역하는 과정에서 스리랑카의 암울한 현실과 불교의 위기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그는 이후 열정적인 불교운동가가 돼 스스로의 이름을 아나가리까 다르마빨라로 개명하고 스리랑카의 불교를 부흥하기 위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국내의 불교 성지들을 보수하고 부당한 종교 박해에 대해 결연히 대항했다. 또한 스리랑카 불교에만 머물지 않고 상좌부 불교권과 미국, 인도 등을 방문하며 스리랑카의 현실을 전하고 불교도의 역할을 호소하는 등 불교 부흥운동을 국가 부흥운동으로까지 확산시켜 나갔다.

19세기 말 파아나두라 대논쟁을 기폭재로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스리랑카 사람들의 불교적 자부심과 자신감은 올콧트와 같은 헌신적인 조력자들의 노력과 승재가의 굳은 단결을 동력삼아 꺼져가던 법등을 다시 밝히고 독립을 위한 국민들의 열정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었다.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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