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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畵僧들] [4] 보응 문성

기자명 법보신문

‘음영-원근’ 완벽 소화…‘금호’ 뛰어 넘어

금호 스님의 수제자
사실감 중시…산수화 일품
단청-조각에도 뛰어나

어느 날, 고창 선운사 하늘에 화광이 솟자 이를 본 사하촌 사람들은 절에 불이 난 줄 알고 허겁지겁 모여 들었다. 그러나 선운사는 산사의 고즈넉함만을 간직하고 있었을 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고창 선운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관심이 쏠렸다.

당시 선운사에서 특별히 추진하고 있었던 불사는 단 하나. 바로 ‘선운사 팔상탱화’〈사진〉를 조성하던 중이었다. 이 불사의 도편수는 금호 스님의 수제자 보응 문성.

불사에 임할 때 회향일을 정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보응 스님은 마지막 붓을 놓을 때를 회향일로 잡았다. 보다 여법한 탱화를 조성하고자 했던 원력이 있어서일 것이다. 팔상탱화를 조성할 당시 고창 지역은 흉년이 들어 많은 마을 사람들은 물론 산사에도 고초가 잇따랐다. 그러나 보응 스님은 ‘경제적 보시’를 뒤로한 채 불사에 과감히 뛰어 들어 묵묵히 선을 긋고 채색을 해 가고 있었다.

탱화 조성 중에 솟은 화광은 며칠 동안 계속됐다. 이를 지켜본 사부대중은 ‘범상치 않은 탱화가 출현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껏 안게 되었다.

보응 문성 스님은 1867년 서울 마포 공덕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조부모 슬하에서 성장하다 10대에 갑사로 출가한 후 당시 명성을 떨치던 금호 약효 스님을 찾아가 불화에 입문했다.

보응 스님은 1893년 ‘화장사 감로도’와 ‘지장시왕도’ 제작 당시부터 금호 스님과 함께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 금호 스님과 함께한 합작품은 약 25점.

금호 스님의 제자 중에는 정연 스님을 비롯한 많은 화승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보응 문성 스님이 금호 스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때는 언제일까? ‘갑사 대자암 16성중도’(1895년) 화기에 ‘호은 정연’에 이어 ‘보응 문성’이 나타난다. 적어도 이 때부터 보응 스님은 금호 스님에게 인정 받은 게 확실하다. 이후 보응 스님은 ‘범어사 나한전 석가모니불’, ‘신안사 석가모니불’등을 출초 한 후 ‘범어사 나한전 16나한도’(1905년) 조성 때 도편수를 맡았다.

탱화 화기에 따라 보응 스님의 발자취를 역추적 한다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1867년 출생해 10대에 출가했다면 짧게는 1877년에서 길게는 1886년에 출가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중간인 15~6세를 잡으면 1882년께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습작기 10년을 거친 후 1893년 금호 스님과 함께 ‘화장사 감로도’를 제작한다. 그로부터 12년 만에 도편수가 되어 ‘범어사 나한전 16나한도’를 조성한다. 결국 출생 후 10여년 만에 출가한 후 10여년의 습작기를 거친 후 다시 10여년 만에 도편수가 되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보응 스님의 ‘범어사 나한전 16나한도’는 보응 스님에게나 불교미술계에 특별한 작품이다.

불화에 청록산수의 기법과 음영법을 적극 도입했기 때문이다. 나한도, 독성도의 배경 산수가 추상적이었던 반면 이 작품의 산수에는 사실성이 돋보인다. 이에 대해 김정희 원광대 교수는 “당시 민화 십장생도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뛰어난 필력”이라고 평가 하고 있다.

같은 해 보응 스님이 도편수로서 제작한 ‘범어사 괘불’ 역시 눈여겨볼만 하다. 본존불에 황색을 입히고 가운데 부분을 흰색을 칠해 톤 높은 음영을 주고, 본존의 붉은 법의 가운데에도 흰색을 가미해 부피감을 주었는데 이는 기존 불화와는 색다른 양식이 아닐 수 없다.

금호 약효 스님과 보응 문성 스님 사이에 대비되는 기법을 하나 꼽으라면 아마도 ‘음영법’일 것이다. 금호 스님은 당시 ‘음영법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던 고산 축연 스님과 많은 작품을 함께 제작하며 음영법을 적극 도입했다. 보응 스님 역시 금호 스님을 통해 음영법을 공부했지만 금호 스님은 물론 축연 스님과도 작품 활동을 함께 한 보응 스님은 ‘음영법’에 관한한 직접 터득해 간 것으로 보인다. 음영법의 완결도에 있어서 금호 스님보다 보응 스님의 작품에서 높게 나타나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신원사 대웅전 석가모니불화’, ‘해인사 칠성도’〈사진〉에서 보응 스님의 음영법이 어떻게 구사됐는지 엿볼 수 있다. 나아가 ‘흥천사 감로도’(1939년)에서는 원근법까지 구사함으로써 음영법과 원근법을 완벽하게 표현한 보응 스님의 필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감로도는 소실됐다. 직접 감상할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진영을 그릴 때는 개성이 분명해 “사진 보다 낫다”는 평을 들을 정도의 사실감을 중시했던 보응 스님은 탱화를 위주로 작업했지만 불상과 단청에도 조예가 깊었다. 남으로는 한라산과 북으로는 묘향산에 이르기까지 80평생 동안 수많은 족적을 남긴 스님은 1954년 1월 예산 대련사에서 세수 87, 법납 77세로 홀연히 입적했다.

보응 문성 스님의 불화 양식은 이후 일섭, 병문, 상균 스님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이 가운데 일섭 스님은 최고 수제자로서 손색이 없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자료협조 및 문헌
한국미술사연구소. 성보문화재연구원. 김정희 교수 논문 ‘금호당 약효와 남방화소 계룡산파’. ‘보응불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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