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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허물 보지 않으면 도는 절로 이뤄 진다”

기자명 법보신문

[7인 선사 초청 대법회]화엄사 선등선원 선원장 현 산 스님

설통급심통(說通及心通)이여
여일지허공(如日至虛空)이니라.
유전돈교법(惟傳頓敎法)하야
출세파사종(出世破邪宗)이니라.
(설법도 통달하고 마음도 통달하여
해가 허공에 떠오름과 같나니
오직 돈교의 법만을 전하여
세간의 삿된 가르침을 부수는도다.)

육조 혜능 스님의 무상송(無相頌)에 나오는 첫 번째 구절입니다.

늘 말을 하고 있지만 말하고 있는 그 당체를 우리는 모릅니다. 그 당체를 바로 보는 것, 이것이 설통(說通)입니다. 다음은 심통(心通)인데. 마음의 본 바탕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내 면목을 깨닫는 것, 이것을 심통이라고 합니다.

내가 내 면목을 깨닫는 그 자리는 해가 허공에 가득 찬 것과 같습니다. 해가 허공에 찰 것 같으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환하게 잘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 면목을 깨달을 것 같으면, 두두물물(頭頭物物) 산하대지(山下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우주(宇宙)와 인생(人生), 진리(眞理)를 남김없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견성법(見性法)이라고 합니다.

‘돈교법(頓敎)하야 출세파사종(出世破邪宗)이니라.’ 견성법으로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별별 종류의 종교가 많습니다. 불교만 해도 많은 가르침이 있는데, 너무 많다보니 팔만사천법문이나 됩니다. 중생의 근기가 다르니, 수준에 따른 많은 대기설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저나 여러분들도 멋진 형상의 모습으로 이생에 태어났지만 우리는 결국 늙고 병든 후 죽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인생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내 면목을 모르고 갑니다. 결국 캄캄한 동굴에서 헤매다 한 세상 마칠 뿐입니다. 그 캄캄한 동굴에 촛불 하나만 켜 놓아도 환해지듯이 바로 깨달을 것 같으면 나 자신은 물론 세상 이치와 진리를 확연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내 면목 깨달으면
삼라만상-인생
남김없이 볼 수 있어

부처님은 견성법만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가난하고 병든 사람은 어떤 기도를 하고, 어떤 염불을 해야 재앙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많은 방법들을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성품을 바로 보는 견성법을 설하셨습니다. 나고 죽는 고통에서 벗어난 영원한 행복의 자리. 무한한 공덕이 본래 갖춰진 내 면목을 깨달아 삶의 모든 고뇌에서 해탈할 수 있도록 최상승법을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교즉무돈점(敎卽無頓漸)이건만
미오유지질(迷悟有遲疾)이니라.
약학돈교법(若學頓敎法)이면
우인불가미(愚人不可迷)이니라.
(가르침에는 돈과 점이 없으나
미혹함과 깨달음에 더디고 빠름이 있나니
만약 돈교의 법을 배우면
어리석은 사람도 미혹하지 않느니라.)

깨달음의 자리, 깨닫는 데에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문이란 없습니다. 깨달음 당체에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는 선후가 있습니다. 숙세에 많이 닦은 사람은 바로 깨닫습니다, 언하(言下)에 바로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업장이 두터운 사람은 어떻습니까. 애를 써도 금방 되지 않습니다. 금생에 안 되고 몇 생을 공부해야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 그 자체, 거기에는 빠르고 더딘 것이 없습니다. 순간에 대오했건, 천생만생 선근을 닦아 깨달았건, 깨달음의 당체는 한결같이 똑 같습니다.

그러면 깨달음의 그 자리는 어떤 것일까요.

신령하기 한량 없고 밝고 밝은 자리. 이 자리는 밝음과 어둠을 초월한 밝음이요, 그러한 당체이기 때문에 천지와 삼라만상이 이 신령스런 근원에서 다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무한한 지혜 자리를 등지고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량없는 세월 동안 부처님 처소에 무한한 선근을 심지 않았던들 어찌 이 법의 끝자락인들 만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말 그대로 맹귀우목(盲龜遇木)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은 귀에 잘 들어오지요. 아주 ‘삭삭’ 들어 올 것입니다. 그러나 내 면목, 내마음을 깨닫는 도리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믿지도 않습니다. 선근이 없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춤을 추고 노래 부르는 곳엔 즐겨 갑니다. 정신없이 광대처럼 춤을 추는 것은 좋아하지만 법문을 듣기 위해 법당에 가는 것은 꺼려합니다. 왜 일까요. 선근이 없기 때문입니다. 법문도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이 있어야 바른 법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설즉수만반(說卽雖萬般)이나
합리환귀일(合離還歸一)이니라.
번뇌암택중(煩惱暗宅中)에
상수생혜일(上須生慧日)이니라.
(말하자면 비록 일만가지이나
모두 합하면 도로 하나로 돌아가나니
번뇌의 어두움속에서
항상 지혜의 해가 떠오르게 하라.)

말로 법을 설할 것 같으면 온갖 말을 다할 수 있습니다. 팔만사천법문. 얼마나 많은 법문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치로 볼 것 같으면 모두가 하나요, 한자리입니다.

(손바닥으로 법석을 내리지며)
이 소리가 들립니까?

이 소리를 듣는 그 자리를 바로 볼 것 같으면 모든 문제가 단박에 해결됩니다. 친소(親疎) 증애(憎愛), 선악(善惡), 시비(是非)에 마음이 얽혀 참된 이치를 보지 못할 뿐입니다.
범소유상(凡所有相)이요.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금강경에서 현상이란 환(幻)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다고 했습니다.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 다하면 흩어지는 꿈과 같은 것이 우리네 삶인데, 이것에 집착해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여러분의 마음은 각종 번뇌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찰나 사이에 백번도 더 바뀌는 뜬 구름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중생의 삶입니다.

번뇌암택중(煩惱暗宅中)에 상수생혜일(上須生慧日)이라. 이렇게 깜깜한 번뇌의 마음 가운데 항상 지혜를 발현 해야합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항상 지혜를 내서 현상의 선악 시비를 벗어난 청정한 마음을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참선법입니다.

여러분, 세월은 너무나 빠르고 허망합니다. 제가 1965년도에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는데 비구계를 주셨던 삼사칠증(三師七證) 스님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세상사는 이렇게 순식간입니다. 비단으로 몸을 감고 잘 먹여 보호하고 온갖 욕락 다 취해봐도 한 호흡지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이 우리 육신입니다. 그런데 허망한 이 몸뚱이를 내 것으로 믿고 정신없이 욕락 채우며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이요,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그러나 미혹한 중생도 한마음 돌리면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같습니다. 깨닫고 나면 또한 모든 것이 한 자리인 것입니다.

옛날 임제 스님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묻자 “여기 법문을 듣는 여러분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몸뚱이를 나로 보지 않고 말을 듣고 있는 그 자리를 바로 볼 것 같으면 여러분이 곧 부처라는 말씀입니다. 부처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런 번뇌 고통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성인이라고 해서 우리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불성(佛性)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부처입니다.

멱도불견도(覓道不見道)하고
도두환자오(到頭還自懊)니라.
약욕탐멱도(若欲貪覓道)인데
행정즉시도(行正卽是道)로다.
(도를 찾아도 도를 보지 못하나니
도리어 스스로 고뇌만 하는도다.
만약 애써 도를 찾고자 한다면
행동의 바름이 바로 도이니라.)

그냥 저냥 한세상 보내다 보면 세월은 금방입니다. 눈은 곧 침침해지고 무릎은 이내 아파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젊은 사람들도 힘이 없습니다. 청춘인 것 같지만 이내 가을이 오고 조금 있으면 조석으로 추워집니다. 머리에 희끗희끗 내린 서리를 보며 내가 어떻게 세월을 보냈는가 생각하면 후회 막급입니다. 내 면목 모르고 살아온 시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말 속에 살다보니 거짓말 안할 수 없고, 결혼해 살다보니 애욕에서 벗어날 수 없고, 목숨 유지하려니 다른 생명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죄입니다. 평생을 캄캄한 어둠속에서 지내다 머리에 서리이고 나이 먹어 이렇게 법회에 참석해 법문을 들으니, 그 마음이 어떻습니까! 이제 와서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며, 후회한들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견성하는 자리를 알고자 할진데 행정(行正)이 즉시도(卽是道)니라. 바른 것을 행하는 것이 바로 도니라. 그러면 바른 것이 무엇이냐. 남의 선악시비를 보지 않는 것이 바로 도입니다. 미움과 사랑도 끊어야 합니다. 햇볕이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더러운 것이나 깨끗한 것이나 가리지 않고 비추듯이 우리의 참된 마음 자리도 이와 같습니다. 증애(憎愛)나 취사(取捨)나 호오(好惡)와 같은 분별하는 마음 없이 모든 것을 평등하게, 둘이 아닌 몸으로 볼 때 그것이 바른 마음입니다. 그것이 또한 도입니다.

여러분이 바른 마음에 처할 것 같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보고 듣는 그 자리가 본래 면목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그 자리는 온갖 욕심이 끊어진 자리로 중생에 대한 한량없는 자비가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대자대비입니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을 내 몸과 같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약무정심(自若無正心)하면
암행불견도(暗行不見道)니라.
약진수도인(若眞修道人)인데
불견세간우(不見世間憂)니라.
(스스로에게 바른 마음 없으면
어둠 속 길이라 도를 보지 못하리라.
만약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어리석음 보지 않느니라.)

스스로 닦는 각고의 노력이 없다면 암행불견도(暗行不見道)입니다. 어둔 길을 가는 것과 같아 진면목을 체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견도(不見道)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 옛 일을 한번 회상해 보십시오. 지난날의 고통들이 하나 둘 떠오를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받고 업신여김 당하고 일이 잘못돼 좌절하기를 얼마입니까. 세상에 나오는 것도 고통이고 죽는 것도 고통이고, 병든 것도 고통입니다. 다치면 어떻게 됩니까. 몸뚱이가 온통 고통의 덩어리임을 사무치게 깨닫습니다.

이런데도 우리는 도 닦을 생각을 못합니다.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인지 전혀 모른 채 얼마나 캄캄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까. 이 몸 또한 내 것이 아니어서 죽으면 사대로 흩어집니다. 모든 것이 인연따라 와서 인연따라 흩어질 뿐입니다. 밤길을 가는 것처럼 우리는 영원한 행복의 길이 있음에도 이를 모르고 진리에서 빗겨나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도를 닦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견세간우(不見世間憂)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심이 타인에 대한 증애심을 일으키고 허물을 찾게 합니다. 그러나 만약 남의 허물을 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분별심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세상의 허물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허물을 보다 보면 진심(嗔心)이 일어납니다. 진심이 일게 되면 결국 육체가 병들어 무너지고, 마음 또한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됩니다.

옛 조사님들은 그래서 남의 허물 보지 말고 다만 나의 허물을 잘 살필 것이며, 산란한 마음을 화두로 돌이켜서 ‘이뭣고’, 즉 ‘이것이 무엇인가’를 참구하라고 일렀습니다. 이것이 몰록 깨닫는 길입니다. 이것이 돈점법입니다.

누구에게 많은 돈을 받으면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세상 인심입니다. 그러나 돈점법은 돈과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인연 다하면 모두 사라집니다. 그러나 돈점법은 받아 가지면 그것으로 영원입니다.

금생에 닦지 않고
헛되이 보내면
내생에 고통 다시 시작돼

합천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시골 노인들이 부처님의 보물 중에 보물이라는 소리를 듣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대장경을 친견하고 난 소감이 재미있습니다. 특히 할머니들은 ‘대장경이 꼭 빨래판 같다’ 이렇게 말 합니다. 사람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평가는 달라집니다. 서예를 하거나 서각을 하는 이들이 봤다면 글씨로 평가 했을 것입니다.
좋은 법문도 사람에 따라 이해하는 정도가 다릅니다. 좋은 법문도 알아듣지 못하고 믿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지혜가 있고 선근이 있는 사람이 해탈의 문을 바로 찾아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늙어갈수록 열심히 수행해, 내 면목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임종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했는데 자식을 아무리 잘 키운들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깨달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번뇌가 사라집니다. ‘이 뭣고’ 한번 잘하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을 갖게 됩니다.

물론 수행이 쉽게 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생각하고 탁한 음식 먹으면서 공부한다고 해봐야 되질 않습니다. 이럴 때는 먼저 올바른 신행생활이 선행돼야 합니다. 제가 기운을 좀 볼 줄 아는데, 어떤 탁한 이들이 모여 있어도 천수경을 독경하고 나면 법당에 깨끗한 기운이 가득 찹니다. 탁한 기운이 싹 사라져 버립니다. 왜 일까요? 다리니는 바로 불보살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경을 하게 되면 청정한 마음의 자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좌선을 하면 두개의 날개를 단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야 공부가 잘 됩니다. 절에 와서 기도도 하고 참선을 하면 죄업이 녹으면서 참 행복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생에 와서 닦지 않으면 다음 생에도 고통 받는 삶은 계속됩니다. 이 법을 만났을 때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내 일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일입니다.

자. 정신을 바짝 차려서 이 법 만났을 때 열심히 수행 합시다. 여러분이 으뜸가는 수행인이 될 것 같으면 그 공덕으로 가정이 평안하고 사회가 평안하고 세상이 조용할 것입니다. 도만 가지고 있으면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신령스럽고 밝은 중생의 근본 자리요. 천지의 근원자리요. 본래 면목자리로 둘이 아닌 자리.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한량없는 이 세계도 모두 그곳에서 생겨납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러나 믿으십시오. 이것은 진리이고, 또한 거짓 없는 진실입니다.

今生若不從斯語 (금생약부종사어)하면
後生當然恨萬端 (후생당연한만단)하리라.

금생에 이 말을 믿지 않고 세상을 헛되이 보내면 그 한은 말로 할 수 없으리로다.
 
정리=김형규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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