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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지견불생분 1

기자명 법보신문

일상생활 모든 것이 진리의 현현

<사진설명>경주 불국사의 자하루.

{冶父}捏聚放開 兵隨印轉

모으면 덩어리요 놓으면 벌어짐이여! 병사들은 도장 따라 움직이도다.

〈보충설명〉 부처님께서 세계를 부수어 가루를 냈다가 다시 한 덩어리로 뭉치면서 실상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三身)도 이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경계에서 보면 다 하나이면서 다르기도 합니다. 또, 여기서는 이렇게 쓰고 저기서는 저렇게 쓰는 등 자유자재합니다. 이는 마치 전쟁터의 병사들이 장군의 도장 찍은 결정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渾成兩片 擘破却團圓 細嚼莫咬破 方知滋味全

한 덩어리가 두 조각 되고, 부수면 도리어 뭉쳐지네. 자세히 맛보며 씹어서 깨뜨리지 않아야 바야흐로 온전한 맛을 알리라.

〈보충설명〉 세계와 티끌, 법신과 화신은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은 것이 진리이므로 거기에 집착하거나 얽매일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로 회통되는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우리가 사탕을 먹을 때 급히 깨먹는 것 보다 천천히 음미하며 빨아먹을 때 그 맛을 더 잘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처님 말씀도 고요히 앉아서 읽고 또 읽고 반조(返照)하고 또 반조하면서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의 주요 가르침은, 부처님께서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라는 사상(四相)이 실로 있다고 지견(知見) 내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중생들은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고 그에 집착하므로 ‘나’와 상대되는 개념인 ‘대상(對象)’ 또한 실제로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법신의 자리에서 봤을 때 ‘나’와 ‘대상’ 등의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의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중생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단지 사상(四相)을 빌려 설명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학인들은 그런 허망한 것들이 실로 있다는 지견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須菩提 若人 言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須菩提 於意云何 是人解我所說義不 世尊 是人不解如來所說義 何以故 世尊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이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을 설했다’고 말한다면,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 사람이 내가 설한 바 뜻을 잘 알고 있는 것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한 바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을 말씀하신 까닭은, 곧 진리의 차원에서는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랄 것조차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을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라고 붙였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六祖}如來說此經 令一切衆生 自悟般若智 自修證菩提果 凡夫之人 不解佛意 便爲如來 說我人等見 不知如來 說甚深無相無爲般若波羅蜜法 如來所說我人等見 不同凡夫 我人等見 如來說一切衆生 皆有佛性 是眞我見 說一切衆生 無漏智性 本自具足 是人見 說一切衆生 本無煩惱 是衆生見 說一切衆生性 本自不生不滅 是壽者見也

여래께서는 이 경을 설하여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깨닫게 하고 스스로 보리의 과(果)를 증득케 하셨건만 범부들은 부처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여래가 아견·인견 등을 설했다고 생각하므로 여래가 매우 깊은 무상(無相) 무위(無爲)의 반야바라밀법을 설하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여래가 설한 바 아상 ·인상 등은 범부의 아견·인견 등과 같지 않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 일체의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갖춰져 있음을 아는 것이 곧 진실된 아견이요, 일체의 중생에게 새지 않는 지혜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구족되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진실된 인견이요, 일체의 중생에게 본래 번뇌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곧 진실된 중생견이요, 일체 중생이 본래 스스로 생(生)하지도 멸(滅)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진실한 수자견이다.

須菩提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說卽非法相 是名法相

“수보리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일체의 모든 법에 대해 응당 이와 같이 알며(知)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고 실천해서(解) 법상(法相)을 내지 않는 것이니라. 수보리여! 법상이라는 말도, 여래가 설한 바와 같이 진리의 입장에서는 법상이랄 것조차도 없기 때문에, 이름 붙여 법상이라고 할 뿐인 것이니라.”

{六祖}發菩提心者 應見一切衆生 皆有佛性 應知一切衆生 無漏種智 本自具足 應信一切衆生 自性 本無生滅 雖行一切智慧方便 接物利生 不作能所之心 口說無相法 而心有能所 卽非法相 口說無相法 心行無相行 而心無能所 是名法相也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마땅히 일체 중생이 불성을 지녔음을 보며, 마땅히 일체 중생이 새지 않는 지혜를 본래 스스로 구족하였음을 알며, 일체 중생의 자성(自性)이 본래 생멸이 없음을 마땅히 믿으므로, 비록 일체의 지혜 방편을 행하여 사물에 접해 중생을 이롭게 하더라도 능소(能所)의 마음을 짓지 않는다. 입으로는 모습이 없다(無相)는 진리(法)를 설하지만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곧 진리의 모습이 아니요(非法相), 입으로 모습 없는 진리를 설하면서 마음으로도 모습 없는 행을 행하여(無相行) 마음에 능소가 없어야 진리의 모습(法相)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冶父}飯來開口 睡來合眼

밥이 오면 입을 벌리고, 잠이 오면 눈을 감노라.

〈보충설명〉 진리가 한 모습인 것을 참되게 알면, 일상생활 모든 것이 진리의 현현(顯現)입니다. ‘이와 같이(如是)’ 행하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법신의 표현일 것이니, 법에 대해 집착을 내니 안 내니 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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