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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고 쉬고 또 쉬고 그 생각까지 쉬는게 행복 향한 첫 걸음

기자명 법보신문

[7인 선사 초청 대법회]축서사 선원장 무 여 스님

돈-권력-명예 아무리 높아도 수행의 기쁨만 못해
“쉬고 쉬면 몽중일여의 경지에서 진정한 행복 찾아 ”

<사진설명>무여 스님은 "몽중일여의 경지에서 느끼지 못하면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라며 쉬고 집중하는 두 방법으로 행복의 길을 찾을 것을 당부했다.

오늘 법문은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선을 하면 어떤 행복이 오고, 어떤 만족감을 가질 수 있을까요. 행복으로 가는 길 중에 가장 좋은 길을 참선이라고 하는데, 과연 어떤 행복을 느낄 수 있는가에 대해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바라고, 가장 좋아하는 말이 행복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행복하고 싶다, 행복한 인생 등 행복은 인생의 궁극적 목표이고 바로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이란 다행스럽고 복이 많다는 뜻이지요. 심신의 욕구가 충족이 되어서, 즉 몸과 마음의 욕구가 충족이 돼서 부족함이 없는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행복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행복지수는 얼마나 됩니까.

진정한 행복은 외부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는 작은 행복, 허망한 행복만을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 참 행복, 진정한 행복은 내부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자기의 마음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참 행복을 느끼려면 자기 본래로 돌아가야 합니다. 돈이나 명예, 권세, 소중한 가정생활에서 얻는 작은 행복은 만들 수도 있지만, 진정한 행복은 자기 내부에 갖추어진 것을 느낄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행복을 타고납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고 나서 제1성이 “아! 기특하구나. 일체중생이 부처님과 꼭 같은 지혜와 덕상을 갖추었네”하셨습니다. 일체 중생, 사람은 물론이고 개나 소나 돼지에서부터 땅속에 있는 지렁이나 개미 같은 미물까지도 모든 중생은 부처님과 꼭 같은 초롱초롱한 지혜, 천재성을 다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전을 읽어보면 그 천재성을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떤 질문을 하던 기다렸다는 듯이 진리의 말씀으로 척척 대답하셨습니다. 그런 천재성과 덕상(德相), 32상 80종호의 복상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즉 중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본래는 부처다. 즉 본 바탕은 누구나 부처님과 꼭 같다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태어났다, 누구나 행복을 타고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나도 진정한 행복, 참 행복을 타고났다는 자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부처님, 깨친 사람입니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은 언제 어디서나 당신 마음대로 선정에 들어 행복을 누렸습니다. 몇 시간이던 며칠이던 당신 마음대로 행복을 자유자재한 분이 부처님입니다. 깨친 사람의 행복은 어느 정도인가. 옛날 깨친 어떤 도인은 사흘이나 춤을 췄다고 합니다. 얼마나 좋기에 사흘이나 춤을 췄겠습니까? 또 어떤 선지식은 “이 깨침의 기막힌 기분을 누가 알리요”했습니다. 너무 좋아서 하루종일 다녀도 지칠 줄 모르고, 자기도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신통한 경계를 느껴서 자기를 억제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이런 경계는 여러분 스스로 깨쳐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런 행복과 여러분의 행복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좀 차원을 낮춰서 보통 수행자들이 ‘참 행복하다, 참으로 만족스럽다’하는 경계는 어느 정도일까요. 수행을 하다보면 몽중일여(夢中一如), 즉 꿈속에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수행에서 일반적으로 흔히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화두에 진의가 일어나면 집중이 되고, 화두에 막 몰입됩니다. 안될 때는 이런 저런 온갖 망상이 가마솥에 물 끓듯이 일어나지만, 일체 망상이 다 사라지면 고요해지는 것입니다. 고요하다는 것은 안정이 된다는 뜻입니다. 안정이 되면 몸이 맑고 가벼워지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온 전신에서 묘한 즐거운 기분을 느끼는데 그것을 희열이라고 합니다.

기쁘다고 할 수도 있고, 즐겁다고 할 수도 있는 아주 오묘한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기분의 극치를 흔히 극락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수행을 하면 마음속에서 극락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극락까지는 못 가더라도 그렇게 오묘한 희열,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즐거움만 느껴도 그 이상이 없다는 것을 바로 느끼게 됩니다. ‘아 이것뿐이구나, 이 공부는 안 할 수 없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희열과 법열을 느끼는 그런 상태가 되면 ‘행복이 어떤 것이다’ 하는 것을 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행복을 느낄 정도가 되면 온 몸에서 봄기운이 일어나듯이 말과 글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오묘한 기운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수행이 깊어지는 상태가 되면 지극히 안정이 됩니다. 그런 정도가 돼야 진정한 행복이고, 참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몽중일여의 경지 정도를 느껴보지 못하면 행복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보살님들이 많은데 남편들 중에 돈도 제대로 벌어오지 못하고 말썽만 일으키는 그런 분이 있다면, “돈 안 벌어와도 좋으니 참선이나 해라”하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또 공부도 안하고 말썽이나 피우던 아들이 공부를 잘하고 있는데도 이 공부가 되는 어머니가 볼 때는 보잘 것 없게 보여 “머리 아프게 공부하지 말고 수행이나 잘해라”하는 그런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수행을 하면 “오직 이것뿐이다, 이것밖에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체험을 한 분들이라면 매일 법당이 만원사례일 것입니다. 요즘 세속은 돈 세상이라고 할 정도로 돈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고도 하는데, 돈을 많이 벌어서 아무리 재벌의 아성을 쌓아도 그런 행복은 못 느낍니다. 여기 대원정사를 창건하신 장경호 거사님 같은 분은 예외입니다만, 어쨌든 보통의 재벌들은 돈을 아무리 많이 번다고 해도 그런 행복을 못 느낍니다. 요즘 웰빙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돈 좀 많이 벌어서 좋은 아파트에서 잘 먹고 잘 입고 화려하게 살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막상 갖추고 나니까 행복하지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외면적으로 갖췄다고 해도 내면적으로 갖추지 못하면 행복은 멀다는 말입니다. 세속에서 느끼는 행복과 절에서 수행해서 느끼는 행복을 자세하게 비교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크게 볼 때 두 길이 있는데 첫째는 마음을 쉬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느끼려면 마음을 쉬든지 마음을 집중하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흔히 인간을 미망 중생, 혹은 미혹 중생이라고 합니다. 어둡고 탁한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왜 어둡고 탁하냐 하면 수십 생 수백 생을 살아오면서 지은 업으로 인해 일으키는 번뇌망상으로 인하여 우리들의 마음이 어둡고 탁하다는 것입니다. 그 어둡고 탁한 마음을 맑게 하고 밝게 하는 것을 수행을 하고 마음을 닦는다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물체가 아니기에 형상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흔히 허공 같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허공 같은 마음을 어떻게 닦겠습니까. 물체를 걸레로 닦듯이 닦을 수가 없습니다. 그 흐린 마음 탁한 마음을 닦는 것을 흔히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닦는 방법 중에 가장 쉬운 방법이 마음을 쉬는 것입니다. 마음을 놓는 것이고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마음을 쉰다 놓는다 비운다는 것은 일체 생각을 않고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즉, 번뇌망상을 피우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일체 망상을 피우지 않고 일체를 비우면 맑아집니다. 맑아지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옛 어른은 천 번 쉬고 만 번 쉬라고 했습니다. 쉬고, 쉬고, 또 쉬고, 또 쉬라는 것입니다. 그 쉰다는 생각까지도 쉬라는 것입니다. 쉬면 곧 행복해집니다. 쉬면 참으로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첫 걸음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쉰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쉬어서 그 쉰다는 생각까지도 없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대원정사 신도님들이 수준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준이 높다는 것은 좀 많이 배워서 많이 안다는 뜻일텐데, 마음 공부는 수준이 아무리 높아도 박사학위를 몇 개쯤 받았어도 닦지 않으면 모릅니다. 일자무식이라도 깨치면 부처이고, 박사학위를 몇 개쯤 가졌어도 못 깨치면 그건 망상일 뿐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본인 스스로 실참실구해서, 마음을 비우고 느껴야 합니다. 책을 읽어서도 작은 행복, 소박한 행복은 나름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 큰 행복은 비우고 집중을 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마음 공부를 해서 참으로 행복을 느끼려고 하는 사람은 첫째 발심을 해야 합니다. 발심이란 발보리심의 준말이고, 보리를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 발심입니다. 보리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등정각을 말하는 것으로, ‘반드시 확철대오해서 우주의 근본진리를 깨치고야 말겠다’는 대단한 마음을 내는 것이 바로 보리심입니다. 참선을 해서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고 싶은 분은 참선하는 이 일이 가장 큰 일입니다. 이것만은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는 확고부동한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발심이고, 참으로 발심을 하면 의외로 쉬운 것이 참선입니다. 그래서 수행해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싶으면 마음의 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오욕락에 빠져서 분수에 넘치게 만족할 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과분하게 욕심을 내고, 잘 안되면 남을 미워하고 분한 마음을 내곤 합니다. 삼라만상의 이치와 도리도 모르면서 부끄럽게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것인가, 아니면 우주와 인간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고 바른 생각으로써 바른 생활을 하면서 바른 정진을 하면서 살 것인가. 그래서 부처님의 정법을 체험해서 생사까지도 초탈해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면서 살 것인가 깊은 생각을 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활도 가급적이면 좀 단순하게 해서 번뇌망상이 덜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수행을 가로막는 주범은 번뇌망상이고, 번뇌망상을 없애고 퇴치하는 작업이 수행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법 중에 최상은 화두 참선입니다. 초보자들의 경우 어렵다고 하지만, 참으로 발심하고 깊은 신앙심으로 애쓰면 의외로 쉬운 것이 화두 참선입니다. 화두 참선은 깨치면 바로 부처 경지이기입니다. 부처로 가는, 깨침으로 가는 가장 확실하고 가장 분명한 길이 바로 화두 참선이기 때문에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화두 참선을 해서 깨쳐서 진정한 행복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화두는 간절하게 들어야 합니다. 며칠 굶은 사람이 밥 생각하듯,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이 해야 합니다. 어쨌든 화두는 아주 간절하게 들어야 진정한 의정이 나고, 그런 간절함을 모르면 화두 참선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화두하는 분은 그래서 생활 자체가 간절하게 됩니다. 그러니 집에서 생활하는데도 그저 예사롭게 그렇게 하지 마세요. 종교는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두하는 사람은 간절하게 하듯이 인간이 변해야 합니다. 그래서 행주좌와 일체가 간절함으로 통해야 합니다. 화두 하듯이 아주 절실하게 생활까지도 그렇게 하는 습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개가 절에 다니더니 사람 달라졌다고 주변에서 우러러보고 존경심이 나도록 살아야 합니다. 참선 잘하는 것처럼 인간 자체도 잘 살고 어질어져야 합니다.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도를 구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정성을 다해라. 정성이 감응하면 덕화를 얻는다. 지극한 마음으로 하면 능히 구하는 바를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도를 구하고 마음을 닦고 진정한 행복을 바라고자 하는 사람은 아주 정성껏 지극함이 있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듯이 정성껏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듯이 막 폭 빠져서 하는 공부야말로 의외로 쉽게 바로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공부 하는데는 흔히 죽음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죽을 각오로 하는 것입니다. 아예 목숨을 떼 놓고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견성하고,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가 여반장(如反掌)이라고 했습니다.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참으로 정성을 가져서 지극하게 하면 여러분 앉은 이 자리가 바로 부처님 자리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행복은 아주 가까운데 있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자신 내면에 충만해 있는 그 행복을 느끼지 못할 따름입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은 전부가 안 해서 그렇지 깨칠 수가 있고, 어떤 분보다도 행복해질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을 갖추신 분들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다만 몇 시간 몇 십분을 하더라도 폭 빠지도록 열심히 정성껏 간절하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참으로 공부하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화두를 놓치지 않고 고집스럽게 끈질기게 그렇게 애쓰면 의외로 쉽게 될 수가 있습니다.

<사진설명>불자들이 무여 스님의 법문을 경청하고 있다.

화두가 잘 안 되고 염불이 잘 안 되는 분들은 늘 자기를 반성하세요. 자기를 늘 점검하세요. 화두가 안되고 염불이 안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부족하고 못나고 어리석은 점을 과감하게 매일 고쳐나가야 합니다. 수행뿐만 아니라 삶 자체도 그렇습니다. 매일 발전하는 자기를 느낄 정도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정도가 안되면 반쪽 행복이고, 행복은 저만큼 멀어져 있게 됩니다. 그렇듯이 지혜롭게 하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진정한 행복도 느낄 수 있습니다.

요즘은 웰빙에 이어 웰다잉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 웰다잉 즉 멋진 죽음이나 행복한 죽음 역시 수행에서 오는 것입니다. 옛날 조사 스님들은 죽음을 희롱하듯이 자유자재로 했습니다. 해학을 연출하듯이 그렇게 가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웰다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죽음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그래서 죽음에서도 참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견성해서 부처님이 되어 생사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불교의 목표입니다.

여러분들은 스님들의 법문을 잘 들으시고 화두선을 제대로 해서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이 무엇인지, 불법의 대의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아서 인생의 참 행복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대원정사와 법보신문이 아주 좋은 뜻을 가지고 이런 법회를 열었는데, 법회가 여러분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가 돼서 행복으로 가는 바른 길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끝으로 내가 한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셨겠지만, 어떤 행복보다도 수행해서 참으로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행복다운 참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 행복은 수행에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행복하십시오.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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