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각가 진 철 문

기자명 법보신문

일개 고물, 시절인연 닿으니 ‘성상’으로 탈바꿈

바퀴살 → 광배·톱니바퀴 → 연화좌
‘쇠’에 불성 심은 작가의 선기 탁월해

<사진설명>전철문 조각가의 해맑은 웃음이 만물에 배이는 순간 그것들은 '부처'로 나툰다.

가랑비가 내리는 일요일 이른 아침에 용인에 위치한 장욱진미술관에서 갔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이 단비에 모든 자연이 마음껏 적셔 들어간다. 물기를 받아들이면서 싱싱하게 피어오르는 생명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부산하다. 장욱진이 말년을 보낸 이곳은 지금 유족들에 의해 아담한 미술관으로 환생했다. 그를 기리는 발길이 추억처럼 찾아와 그의 체취가 묻어있을 건물 이곳저곳에 걸터 앉아있다. 죽기 전까지 그는 이곳 자그마한 전통 한옥과 그 옆에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집을 오가면서 먹고 자고 그림을 그렸다. 이른 새벽 홀로 일어나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하염없이 그 불꽃을 보다가 문득 동네를 산책하고 와서는 어김없이 골방 같은, 한 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쭈그리고 앉아 새벽안개같이 맑고 깨끗한, 청량한 작은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리고 나면 하루 종일 술을 마시거나 마당에 핀 꽃들을 지켜보곤 했다고 한다. 장욱진 미술관 한 쪽에 마련된 작은 공간에서 나는 진철문의 조각들을 만났다. 내 기억으로는 이곳에서 최초로 열리는 다른 이의 전시다. 장욱진의 선(禪)적인 회화와 진철문의 쇠붙이로 부처를 만든 조각이 어떤 인연으로 만났다. 동심이 세계를 표현하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정서가 듬뿍 담긴 장욱진의 작품은 문명세계에서는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대상들로 가득하다. 욕심없이 한국의 산수와 마을, 그 속에 사는 사람과 동물이야기를 그린 그림들은 하나같이 마음의 눈을 통해 해탈한 선인, 도인의 가슴과 조우케 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일로 여기고 자기 몸을 그 일로 온전히 소진하고자 했다. “사람이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야 한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버릴 작정이다.”

<사진설명>2005년 명동성당에 전시된 '교감'. 예수와 부처의 이심전심 속에서 이 시대의 아픔을 나누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보면 진철문이 조각의 소재로 사용한 쇠붙이들 역시 한결같이 우리네 삶에서 쓰여지던 연장이자 공구였고 그것들은 오랜 시간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버려진 것들이다. 완전히 소모되어 버린 것들을 가지고 인연이 닿은 대로 연결하고 잇대어 부처의 형상을 만들었다.

세상에 하찮은 게 있나

그러니까 진철문은 이런 저런 쇠붙이들을 용접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었다. 그 형상은 명료하지 않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모두 불상을 연상시킨다. 광배나 후광을 거느리고 가부좌를 틀로 앉아 있는 부처님의 몸이다.

그가 이용한 재료들은 버너틀, 가스렌지틀, 제품을 찍어내는 기계틀, 포크레인 이빨, 시계추와 저울추, 곡괭이, 가스관, 쇠스랑, 수레바퀴, 붕어빵틀, 난로뚜껑, 고드래, 아령, 재받이, 버너 노즐틀, 톱, 철사고리, 못들이다. 그야말로 마치 고물상이나 쓰레기집하장에 와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고철들은 자신의 전생에 모든 힘을 다해 자기 역할을 했다. 사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인간들은 그 기계들을 놓아두지 않는다.

“이리 봉사를 다한 그 닳아진, 그 닳아 빛나는 아름다운 몸을 다시 불상으로 나투어, 이제 기나긴 영겁의 선정에 들어있음을 보여줌이. 또 그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묵고 닳은 그만큼 선을 닦아온 수선(修禪)의 모습이 아닌가”(작가노트)

그는 이제 쓸모가 없어져서 버려진 사물들을 모아놓고 오랫동안 응시하다가 서로를 연결해서 또 다른 존재로 변신시켰다. 그는 발밑에 어지러이 놓여있는 온갖 고물, 연장 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어떤 상이 떠오르면 이내 그것들을 용접해서 불상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는다. 쓸모없다고 버린 것들을 주워 모아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주어 숭고한 대상으로 만들어놓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유희의 소산이자 장난기와 해학이 묻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한국적 미의식의 근원과도 연관된 미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사진설명>전철문 조각가의 '선정삼매' 시리즈.
작품 맨위. 가부좌 상태에서 선정에 든 신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작품 중간. 한태호 시인은 이 작품을 보고 '공배 두른 집오리'라 표현했다.
작품 아래. 광배 혹은 마다라 앞에선 수행인이 깨달음의 기쁨을 덩실덩실 춤을 추는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눈은 유사한 것들을 모아놓아 이를 접목시키고 그를 통해 그가 보고 싶은 것들을 현존시켰다. 그는 이미 있는 것에서 또 다른 존재를 보는 ‘뾰족한 눈’을 가졌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공장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쓰여지다가 닳아버린, 그래서 그 기능성을 상실한 연장들, 기계부품들이 아니라 이내 불상이 되었다. 동시에 그것들은 여전히 우리 눈에 익숙한 연장으로 호명된다. 연장이자 불상이다. 바퀴살이 광배가 되고 볼트가 부처님 머리카락이 되는 식이다. 쓸모없이 버려진 재료들을 모아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불상을 재현한 것이다. 사찰에 모셔진 한결같이 정형화된, 심지어 키치적인 불상들이 아니라 또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소박하고 보잘것없는 재료들임에도 불구하고 몹시 정제되고 절제된 조형요소로 짜여진 이 불상은 더없이 친근하고 매력적이다. 이 불상은 실제 예배용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자신의 욕망에 부응해 만든 불상이다.

예술의 힘 어디서 오는가

그는 이렇듯 일상적인 재료들을 연결해서 종교적인 세계의 풍경, 종교적 도상과 성상의 풍경을 만들어 보인다. 무관해 보이고 하찮아 보이는 사물, 버려진 연장과 공구들이 서로 깊은 인연으로 만나 부처를 재현한 것이다. 모든 곳에 부처가 있고 모든 존재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에 깃든 시간과 기억을 읽어내는 한편 그 사물을 통해 꿈을 꾸고 또 다른 존재를 떠올리는 일이 이 작가의 작업이다. 그러니까 사물(오브제)들은 그의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 예술적 생명력의 원천들이다. 이러한 물질들은 작가의 따뜻한 마음과 놀라운 손길을 거쳐 생명력을 부여받아 새롭게 태어났다.

사물 자체의 존재성이 존중되면서도 그것은 다른 존재로 자꾸만 변이를 일으킨다. 본래의 것이란 없다. 있다면 그저 인연이 가닿는 대로 또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만 보지 않고 그것을 살아있는 또 다른 존재로 볼 줄 아는 시선은 인간중심적 사유에서 벗어나있다. 이른바 물활론적 사유란 말없고 죽어있다고 여기는 사물들을 하나의 생명체로 존중하는 생각과 감정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의 마음이다. 아울러 이는 모든 만물에 불성이 있다고 보는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작가는 오히려 그런 부분을 크게 강조하고 있어 보인다. (미술평론, 경기대교수)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