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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으로 사는 것이 최상의 죽음준비

기자명 법보신문

제3강 죽음에서 열반으로
금강선원장 혜 거 스님

반갑습니다. 요즘 참 좋은 바람이 불고 있어서 참으로 바람직합니다. 사실상 잘 죽는 법을 고찰한다는 것은 그 말 자체가 삶을 반조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인가를 더욱 간절하고 더욱 깊게 고찰하고자 하는데서 나온 말이 잘 죽는 법일 것입니다. 웰다잉이라는 것이 잘 죽는 법이죠? 그렇다면 잘 죽는 법,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인가 고찰 한번 해보겠습니다.

죽음 문제를 제일 먼저 깊게 들고 나오신 분은 인류 역사상 부처님이 처음입니다. 부처님은 출가하기 전 태자 시절에 사람이 죽어 나가는 상여를 보시고는 세상 사람이 다 죽는다는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태자는 생각하시길 ‘사람이 누구나 죽는다면 지금 죽으나 내일 죽으나 며칠 더 있다 죽으나 몇 십 년 더 있다 죽으나 무슨 차이가 있는가.’ 부처님은 상여를 처음 보시고는 누구나 죽는다는 점을 절실히 느끼신 분입니다.

동물도 죽을 때를 알아 준비

이것이 우리와 부처님이 가장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상여가 나가는 것을 수 없이 많이 봤지만 단 한 번도 그 행렬이 나로 연결된다는 생각을 해 보았는가 입니다. 안 해 보았습니다. 80살이 넘고 90살이 넘어도 절대 안합니다. 죽음은 다른 사람의 일이고 자신의 일은 아닙니다.

인간이 얼마나 무지 몽매하냐하면 병이 들어 조금 있으면 죽을 것이면서도 의사에게 주사 놓아달라고 팔뚝을 내밉니다. 주사를 맞으면 혹시 살아날까 해서. 그래서 마지막으로 바늘도 못 빼고 임종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출가하여 성불하신 부처님은 돌아가실 때가 되어 제자들을 거느리고 쿠시나가르로 가셔서 모든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최후의 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님의 열반은 중생에게 최초로 열반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부처님보다 더 잘 죽은 사람은 이전, 이후로도 없었습니다.

수행을 많이 하신 큰 스님들께서는 어떻게 임종을 하십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열반을 잘 하신 분은 원효 대사이십니다. 원효대사께서는 자신의 임종을 남에게 보이시지 않았기 때문에 원효대사가 거쳐 가셨던 절마다 모두 자기네 절에서 임종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효대사는 위대한 열반을 하신 분입니다.

이 세상의 만물 가운데 사람을 영물이라고 하지만 정작 사람은 죽을 줄을 모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동물이 다 죽을 줄을 압니다. 산에 많은 동물이 살지만 산에 가보더라도 동물의 죽은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동물들이 사람처럼 죽을 줄 모르고 아무데서나 죽었다면 산의 동물 뼈 때문에 다닐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가끔 동물 뼈가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이놈들은 대부분 사고사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고로 죽은 동물들은 뼈를 남기지만 그렇지 않은 동물들은 절대 뼈를 남기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죽을 때가 되면 숨어서 죽습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으로서 그것을 보여주신 분이 원효대사 이십니다. 아무도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동서양에 없는 가장 위대한 열반입니다.

그 다음에 열반 잘 하신 분으로는 중국의 방거사라든지 두문봉 스님이라든지 기이한 열반을 남기신 분들이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분들처럼 앉아서 죽고, 서서 죽을 수 있는, 소위 말하는 임종의 보습을 보여 줄 수 있을까요. 그 힘은 삼매뿐입니다. 삼매 속에서 죽음을 맞기 때문에 갖가지 임종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근자에는 종정을 하셨던 효봉 스님, 오대산의 방한암 스님, 이런 어른들이 전부 앉아서 임종을 하셨습니다. 그런 중에 오대산에서 이름 없는 스님 한 분이 20여 년 전에 보궁 바로 밑에 있는 용안수라고 하는 샘물 바로 앞에서 앉아 돌아가신 스님이 계십니다. 그때 오대산 보궁에서는 봉찬회라는 큰 행사를 할 때인데 이 스님이 그 행사에 참석하셨다가 축원하는 사이에 먼저 내려가셨습니다. 행사 끝나고 신도가 내려가다 보니 스님이 그 곳에서 열반하신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 죽음으로 열반 보이셔

임종을 이렇게 자유롭게 자기 마음대로 맞이할 수 있다면 죽음의 고통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렇게 하려면 ‘죽을 때 고통 없이 죽어야겠다.’고 마음만 먹어서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을 적에 잘 산 사람만이 죽을 때에 그렇게 마음대로 죽을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잘 죽고 싶다면 정말로 잘 살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를 고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 사는 법을 모든 성인들이 다 가르치십니다. 성인들의 가르침이란 전부 잘 사는 법입니다.

가장 현실적으로 잘 사는 분을 가르치신 분을 꼽자면 공자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분은 요즘 말로 현실주의자입니다. 이 분 가르침의 핵심은 어질 인자에 모든 핵심을 둡니다. 하지만 실제로 공자가 주창하신 것은 예(禮)입니다. 예를 강조하신 이유는 인은 상대가 있어도 하고 없어도 할 수 있지만 ‘예’는 상대가 있을 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를 세상의 질서로 삼았습니다. 상하의 질서, 좌우의 질서를 모두 예로 정리하신 분이 공자라 여기시면 됩니다.

이 공자 보다 500년 앞서 중국 주나라를 문왕이 다르시던 시대에 아버지인 무왕이 남긴 정치 이념으로 ‘홍범구주(洪範九疇)’가 있는데 이는 세상사는 도리로서 서경에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 세상을 잘 사는 아홉 가지 방법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이 구주가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오복(五福)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할 부분은 ‘계의’입니다. 머리 숙여 의심하라, 심사숙고하라, 골똘히 의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정말 잘사는 방법은 매사를 심사숙고하고 골똘히 의문하는 것이 진짜로 잘사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오복이 있는데 이는 요즘 말하는 오복과 좀 다릅니다. 3천 년 전 사람들에게 오복의 첫 번째는 수명으로 이는 3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3천년 후라도 같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복입니다. 오래 살아도 가난하면 볼썽사납기 때문이죠. 그 다음이 건강입니다. 오래 살고 복이 있더라도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복의 세 가지 기본으로 ‘수복강녕’입니다.

성현의 가르침이 모두 ‘웰다잉’

네 번째가 유호덕으로 좋아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오래살고 돈도 있고 건강한데 좋아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복인라고 하겠습니까. 그 다음이 고종명(考終命), 잘 죽는 것입니다. 잘 사는 다섯 가지 법 중에 잘 죽는 법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오늘날 보아도 참으로 획기적입니다. 옛 사람들은 비명횡사 안하는 것을 잘 죽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호랑이에게 물려간다든지 하는 것을 비명횡사라 했는데 요즘엔 오히려 예전보다 비명횡사할 확률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죽는 법에 대해 진짜 심사숙고 해야만 합니다.

그 다음으로 잘사는 방법을 제시한 사람이 장자입니다. 장자는 지인무기(至人无己) 신인무공(神人无功) 성인무명(聖人无名)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지극한 사람은 내가 없다는 뜻이니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 없는 사람이 되려면 바로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한다 말입니다. 신격화된 사람은 공이 없다니 남을 위해 베풀어 놓고도 공치사가 없으려면 신격이 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 성인이 되어야 이름이 없어진다는 것으로 이름이 없다는 것은 태어남이 없다는 것으로 성인이 되면 생사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곳 아상, 인상, 수자상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생상’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경』에도 중생상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아상, 인상, 수자상이 있으면 중생이요, 이것이 없으면 부처입니다.

이 세상을 잘 살려면 주인이 돼야 하는데 그럼 불교에서는 어떤 사람을 주인이라고 합니까. 불교에서 직접 주인의 개념을 설파하신 스님은 중국 당나라 때의 임제 스님입니다. 임제 스님은 ‘수처작주(隨處作主)’라 표현하셨습니다. 가는데 마다 주인이 되라는 말이지요. 그럼 주인이 되는 법은 무엇입니까. 임제 스님께서는 평상심이 불법이라 하셨습니다. 아주 쉽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고려시대 보조 국사도 보고 듣고 먹고 잠잘 줄 아는 것이 불법이라 하셨습니다. 임제 스님도 같은 말씀이십니다.

이와 같이 주인이 됐을 때 우리는 잘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갈 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닌 열반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Point
옛 성현들의 잘 사는 법

공자
예를 모든 인간관계의 기준으로 삼아 산다.
무왕
홍범구주에 근거 인생을 깊이 생각하며 산다.
장자
지인무기, 신인무공, 성인무명이 되도록 산다.
임제 스님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 산다.


혜 거 스님은

1959년 영은사에서 탄허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고 1961년 월정사에서 범룡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탄허 스님 회상에서 대교과를 수료했다.

1995년 대한불교진흥원 불교문화센타 상임법사(1995-현재) 1996년 탄허대화상문집 편찬위원장을 역임한 스님은 2005년 1월에는 탄허불교재단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1988년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금강선원을 개원한 이후 재가불자들에게 법을 전하며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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