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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윳따니까야』 ⑭

기자명 법보신문

뭇삶, 즉 중생은 모래성 쌓는 아이와 같다

뭇삶을 중생이라고 하는데 그 중생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그런데 가장 심오하고 재미있는 비유는 쌍윳따니까야의 뭇삶의 경에 있다. 부처님은 여기서 뭇삶을 모래성을 쌓는 아이에 비유한다.

대화의 상대자는 수행승 라다이다. 라다는 부처님의 제자 수행승 가운데 ‘변재가 있는 자 가운데 제일’이었다. 그는 라자가하의 바라문이었는데 만년에 자식들에게 천대를 받아 출가를 결심했는데 수행승들이 나이가 많은 관계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을 직접 찾아뵙고 그의 확신을 보여 주자 부처님은 싸리뿟따를 시켜 그를 승단에 출가시켰다. 쌍윳따니까야는 라다의 품이 따로 있을 정도로 부처님과 그와의 많은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라다는 심오하고 섬세한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특히 존재의 다발인 오온에 관하여 심오한 통찰을 하고 있었다.

수행승 라다는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뭇삶’, ‘뭇삶’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뭇삶이라고 합니까?’라고 질문한다. 부처님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 탐욕과 환락과 갈애에 묶여있기 때문에 뭇삶이라고 정의한다. ‘라다여, 물질에 대하여 욕망이 있고, 탐욕이 있고, 환락이 있고, 갈애가 있는데, 거기에 붙들려서 꼼짝 못하기 때문에 뭇삶이라고 한다. 느낌에 대하여 욕망이 있고, 탐욕이 있고, 환락이 있고, 갈애가 있는데, 거기에 붙들려서 꼼짝 못하기 때문에 뭇삶이라고 한다. 지각에 대하여 욕망이 있고, 탐욕이 있고, 환락이 있고, 갈애가 있는데, 거기에 붙들려서 꼼짝 못하기 때문에 뭇삶이라고 한다. 형성에 대하여 욕망이 있고, 탐욕이 있고, 환락이 있고, 갈애가 있는데, 거기에 붙들려서 꼼짝 못하기 때문에 뭇삶이라고 한다. 의식에 대하여 욕망이 있고, 탐욕이 있고, 환락이 있고, 갈애가 있는데, 거기에 붙들려서 꼼짝 못하기 때문에 뭇삶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뭇삶이라는 것이 개체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다발로서 파악된다는 것이다.

존재의 다발은 부처님의 법문 가운데 가장 심오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그 수행적 의미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눈 앞에 꽃 한송이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것을 물질적인 측면에서 대상화하고 감수적인 측면에서 느끼고 표상적인 측면에서 지각하고 신체?언어?정신의 형성적 측면에서 의도를 갖고 의식적 측면에서 이 모든 것을 인식한다. 꽃 한송이는 결코 한 송이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항상 존재의 다발로 주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뭇삶에게 이 꽃 한 송이는 한 송이의 실체로서 다가온다. 그 이유는 뭇삶에게는 욕망이 있고, 탐욕이 있고, 환락이 있고, 갈애가 있는데, 거기에 붙들려서 꼼짝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질이나 느낌이나 지각이나 형성이나 의식의 다발 가운데 표면에 드 러난 어느 하나에 붙들려서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뭇삶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뭇삶의 경에 따르면, 뭇삶이 욕망을 통해서 존재의 다발을 다루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노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 라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라다여, 예를 들어 소년소녀들이 모래성을 갖고 논다고 해보자. 그들에게 그 모래성에 대한 탐욕이 없어지지 않고, 욕망이 없어지지 않고, 애착이 없어지지 않고, 갈증이 없어지지 않고, 열망이 없어지지 않고, 갈애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들은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즐거워하고, 귀하게 여기고, 그리고 소유 재산처럼 다룬다.”

모래성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놀이에 대한 욕구와 애착이 있을 때이다. 마찬가지로 존재의 다발 즉 물질이나 느낌이나 지각이나 형성이나 의식이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에게 욕망, 환락, 갈애가 있을 때에만 실체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소년소녀에게 모래성에 대한 탐욕과 욕망과 애착이 없어지면, 그 모래성을 산산히 흩뜨리고 부수어버린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라다여, 그러나 소년소녀들에게 그 모래성에 대한 탐욕이 없어지고, 욕망이 없어지고, 애착이 없어지고, 갈증이 없어지고, 열망이 없어지고, 갈애가 없어지면, 그들은 그 모래성을 손과 발로 흩뜨리고, 부수고, 산산이 흩어버리고, 놀이에서 아예 없애 버린다.’ 그래서 뭇삶의 경에 따르면 수행자는 놀이에 싫증난 소년소녀들처럼 물질의 모래성, 느낌의 모래성, 지각의 모래성, 형성의 모래성, 의식의 모래성을 부수어야한다고 강조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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