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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일제시대 승려들은 일본에 가서 무엇을 보았을까

기자명 법보신문

일본 선진문물 접하며 상당수 친일로 전향

1917년 총독부에 의해 일본불교 시찰단 첫 파견
근대문명 선전하며 독립 의지 꺾고 친일파 양성

<사진설명>불교사찰단이 동경에서 동경불교호국단과 불교연합회가 증상사에서 주최한 한영회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일제시대 불교계는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서 일본으로 여러 차례 시찰단을 파견하였다. 시찰단에 참여였던 승려들은 주로 30본사 주지들과 불교학자, 언론사의 기자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에 가서 무엇을 보았으며, 어떤 행동을 하였으며, 무엇을 느꼈을까. 조선총독부는 왜 승려들의 일본 방문을 지원하였을까. 이것은 불교계 일본 시찰단의 파견 목적과 직결되어있다. 총독부가 불교계의 인사들을 일본 시찰단으로 파견하는데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이들로 하여금 일본의 발전상을 눈으로 확인하게 하여 친일파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사회 각층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일본의 발달된 선진문화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총독부의 시책에 협조하게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시찰단으로 파견되었던 불교계 인사들이 쓴 글을 보면 본래 목적을 달성한 듯하다. 더구나 1917년은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고나서 상당한 자신감에 차있던 시기였다.

시찰단으로 일본을 다녀 온 승려들은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서 갔기 때문에 귀국 후에 보고회 형식의 모임에 나가서 보고, 느낀 점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해야 하였다. 불교계의 일본 시찰단 파견은 1909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능화가 1917년에 불교시찰단을 일본으로 전송하면서 쓴 글에 의하면 1907년에 구한국정부로부터 30명이 선발되어 일본 시찰을 다녀 온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시찰단은 불교계에서 파견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1909년에 홍월초·김동선·이만우 등 60명이 일본 시찰을 다녀 온 적이 있다. 1920년대에도 불교시찰단의 파견이 있었다.

불교계에서 시찰단을 파견한 까닭은 일본의 발달된 불교문화와 시설 그리고 포교방식을 배워서 불교계를 혁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1913년부터 논의되어왔으나 예산 사정 때문에 미루어지다가 1917년에 시행을 보게 되었다. 시찰단의 파견은 총독부의 정책과 불교계 내부의 요구가 일치하여 이루어진 셈이다. 1917년에 불교계에서 시찰단으로 파견되었던 불교계 인사들 9명과 총독부 직원 1명 모두 10명이었다. 30본산연합사무소위원장 김구하, 해인사 주지 이회광, 용주사 주지 강대련, 봉은사 주지 나청호, 위봉사 주지 곽법경, 범어사 주지 후보 김용곡 등은 본사 주지들이었고, 전등사의 수반말사 화장사 주지였던 이지영은 전등사 주지 국창환의 대리로 참석하였다. 봉은사의 수반말사였던 신륵사 주지 김상숙은 30본산연합사무소의 재무와 통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권상로는 조선불교총보의 기자로서 시찰단에 동행하면서 이들의 행적을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써서 보냈다. 총독 하세가와(長谷川好道)는 시찰단에 300원을 경비 보조 명목으로 주었고, 총독부의 촉탁이었던 가토 간가쿠(加藤灌覺)를 안내자로 수행하도록 배려하였다. 시찰단은 8월 31일부터 9월 24일까지 25일 일정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이들이 떠나던 날 남대문 역(지금의 서울역)에는 많은 환송객이 전송을 나왔다. 이완용과 이윤용, 총독부 촉탁으로 중앙학림의 고문이었던 오다 쇼고(小田省吾), 매일신보사장 아베 미쯔이에(阿部充家), 일본 묘심사 출장소 포교사 고토 즈이강(後藤瑞巖), 중앙학림 강사 박한영, 범어사 포교당 포교사 한용운과 중앙학림 학생들이 전송을 하러 나왔다.

불교시찰단은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하여 열차를 타고 동경으로 이동하여 9월 4일 테라우치(寺內正毅) 수상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테라우치에게 사찰령을 시행하여 준 덕택에 불교계가 융성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뜻을 전하고 선물로 준비한 은제 향로와 두 폭의 족자를 선물하였다. 테라우치는 이들을 환영하고 다과를 베풀면서 불교는 아무쪼록 종교의 범위 내에서 행동하여 어리석은 인민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정치인들로 하여금 힘을 덜게 하고 천황의 교화를 선양하라는 당부를 하였다. 본사 주지들은 사찰령이 불교계를 발전시켰다고 하면서 테라우치의 공로를 치하한데서 그들의 현실인식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현직 일본 수상은 불교계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고 신도들에게 식민통치에 순응하도록 교화하라고 당부하면서 식민지 통치자로서의 속내를 드러내었다.

시찰단은 9월 12일 마침 닛코(日光)에서 휴가를 지내고 오던 다이쇼(大正) 천황을 문부성의 안내로 기차역에서 만나게 된다. 이들은 황족과 귀족의 다음 자리에서 천황의 얼굴을 지척에서 보게 된다. 김구하는 이 때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천황이 고개를 돌리어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예를 표하는 것은 실로 막대한 천은(天恩)이었다. 불교계의 최고 책임자가 식민 통치의 원흉인 일본 천황을 만난 것을 하늘이 내린 은혜라고 표현하다니 당시 불교계의 의식 수준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9월 16일 시찰단은 천황의 무덤인 모모야마 고료(桃山御陵)와 전쟁 희생자들을 봉안한 야스쿠니 진자(靖國神社)를 방문하였다. 이 자리에서 30본산연합사무소위원장이었던 김구하는 천황이 직접 임명장을 전달하는 칙임관의 참배 자리에서 준비하였던 메이지 천황을 조문하는 제문을 낭독하였다. 총독부는 불교시찰단이 일본의 정신을 상징하는 이러한 장소를 방문하게 함으로써 불교계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조선인을 일본인화 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있었다. 조선인을 일본인화 한다는 것은 조선 사람들의 경제적인 면에서 생활 수준과 문화면에서 의식 수준을 일본인 정도로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부리기에 적당할 정도의 수준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른바 우민정책으로 불리는 이러한 정책은 조선인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고 실업교육과 직업교육만을 허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시찰단은 일본 불교계의 조동종의 총지사, 진종의 동본원사·서본원사, 임제종의 묘심사, 정토종의 증상사 등 본산을 방문하였는데 본산의 법주(法主)들은 이들을 몹시 환영하였다. 시찰단은 동본원사의 전법주(前法主)이면서 백작이었던 오오타니(大谷光瑩)의 사저(私邸)를 방문하였다. 오오타니는 시를 지어 이들을 환영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나라를 위하든지 세상을 위하든지 한 자기로 진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법을 위하여 진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비치는 저 해 밑에서 마음을 합하여서’라고 하였다. 이 싯귀 속에는 일본과 조선불교계가 합심하여 불교를 널리 전파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선에서 유난히 포교에 극성을 부리고 전쟁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진종 대곡파 본원사의 법주는 일본을 위해서 함께 충성하자는 의미를 전달하였다. 시찰단은 일본에서 문부성 장관, 본산의 대표 등 정계·경제계·문화계의 주요 인사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일본과 조선이 협력해야 한다는 의사를 전하였다.

9월 9일 시찰단 일행은 미츠코시(三越吳服店) 백화점을 방문하였다. 권상로는 지상 11층의 백화점 건물을 보고 마치 산을 옮겨다 놓은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난 소감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승강기로는 도솔천궁을 십분의 구나 갔다오고 비행선으로는 극락세계를 이분의 일이나 갔다 온 것 같습니다…이것을 보고 입이 벌어지고, 저것을 보고 입이 벌어지고 나중에는 입이 다물어질 새가 없어서 벌이고만 있게 됩니다.’ 이들은 윤전기를 다섯 대나 갖추고 신문이 자동으로 접혀서 나오는 국민신보사를 방문하였고 교토와 오오사카의 시가지도 둘러 보았다. 시찰단 일행 모두는 일본의 근대 문명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이 느꼈던 흥분을 상상을 해보라.

<사진설명>1917년 불교사찰단으로 일본을 방문했던 강대련, 김구하, 이희광 스님 (사진제공=민족사).

시찰단은 일본의 대학과 중·고등학교, 유치원, 자선사업기관 등을 돌아보았다. 교육기관에서는 신학문이 가르쳐지고 있었고, 자선단체에서는 여러 가지 구호사업이 행해지고 있었다. 권상로는 이들 기관의 규모와 학과의 종류, 도서관의 장서 수, 학생과 직원의 수 등을 자세히 기록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시설을 갖추고, 사업을 식민지 조선에서 시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25일간의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9월 23일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권상로는 귀국 후의 소감을 이렇게 나타내었다. 부산항을 떠날 때는 여기도 많이 발전되었다라고 생각하였는데 돌아와서 보니 떠날 때 느꼈던 부산항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장엄하게 꾸며진 일본의 유적지와 화려한 거리를 보고 돌아와서 조국의 현실을 살펴보니 사방에 보이는 것은 헐벗은 민둥산이요, 옹색한 초가집이었다. 그는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조국을 멸시하지 말자’, ‘고향을 무시하지 말자’라고 다짐하지만 그는 끝내 이 다짐을 지키지 못하고 총독부의 시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길을 택하였다.

불교시찰단은 총독부의 정책과 불교계 내부의 요구가 맞아 떨어져서 시행되었다. 총독부의 목적은 달성되었지만 불교계의 현실 개혁이라는 과제는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것은 길을 알고 있는 사람과 길을 찾고 있는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잘못된 길을 가르쳐 준다면 모르는 사람의 고충은 얼마나 크겠는가.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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