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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껍데기 까는 법만 알지 말고 직접 먹어 보아라

기자명 법보신문

[7인 선사 초청 대법회] 학림사 조실 대 원 스님

‘계합’하는 사회에선 소란·원망·시비 사라져
‘중생 보따리’내려 놓고 ‘나’를 비워 해탈해야

(법상에 올라 묵연히 앉았다가 주장자 세 번을 치다.)
“아시겠습니까?”

산승이 법상에 올라 말없이 주장자를 세 번 치고 들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시겠습니까?’ 했습니다.

會卽塚上加泥
不會卽無孔鐵鎚
非會不會
未免平地死人
알았다고 한즉 무덤위에 진흙을 더함이요,
알지 못했다 한즉 구멍 없는 쇠뭉치라.
안다, 알지 못 한다, 전부 아니라 해도
평지에 죽은 사람을 면치 못함이로다.

필경, 어떻게 일구를 일러야 옳겠습니까?
(조금 있다가 주장자를 내리친 후 게송 이르기를)

金果早朝猿摘去
玉華晩後鳳銜歸
금과일은 아침 일찍이 원숭이가 따가지고 가고,
옥화는 저녁에 봉황새가 물고 돌아감이로다.

아악! 억!

대원정사와 법보신문사가 ‘7인선사 초청 법회’를 열었는데 선법회란 ‘아는 분’은 기가 막힌 맛을 볼 수 있겠지만 모르는 분이 들으면 이것처럼 싱거운 것이 없습니다. 사실 ‘선’이란 말을 한 순간 온 몸에 진흙을 바른 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말하기 이전에 서로 얼굴 마주보고 눈동자 마주친 순간 척 하니 알아들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친구는 부인에게 눈을 한 번 꿈쩍 했습니다.

그러자 부인도 고개를 한 번 끄덕였습니다. 말하기 이전의 소식입니다. 친구가 왔으니 차와 과일을 내오라는 뜻이지요. 친구 찾아왔다고 부인과 앉아서 무슨 술을 낼까, 어떤 차를 낼까, 어떤 과일을 낼까 의논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잠시 기다려 보니 친구 부인은 차와 과일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를 본 그 사람은 두 부부간에 눈짓으로 서로 계합하는 것을 보고 너무 좋게 보여서 자신도 집에서 친구가 오면 이렇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사람 집에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도 부인에게 눈을 한 번 꿈쩍 했습니다. 이에 부인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잠시 후 부인이 나왔습니다. 이 부인은 먼저 친구 부인과 달리 손에는 차와 과일이 아닌 코트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 부인은 외출해서 친구를 대접할 것으로 안 것이지요. 이건 아닙니다.

먼저 친구와 그 부인은 서로 계합했지만 이 사람과 부인은 계합하지 못한 겁니다. 제가 주장자 들어 보였을 때 여러분과 제가 척 하니 계합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는데 말입니다.

계합의 삶은 선가에서만 통용되는 게 아닙니다. 친구와 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그것도 일상에서의 계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친구와 친구, 사회 동료와 상사 사이에 이러한 계합이 이뤄지면 소란, 원망, 시시비비 같은 저차원 세계의 의식은 이 땅에서 없어질 겁니다. 일반 상식과 지식으로만 살아가는 우리의 살림살이로는 끊임없는 불협화음만 이어갈 뿐 행복과 평화는 멀어지기만 합니다.

금일 대중은 이 도리를 아시겠습니까? 만약 알지 못할진대 산승이 거듭 말씀 드리겠습니다.

藏人不藏照
藏照不藏人
人照俱藏
人照俱不藏
後來擧者甚多
明者極少
사람은 감추되 비추는 것은 감추지 않고
비추는 것은 감추되 사람은 감추지 아니하며,
사람과 비춤을 함께 감추기도 하고
사람과 비추는 것을 모두 감추지 않기도 하나니
후래에 학자가 이 문제를 드러내는 이는 많으나
밝히는 자는 극히 적음이로다.

이건 무슨 도리입니까. 중생의식 넘어선 높은 차원에서만이 스스로 알고 맛을 볼 수 있습니다. 1구에 아무도 알아듣는 이 없고 2구에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니 제가 부득이 한발두발 세발 나와서 구린내 나는 소리를 자꾸 하는 것입니다. 이미 알아차린 사람에게는 저의 이런 사족은 욕되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확실치 못한 분이 있기에 여러 말 하게 됩니다.

이 한암이 금일에 눈썹을 아끼지 않고 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설파해 드리겠습니다.

藏人不藏照
鷺立雪非同色
藏照不藏人
明月蘆華不似他
人照俱藏
了了了時無可了
人照俱不藏
玄玄玄處亦須呵

사람은 감추고 비추는 것을 감추지 않는 것은
뱁새와 까마귀가 눈 위에 앉으니 색이 같지 않음이라.
비추는 것을 감추고 사람은 감추지 않음이여
밝은 달과 갈대꽃이 서로 같지 않음이로다.
사람과 비춤을 함께 감춤이여
요달하고 요달할 때 가히 요달할 것이 없고
사람과 비춤을 함께 감추지 아니함이여
현묘하고 현묘한 곳에 또한 모름지기 웃음이로다.

어떤 스님이 한 거사 집에 탁발 차 찾아가니 거사가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스님이 방에 앉으니 장자가 인사를 하고 앉아서 물었습니다.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대답을 바로 해 주시면 탁발해 가져갈 것이고 대답을 바로 못하면 탁발을 해 가실 수 없습니다.”

스님이 장자에게 “물어라” 하니 장자가 마음 심자(心)를 써놓고 “이게 무슨 자”냐고 물었습니다. 그 스님이 대답하기를 “마음심자가 아니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장자는 부인을 불러 물었습니다.

“여보, 이게 무슨 글자입니까?”
“마음심자 아닙니까?”
“하하하. 당신도 암주가 될 만한 자격이 있소.”

그리고는 장자가 스님에게 말합니다.

“스님과 제 부인의 경지가 같으니 시주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스님은 그 장자로부터 시주를 받지 못했습니다.

(큰 스님이 대원정사 청법 대중을 향해)
마음 심자를 써놓고 무슨 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슨 자라고 하시겠습니까?
(당시 청중의 한 거사가 대답하기를)
“당신(장자)의 얼굴이라 하겠습니다.”
(큰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얼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또 한 거사가 답하기를)
“종이를 찢어버리겠습니다.”
(이에 큰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종이를 찢어버려도 여기서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대답을 하시는 이가 있으니 맞든 안 맞든 간에 좋습니다”

이 시대는 과학 물질 시대라 이 공부 하는 사람 많지 않습니다. 공부 하는 사람도 마음 심(心)자 놓고 ‘이게 무슨 자인가?’하고 물으면 척 하니 대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장자의 물음에 탁 대답했으면 탁발 잘 해 갔을 텐데 그걸 못합니다. 어떤 스님은 선어록 외워 갖고 와서는 ‘나라면 이렇게 답하겠다’하는데 이것은 천리길로 멀어지는 겁니다. 제가 답을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답을 내는 순간, 저도 죽고 여러분도 죽습니다. 말씀 드리지 않는 것이 여러분도, 저도 사는 길입니다.

자, 여러분은 뭐라 이르시겠습니까? 어찌하면 옳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바로 알아서 저에게 찾아 오시면 바로 점검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고암 스님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운문선사와 조백대사 두 분이 있었다. 두 스님 중 누가 더 중생제도를 많이 했겠는가?”
운문 스님은 중생제도 할 때마다 나무 작대기 하나를 방에 던져놓았습니다. 후에는 방에 나뭇가지가 가득했습니다. 조백대사는 도적놈 굴에도 가고, 시장바닥에도 나가며 산천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불법이 어떻고 저렇고 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조백 대사도 깨달은 분으로서 운문 스님과 쌍벽을 이뤘지요. 고암 스님은 저에게 그걸 묻는 겁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두 대사 모두 삼십봉씩 때려 천도를 해야겠습니다.”
고암 스님이 다시 묻습니다.
“어찌해서 그리해야 하는고?”
“한 사람은 흰 쌀밥을 주고 한 사람은 잡곡밥을 주겠습니다.”
이에 고암 스님은 “좀 미흡하니 다시 일러 보라”하셨습니다.
제가 또 말했습니다.
“육육 삽십육이요, 구구 팔십일입니다.”
“그대는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고?(何處得住)”
“큰 스님, 오늘 점심 오찬은 좋은 밥이니 많이 잡수십시오.”
이에 큰 스님은 “하하하”웃으셨습니다.
저는 손뼉을 세 번 치고 “허이허이”하고 물러갔습니다.

다시 고암 스님이 저에게 “은주발에 담긴 눈과 달이요. 소나무에 학의 소리 장수천을 뛰어났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물음과 대답이 분명해야 하고 시작과 맺음이 분명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모든 분은 다 놓고 버려야 합니다. 비운 후 다시 돌이켜 보면 지금과 다른 세계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자면 이 보따리를 버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이 중생의 보따리를 내려놓으면 세계제일의 선지식이 될 것입니다.

중생의 보따리를 내려놓으려면 공부해야 합니다. 많은 공부 중에서도 참선을 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잘사는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가? 다른데서 잘 사는 법, 행복을 구하려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 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그 ‘나’를 참구해 보면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진설명>장자가 내 보인 마음심(心)자를 나는 무엇이라 이를까! 대원스님의 법설에 계합하려는 청중들의 눈빛이 너무도 영롱하다.

그러나 직접 참구해 맛을 보아야 합니다. 밀감 껍데기 까는 방법만 알고 끝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직접 그 밀감을 드셔야만 합니다. 그래야 밀감 맛을 알지요. 밀감 맛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천만번 들어봐야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입니다.

요사이 사회적으로나 우리 조계종의 종단에서 나오는 소리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지금도 제방선원에서 뼈를 깎는 정진을 하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학림사에서 수행하시는 선사들만 해도 뼈만 남아 있습니다. 지난 석달 동안의 결제철에 용맹정진 하시고 지금까지 연이어 정진하고 계십니다. 이런 공부 하시는 분들 제방 선원에 꽉 차있습니다. 이것이 불조의 혜명을 잇는 것이요, 이 사회에 보이지 않는 광명을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 부처입니다. 그렇지요? 오늘 법회를 인연으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가로대 아시겠습니까?

慇懃爲唱玄中曲
空裏蟾光撮得
石女舞成長壽曲
木人唱起太平歌

은근히 그윽하고 깊은 가운데에 곡조를 노래 부르고
허공 속에 번쩍 빛나는 광명을 잡아 얻을 수 있겠는가?
돌 여자가 춤을 추며 장수곡을 이루고
목인이 일어나 태평가를 부름이로다.

주장자 세 번치고.
아악!
법상에서 내려오시다.

정리=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사진=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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