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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비구니 승가의 재건 〈끝〉

기자명 법보신문

천년만에 복원 비구니 승가
랑카의 새로운 희망 되다

<사진설명>비구니 스님들의 행렬. 겉모습으로 보아 비구니 스님이 비구와 다른 점은 긴 팔의 윗옷을 입고 있다는 점 뿐이다. 아직은 열악한 여건이지만 수행에 대한 이들의 열정만은 비구에 뒤지지 않는다.

‘여행자에게는 눈썹도 짐이 된다’는 말이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았던 물건이라도 막상 집을 나서고 나면 짐이 될 뿐이니 보따리를 최소한 가볍게 하라는 뜻이다. 이는 단순히 가방의 무게를 줄이라는 것이 아니라 여행에 앞서 갖게 되는 조급한 마음과 많은 것을 보고 얻겠다는 욕심을 줄이라는 속뜻을 것이다.

콜롬보 공항에 첫 발을 디딜 때 순례객의 가방 속에는 온갖 욕심들이 가득 차 있었다. 부처님의 생생한 가르침을 만나고 랑카 섬에 남아 있는 찬란한 불적들을 남김없이 섭렵하겠다는 오만한 욕심을 무거운 줄도 모르고 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행의 낮과 밤이 지나갈수록 이러한 욕심들은 무겁게 어깨를 짓눌러댔다. 순례객의 좁은 보폭과 짧은 안목으로 스리랑카 불교의 수천 년 역사, 그리고 그들의 깊은 신심을 간파 하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던가.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에서 그동안 보물처럼 끌어안고 다녔던 취재 수첩과 카메라에 담긴 사진들을 살펴보며 비로소 순례객은 참회의 눈으로 스리랑카의 땅을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무엇을 얻어 가겠다는 욕심보다는 비록 한 호흡이라도 그들과 함께 해보겠다는 겸허함이 이었던가. 수 천 년을 그 자리에 서 있었듯 앞으로도 무수한 세월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볼 사원과 탑들을 쫓기듯 카메라에 담기보다는 그것을 조성했을 굳은 신심의 과거인들을 만나고 미래인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잠시라도 가져 보았던가. 지난 순례의 여정을 돌아볼수록 아쉬움은 또다시 짐이돼 가방을 채운다.

기원전 3세기 상가미타 계맥 전수

<사진설명>담불라 지역에 위치한 비구니 학교.

기원전 3세기 마힌다 스님의 전법으로부터 시작되는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는 동안 순례객은 마냥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녔지만 유독 한 분야에서 만큼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접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스리랑카의 비구니 승가에 관한 부분이었다.

스리랑카의 비구니 승단은 최초의 불교 전래와 그 맥을 같이한다. 마힌다 스님으로부터 최초의 전법이 이뤄진 때 당시 스리랑카의 왕이었던 데바남피야 티샤(Devanampiya Tissa)왕의 처제이자 왕비였던 아눌라(Anula) 왕비는 비구니가 되기를 희망했다. 마힌다 스님은 왕비의 청을 받아들여 인도의 아쇼카 왕에게 비구니계 전법을 요청했고 마힌다 스님의 동생이자 아쇼카 왕의 딸인 비구니 상가미타 스님이 스리랑카로 건너와 비구니계맥을 전하고 비구니 승가를 세우게 됐다. 상가미타 스님은 스리랑카로 올 때 성도 보리수의 가지를 가져와 심었는데 그것이 지금 아누라다푸라에 남아 있는 스리마하보디(SriMahaBodhi)이다. 하지만 11세기 초 남인도 촐라(Chola) 왕조의 침입으로 스리랑카 최초의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는 폐허로 변했고 비구니 승가는 절멸되는 비극을 맞았다. 이후 비구니 승가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역사 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이러한 스리랑카에 비구니계맥이 재건된 것은 지난 1996년 12월이었다. 인도의 사라나트 사원에서 한국 등 비구니계맥이 전수되고 있는 나라의 비구니 스님들로부터 남방의 사미니들에게 구족계를 전해주는 수계식이 열렸고 이 때 스리랑카를 비롯해 비구니계맥이 끊겼던 남방의 여러 나라들이 구족계를 받아 비구니계맥을 잇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전해진 소식들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비구니계를 받고 돌아간 남방국가의 비구니 스님들이 자국에서 비구니 수행자로서 인정받지 못한 채 교단과 불자들로부터 배척당하거나 비난받는 등 온갖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리랑카의 사정은 달랐다. 일부 원로 비구들의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스리랑카의 비구니계맥은 교단의 환영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복원된 것이다.

1996년 대승권서 다시 이어

<사진설명>비구니 교수사 스님의 거처. 소박한 침상과 살림도구, 그리고 애완용으로 보이는 고양이가 손님을 맞는다.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스님을 접하는 것은 의외로 평범한 일이었다. 사원은 물론이며 유적지, 시장, 주택가 등 어느 곳에서나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은 쉽게 눈에 띄었다. 그들의 가사는 비구와 다를 바 없이 황색이었고 그들을 대하는 재가자들의 모습 또한 비구를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비구니 승가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담불라 인근에 위치한 비구니 학교(Bhikshuni Educational Faculty)다. 마을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숲속에 위치하고 있는 이 비구니 학교에는 이층 규모의 기숙사 겸 교실과 사원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꽤나 외진 곳에 있어 일반인들의 방문이 쉽지 않을 듯한 이곳엔 25명의 사미니가 비구니계를 받기에 앞서 3달 과정으로 교육을 받고 있다. 교육은 주로 경전 이해와 암기, 계율 습득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교육과 숙식을 모두 이곳에서 해결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소요되는 예산은 인근 담불라 지역의 씨암종 계열 사원인 골든 템플에서 지원하고 있다. 비구니 스님들은 비구와 마찬가지로 탁발이 가능하고 사원으로 보시가 들어오기도 하지만 학교를 운영하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구니 스님들의 직위 또한 비구와는 여전히 다른 위치에 머무르고 있다. 비구니 스님들은 혼자 사원 밖으로 외출하는 일이 드물며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는 경우도 드물다. 학교도 부족해 비구들과는 달리 동진 출가하는 사미니에 대한 별도의 교육 시설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해 4개의 비구니 양성 학교가 세워졌지만 아직은 교육활동이 미비한 수준이다. 사원에서도 비구니 스님들에게는 수행보다는 경전 공부나 여성 신도들에 대한 상담활동, 봉사, 운력 등이 우선시 된다.

<사진설명>비구니 학교 학인스님들의 숙소.

현재 스리랑카에는 420여 개의 비구니 사원에 600여 명의 비구니와 1900여 명의 사미니가 수행하고 있다. 1996년 10명의 비구니가 탄생된 이후 10여년 만에 이룩한 참으로 괄목할만한 성장이다. 이들은 출가 수행자로서의 사회적 위상을 인정받고 있지만 비구니 승가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며 1000여 년간 단절됐던 역할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차분히 준비하는 모습이다. 특히 비구니 승가는 의료 체계가 열악해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지역민들의 응급처치와 보건관리, 의약품 공급 등의 중요한 창구가 되고 있다. 또 많은 여성 재가자들이 비구니 스님을 통해 고민을 해결하고 고단한 삶을 위안 받고 있어 비구니 스님들은 스리랑카 사람들의 새로운 의지처가 되고 있다.

비구니·사미니 2500명 수행

<사진설명>아쇼카왕의 딸이자 마힌다 스님의 여동생인 비구니 상가미타 스님은 스리랑카에 비구니 계맥과 성도 보리수의 가지를 전했다.그림은 콜롬보의 마하라자켈라니야 사원에 남아 있는 상가미타 스님의 벽화.

스리랑카 불교에는 늘 ‘상좌부 불교의 중심’ ‘정통 초기불교’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단절된 비구니 계맥을 재건할 수 있느냐, 대승불교권의 계맥을 이어오는 것이 옳은 결정이냐에 관한 논쟁의 문제는 학자들, 또는 승가 내부의 몫이기에 논외로 하고자 한다. 다만 스리랑카 불교계가 비구니 계맥을 복원시키고 그 부흥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분명 시대의 변화와 대중의 요구에 따라 합리적인 결정과 수용을 함으로써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생명력의 표현임에 틀림없다. 스리랑카 불교계에 부여되는 ‘정통’과 ‘중심’이라는 위상은 결코 과거의 유산을 묵수하며 답습하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불교의 역할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그 속에서 정법을 수호하려는 노력의 성과다.

‘법등’의 불빛은 마힌다 스님의 전법 이래 꺼지지 않고 이어져 왔지만 스리랑카 사람들은 어제의 불빛과 모양을 오늘에 고집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전에만 의지하던 경전을 기록으로 남겼고 상좌부와 대승의 경쟁을 통해 불교의 발전을 도모했다. 법맥이 단절될 위기 앞에서는 과거를 고집하기에 앞서 합리적인 방법으로 법맥을 재건하는데 힘을 모았다. 또한 남방불교 최초로 비구니 승단을 탄생 시켰듯이 단절된 계맥을 재건하는데 있어서도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합리적인 결정을 보였다.

순례를 마무리하며 비구니 승가에 대한 짧지만 희망적인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어 짐을 맨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진다. 하지만 마치 동전의 앞면만 보듯 이번 순례는 처음부터 스리랑카 불교에 대한 호감과 경외로 시작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했기에 스리랑카 불교계가 안고 있는 이면의 고민과 한계를 찾아내기에는 한없이 부족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순례의 기록이 작은 주춧돌이 되어 스리랑카 불교에 대한 정서적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히고 상식의 폭을 한 뺨이라도 넓힐 수 있다면 이후 스리랑카를 찾는 많은 이들이 스리랑카 불교에 관한 보다 무게 있는 기록을 남겨 줄 것으로 기대한다.

한 밤중 거대한 기체는 숨 가쁘게 달음질을 치더니 랑카섬을 박차고 이륙한다. 비행장의 유도등 불빛이 사라지는 순간 인도양 전체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다. 인도양에 떨어진 ‘눈물방울 같은 섬’을 뒤로한채 ‘보석 같은 스리랑카’를 가슴에 담으며 순례를 마친다.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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