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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에 출·재가 따로 없으니 대분심 내라”

기자명 법보신문

[7인 선사 초청 대법회]선원대표자회의 의장 영 진 스님

기도 하든 수행 하든 될 때 까지 해야
간절 ‘절’자 하나면 공부 절로 이뤄져
 

안수정등(岸樹井藤)의 비유를 압니까?

어느 나그네가 벌판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사나운 코끼리가 자기를 따라오니, 황급히 우물가로 뛰어 들어갑니다. 마침 칡넝쿨이 있어 잡았는데 내려다 보니 밑에는 독사가 우글거리고 있어요. 칡넝쿨 하나에 생사가 걸렸는데 그 순간, 흰쥐와 검은 쥐가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절대 절명의 위기 순간에 이마에 뭔가 떨어지는 걸 보니, 꿀물이에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꿀물을 받아먹는 찰나에, 위에는 코끼리, 아래는 독사, 흰쥐와 검은 쥐가 생명줄로 삼고 있는 칡넝쿨을 갈아 먹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세월이 무수하게 흐르는데 영원히 살 것처럼 잠시 느끼는 행복, 만족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그런 고통을 잊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셔서 제 일성이 무엇입니까?.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천상천하에 오직 나 홀로 높다.’ 이것은 본래 내가 부처라는 것입니다.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는 것이에요. ‘삼계개고 아당안지’, “우리가 사는 욕계, 색계, 무색계, 모든 세상이 다 고통이다. 아당안지, 내가 마땅히 다 편안케 하리라.” 부처님이 태어나서 하신 말씀인데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본래 부처인데 부처인 것을 보지 못하니 내가 부처임을 보게 하리라, 이런 의미입니다.

남악 회양선사의 제자가 마조 도일 선사인데 이 스님에 의해서 선불교가 활짝 꽃을 피우게 됩니다. 남악 회양선사가 어느 날 형산에 살고 있는데, 아래 마을에 젊은 사람이 밤낮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곳을 찾아갑니다. 찾아가보니 정말 누가 오거나 말거나 ‘턱’ 앉아서 젊은 수좌가 정진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남악 선사가 벽돌로 공부하고 있는 젊은 사람 앞에서 ‘빡빡’ 밀어요. 그러니 공부하는데 자꾸 걸린단 말이죠. 그래서 “스님 거기서 뭐하쇼.”, 그랬더니 “응 나 이거 갈아가지고 거울 만들려고 그래.”, 하하 웃으면서 “벽돌 갈아서 거울이 됩니까.”, 그랬더니 “이놈아 앉아 있다고 부처가 되느냐.”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가부좌를 풀면서, 스님에게 물어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랬더니 남악 선사가 “수레가 가지 않을 때 말을 때려야 하느냐, 수레를 때려야하느냐?”고 합니다. 이 말에 깨친 분이 마조 도일 선사입니다.

제가 왜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제가 아무리 말을 하더라도 여러분의 근기가 무르익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정치권에서 줄탁동시라는 말을 자주 쓰죠. ‘줄’은 달걀, 어미 닭이 계란을 20일간 품잖아요. 그러다가 나올 때면 안에서 새끼가 툭툭치는 소리가 있어요. 근데 그 소리가 미약해서 못 들어요. 탁은 어미가 20일간 품다가 정확한 그 시간을 알아서 정확하게 탁 쪼아 주는 것이에요. 그것이 줄탁동시입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이나 남악 회양 선사, 마조 도일 선사 같은 분들은 그것이 이뤄진 분들이에요. 정확하게 스승과 제자가 일치가 됐기 때문에, ‘탁’ 제시해주면 그냥 ‘팍’ 깨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도인이 아니고, 여러분들도 아직은 좀 덜 닦았으니 이런 말을 해도 밋밋하죠. 그러니까 그 분이 하신 언행을 보고 참구해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간화선입니다.

순식간에 내가 여래임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참선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참선의 요체 중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첫 째는 대신근(大信根)이라고 해서 큰 믿음, 큰 신심입니다. 그럼 어떻게 믿어야 하느냐.

첫째는 내가 부처임을 확고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 다음 선지식에 대한 믿음입니다. 공부하는데 선지식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옛날 어느 수좌가 조주 스님에게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조주 스님에게 묻는 스님이 모르고 물었을 리는 없겠죠?,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벌써 한 단계 올라섰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조주 스님이 부처님 말씀을 모르겠어요?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고, 여래의 덕성을 다 갖추고 있다고 했는데.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있다”고 하면 더 이상의 진전할 수 없으니 “없다”고 했지요. 여러분 이것은 전제입니다.

“왜 부처님이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고 했는데, 스님은 없다고 하십니까?” 이렇게 재차 물었더니, “성품에 업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 것이 전제에요. 근데 그렇게 다 보면 안 되고 전제 속에서 단제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무’입니다. 간단명료하죠. 그런데 ‘무’를 찾는 순간, 내 마음속에 닳고 달아서 숙지가 돼 있어야지, 아무것도 모르고서 ‘무’, ‘무’만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육조 스님은 어떻게 스승을 찾아갔습니까? 그 분은 원래 땔나무꾼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육조 스님이 식당에서 나오는데 가슴에 와 닿는 글귀를 누가 독경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선비에게 “그런 말씀 들으려면 어디가야 들을 수 있습니까?”했더니 “저 황매산에 가면 오조 홍인 선사가 계시니, 그 곳에 가면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무를 열심히 해서 돈을 모아 어머니에게 드리고 출가를 합니다.

그러나 광동성에서부터 황매산까지는 엄청난 거리에요. 우리나라 남북 가로지르는 것보다 더 멀어요. 무슨 교통이 있습니까. 휴대폰이 있습니까. 또 그 스님이 계신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출발하는 그 마음이 어디 적당한 신심 갖고 되겠습니까? 정말 그 스님한테 가면 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간절한 믿음을 갖고, 그 험한 길을 가는 겁니다. 한걸음도 신심이요, 두 걸음도 신심이었습니다.

그 신심으로 가서 눈물 나게 몇 달을 걸어갔는데 마침 오조 홍인 스님이 계신 겁니다. 그 간절한 마음으로 넓은 땅을 걸어 와서 기쁜 마음으로“스님 출가하러 왔습니다.” 했습니다. 홍인 스님이 그의 그릇을 알아보아야 하겠기에 묻습니다.

“너는 어디 사는 누구냐””,
“네 저는 영남 사는 무지렁이 백성입니다.”
“남방 무지렁이가 어찌 수승한 법을 배운다 하느냐.”
“사람에게는 남과 북이 있을지언정, 어찌 진리에 남과 북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오조 스님이 ‘큰 그릇’임을 알아차립니다. 혹여나 다른 700여 대중으로부터 질투에 의해 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저놈이 입은 살아 있구나, 너는 가서 방아나 찧어라.”

홍인 스님은 혜능 스님의 출가를 허락하면서도 스스로 자만하지 않게, 해를 입지 않게 방아를 찧게 한 것입니다. 혜능 스님이 방아를 여덟 동안 찧는데 그냥 방아만 찧는 것은 아니라 찧으면서 수행을 합니다. 그 뒤 여덟 달 만에 대 사건이 벌어집니다.

오조 홍인 스님이 법을 전해줄 제자를 찾으려고, “누가 나에게 와서 한번 일러 받쳐봐라”합니다. 그 밑에 신수 스님이라는 분은 오조 홍인 스님의 수제자로 700명의 교수사였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수 스님이 오조 스님의 법을 받으면 ‘이분에게서 법을 배우면 되겠구나’ 생각하고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아요. 그러니 신수 스님에게 이것이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내 공부를 바치면 혹시 내 스승께서 육조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 할 수도 있고, 하지만 바치지 않으면 내 공부가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니 어쩐다?’ 고민에 휩싸인 끝에 신수 스님은 아무도 보지 않는 때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바탕이요, 시시때때로 먼지를 털고 닦아서 때가 끼지 않게 하라’라는 글을 벽에다 씁니다.

그러니까 홍인 스님이 이걸 보고 신수 스님을 불러 묻습니다.

“네가 썼느냐?”
“네. 제가 썼습니다. 저에게 조그만 견처라도 있습니까?”
“너의 이 게송은 문 밖에 까지는 도달했으나 문 안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3일을 줄 테니 다시 해 와라.”

이 소문이 디딜방아에서 공부하던 노 행자(육조 스님의 속가 성 씨가 노 씨)의 귀에도 들어간 겁니다. 그래서 자기도 게송을 씁니다.

신수 스님이 ‘신시보리수 심여명경대(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바탕일세)’라고 했는데 이것을 ‘팍’ 뒤집어가지고 보리보문수 명경역비대(菩提本無樹 明鏡亦非坮 깨달음에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도 본래 틀이 없다.) ‘시시근불식 물사야진애(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 때때로 털고 부지런히 닦아서 때가 끼지 않게 하라)’는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본래 한 물건도 없었는데 어느 곳에 끼일 티끌은 있겠는가)’라고 씁니다.

아! 이 게송이 나오니까 발칵 뒤집어 진 것이에요. 남방 무지렁이 방아 찧는 줄만 알았는데!, 막 그러는데 얼른 홍인 스님이 나와 가지고 얼른 신발로 글씨를 지워버리고는 “이건 어림도 없다”합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하며 흩어졌습니다.

그런 뒤 오조 스님이 턱 방앗간에 나타나신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노 행자는 열심히 방아를 돌리고 있는데, 지나가는 소리로 “쌀이 잘 익느냐, 익었느냐”, 그러니 “쌀이 익은지는 오래나 키지는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미 공부는 다 됐으나 스님한테 인가 못 받았습니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오조 스님이 주장자로 바닥을 세 번 치고 나갑니다. 저녁 삼경에 오라는 뜻입니다.

혜능 스님은 삼경에 홍인 스님의 주석처로 찾아 갑니다. 홍인 스님은 가사로 불빛을 가리고 혜능 스님에게 금강경을 설합니다. 혜능 스님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起心), 반드시 머무는 곳이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이라는 대목에서 완전히 깨닫게 됩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그래서 행자가 부처님 때부터 내려오는 가사와 바루를 받았습니다. 그분이 바로 육조 혜능 선사입니다. 놀라운 것은 행자가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법은 출가도 재가도 구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도 육조혜능 스님과 같은 자세로 이 자리에 오셨냐 이 말이에요. 안된다하지 말고 그런 신심을 갖추는 게 첫째입니다. 이것이 대신근입니다.

우리나라에 회자되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인디언이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 반드시 비가 온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비 올 때까지 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은 기도 될 때까지 해봤어요? 나는 이 말로 돌리고 싶은 거예요. 될 때까지 해봤냐고.

선방은 선불장(選佛場)이라고 합니다. 부처 뽑는 과거장입니다.

마조 스님 제자 중에 천연 선사가 있어요. 이 분이 선비 때 개나리 봇짐을 메고 과거보러 가는데 어느 고갯길에서 한 남루한 스님을 만났어요.

“시주는 어디가세요?”
“과거보러갑니다.”
“과거봐서 뭐하게요?”,
“관리가 돼서 백성을 다스리려고 합니다.”
“과거 봐서 관리되는 것과 부처 되는 것하고 어떤 것이 낫겠습니까?”
“엇 부처 뽑는 대회가 있습니까?”

그래서 출가한 분이 단화 천연 선사입니다. 과거 안보고, 부처 뽑히려고, 그래서 결국 뽑힌 분이에요. 그러니까 선방 수행처는 부처 뽑는 과거장이에요. 여러분!, 참선을 고시 공부하듯이 해봤습니까? 어렵다고 안 된다고 하지만 말고, 해보고 말을 해야지요. 이것이 대신근입니다.

둘째는 대의단입니다. 의정은 화두의 생명입니다. 의정이 일어나지 않고 어떻게 화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불법의 바른 뜻이 뭐냐’고 했더니 ‘마른 똥막대기’라고 했습니다.
사량분별을 꽉 끊어버리라는 것이지요. 모든 번뇌와 습기를 일거에 물리치는 이 무기. 이것이 화두입니다..
화두를 생각으로 헤아려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법거량 할 때 엉뚱한 말이 나오는 겁니다. ‘아 그런 의미겠지, 그러겠지’하면 사구가 되는 겁니다. 사구를 참구하면 백년을 해도 안 됩니다. 활구를 참구해야 공부에 진전이 있으니 화두를 헤아리려고 하지 마세요.

의단이란 의심덩어리에요. 처음에는 의심으로 시작하지만 다음에는 의심뭉치, 의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의단으로 끝나지 않고, 의단이 막힐 대로 막히고 막혀서 나중에는 ‘펑’ 뚫리는 것이지요. 헤아려서 푸는 것이 아니고 막힐 대로 막히게 만들어 가는 것이에요.

막히고, 막히고, 막힐 때까지. ‘이뭐꼬’ 같으면, ‘이~’ 여기에 모든 것을 싣는 것입니다. ‘이~’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이뭐꼬’를 참구해 들어가는 것, 이게 화두참구입니다. 그러니 헤아리면 안되요. 자꾸 헤아려서 ‘나는 무엇인가’해서 수학공식 풀듯이 풀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요. 이것이 대의단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대분심입니다. 대용맹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분한 마음이냐 하면, 피개장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피개장부’,할일을 다 마친 장부를 뜻합니다. 출격대장부라고도 표현합니다. 여기서 ‘장부’라는 것은 ‘본래부처’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다 출격대장부인데 그걸 모르고 있어 중생세계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이미 역대 제불조사가 전부 장부라면 난들 그런지 않겠는냐?. 나도 장부라 그 말입니다. 다만 하지 않을 뿐이지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제불조사가 한 것을 난 몰라서 못하는 것이니 분한 마음을 내고 통곡도 해야 합니다.

우리 부처님은 35세에 성도하셨어요. 또 육조스님은 출가한지 8달 만에 공부를 마쳤어요. 그리고 만공 스님의 법제자 중 가장 수제자가 보월 스님이었는데. 그 분은 공부를 시작한지 한 철 만에 끝마친 분이에요.

근데 내 나이가 몇이냐 이 말입니다. 여러분 나이가 몇입니까. 30세 때, 20세 때 다 끝마친 분들도 많아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사로서는 방 거사 같은 분도 있는 한국에는 부설거사도 있고 인도에는 유마거사도 있습니다. 방 거사는 물론 부인과 아들 딸 역시 방 거사 못지않은 선지식이었습니다. 남녀, 출·재가 구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매 법상 스님이라는 분이 계세요. 마조 스님의 제자로서 스승에게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는 말을 듣고 대매산에 들어가 30년 동안 나오지 않았던 분입니다. 마조 스님은 어느 제자에게 “대매에게 가서 예전에는 내가 즉심즉불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한다고 일러라”했습니다. 그 제자는 대매산에서 토굴 지어놓고 수행하고 있는 대매 스님을 찾아가 이릅니다.

“스님, 요즘 스승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예전에는 즉심즉불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비심비불이라고 합니다.”
“아 그 노인네가 이제 망령이 났군. 그 분이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즉심즉불이다.”

그 제자가 다시 돌아와서 그렇게 전하니 마조 스님은 흐뭇해하며 인가를 했다고 합니다. 즉심즉불이 뭐고 비심비불이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흔들림이 없게 된 것이지요.
여러분 세월을 탓하며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일을 자꾸 미루지 마세요.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릅니다.

정말 잠깐 사이에 죽음의 문턱으로 도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만난 이 생입니까? 이 억겁 다생으로 살아온 이생명이 언제 다시 인간 몸 만나고, 언제 다시 정법 만날 줄 모르는데 어떻게 허송세월을 보낼 수 있냐 말입니까.

오늘부터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한마음 돌이키면 부처이니까 이것처럼 쉬운 공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억겁다생으로 쌓아야 한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이 순간 한마음 탁 돌이켜 버리면 내가 부처라는데. 해 볼만 하잖아요. 이것이 대분심, 대용맹심입니다.

이 세 가지가 요점입니다. 이것을 다 아울러서 한마디 드리고 싶은 말씀은 공부에 가장 힘 있는 한 글자가 있다고 합니다. ‘간절 절’자입니다. 간절한 마음, 참선할 때 참선 공부보다 간절한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백날 천 날 해도 건성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주시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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