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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불교 순례의 선구자 현장

기자명 법보신문

18년 고난의 여정 이겨낸 唐代의 성인

<사진설명>구법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현장 스님을 묘사한 그림. 귀국 이후 현장 스님이 저술한 '대당서역기'는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국가들에 대해 밝힌 최초의 문헌으로 남아있다.

중국 출신의 현장 스님은 627년 당 왕조(618~ 906)의 수도였던 장안을 출발하여 거센 물결로 소용돌이치는 강들을 건너며 또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사막들을 횡단하며,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높은 산들을 오르고 내리면서 또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를 묵묵히 걸으면서 믿기 힘들만큼 대단한 여행을 이어나갔다. 그의 여행기는 당시 지리학적 정보나 고유의 관습 등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존재했던 미지의 작은 나라들에 대한 정보를 주는 최초의 기록문이자 가장 믿을만한 자료로서 여겨지고 있다.

동-서양 이은 최초의 인물

현장 스님은 때로는 여정의 대부분을 걸으며, 때로는 말을 타고 가며 실크로드를 따라 목적지인 인도로 향했다. 불교학자이기도 한 현장스님의 이 순례 여행은 627년부터 645년까지 이루어졌는데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사이에 문화적 교류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 받는다. 연속적으로 출간되었던 그의 여러 기행문들 중에서 ‘서양으로의 여행’ 혹은 ‘서양 세계에 대한 기록들’이라고 알려진 글은 7세기 고대 인도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잘 묘사한 글로써 널리 인정받고 있다.

현장 스님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불멸의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그의 여행은 세간의 인기 있는 이야기로써 아직까지 계속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역사가이자 탐험가였던 현장 스님의 업적은 무엇보다도 실크로드를 따라 세워진 여러 국가들에 대해 매혹적인 내용으로 정확한 정보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도 사실 현장 스님의 글에서 영향을 받아 유럽인으로써 가졌던 동양에 대한 환상과 상상에 현장 스님의 기행문을 덧붙여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마치 소설처럼 재구성된 ‘서양으로의 여행’에서 그려진 현장 스님의 모습과는 달리 스님은 매우 용기 있고 현명한 분이어서 지도에도 그려지지 않은 작은 나라들을 방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도전과 장애에도 대담히 맞서는 분이었다고 한다. 현장 스님은 또한 언어학에 있어서도 천부적인 재능을 갖추었으며 고도의 외교술을 구사하는 사람이어서 130여 개에 이르렀던 작은 왕국들을 여행하며 그 왕국들의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 언어 등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행 동안 스님은 거리에서는 행인들을, 사원에서는 학식 높은 스님들을, 왕궁에서는 왕들을 만나며 견문을 넓혀갔다.

꿈이 암시해준 구법의 시작

<사진설명>18년이란 긴 세월동안 구법여행을 멈추지 않았던 현장 스님의 초상.

현장 스님의 원래 이름은 ‘첸후이’였다. 그는 602년 해난 지방 첸헤 마을의 한 유교를 믿는 학식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이 되던 해 그는 그의 큰 형처럼 불교 승려가 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10살 나이의 첸후이는 뤄양 사원으로 가 5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를 모두 공부한 후 대승불교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 왕조가 막을 내린 후 첸후이는 당 왕조의 새 수도가 된 장안을 향해 출발해 그 곳을 거쳐 청두까지 갔다. 이제 15세가 된 그는 그 곳 공후이 사원에서 새로운 스님을 임명하는 임무를 맡았다. 주지 스님은 비록 어린 나이의 스님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닌 성숙함과 깊은 지식을 높이 평가해 그런 임무를 내렸던 것이었다. 그는 그 곳에서 ‘현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20세가 되던 해, 그는 불교가 탄생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문헌 속의 인도는 언제나 모순과 부정적인 글로만 묘사되고 있음을 발견하고 몸소 인도로 가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기 위해 그는 먼저 수도 장안에 머물면서 불교에 대해 더 심오한 학업을 쌓으며 동시에 필요한 외국어들을 공부했다. 626년 산스크리트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불교의 유가행파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어느 날 밤, 잠을 자고 있던 스님은 이제는 그가 길을 떠나야 한다는 내용을 암시하는 생생한 꿈을 꾸었고 드디어 그가 머물던 당 나라를 떠났다. 그는 고비 사막을 가로질러 하미로 갔고 그 곳에서 만났던 불교를 신봉하던 투르판의 왕으로부터 그의 여행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금전적 도움과 추천장을 얻을 수 있었다.

대승 불교 종파에 속한 사원들을 두루 둘러보며, 또 때로는 길에서 도적들을 만나 갈취를 당하기도 하며 그는 오늘 날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쉬켄트에 도착했다. 여기에서부터 그는 사막을 횡단하면서 서쪽의 사마르칸트로 갔다. 험하고 먼 여정을 마친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발크지역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무려 3000여명의 대승 불교 소속 스님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을 여행하던 현장 스님은 바미얀 지역으로 가 두 개의 거대한 불상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카불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는 약 100 여 채의 불교 사원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곳에서 그의 여정 중 처음으로 힌두교 인들과 자이나교 인들을 만났다. 잘랄라바드에서 출발한 그는 마침내 그의 최종 목적지인 인도에 도착하게 된다. 그 당시 푸루사푸라, 즉 ‘신의 도시’라고 불리던 오늘 날의 페샤와르도 그곳에서 멀지 않았다.

미지의 땅에서 ‘불교’를 만나다

<사진설명>현장 스님이 거쳐간 험남한 여정.

현장 스님은 여정을 멈추지 않고 다시 북동쪽에 위치한 우드야나의 스왓 계곡으로 가 18000명의 스님들이 거주하고 있던 고대 불교 사원을 방문했다. 다시 탁실라를 거쳐 카슈미르로 가서 100여 개 의 불교 사원들을 둘러본 그는 학식 높은 대승 불교 소속 스님과 함께 거주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634년 그는 펀잡 지대 동부 지역으로 거쳐 남쪽으로 향해 야무나 강가에 자리 잡은 마투라에 도착했다. 마투라는 비록 힌두교 인들에게 성스럽게 여겨지는 도시였지만 그곳에도 약 2000명의 스님들이 거주하고 계심을 발견하기도 했다.

지칠 줄 모르는 현장 스님은 갠지스 강을 건너 마침내 부처님의 땅에 도착하게 된다. 네팔 남부의 타라이 지역을 통과하여 최종 목적지인 룸비니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장소인 카필라바스투에서 그는 부처님께서 태어나셨다고 전해지는 무우수 나무 근처에 아쇼카 대왕이 세운 석주도 보았다. 637년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장소인 쿠시나가르를 목표로 여행을 하며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펴기 시작하신 곳인 사르낫도 방문했다. 현장 스님은 바라나시를 거쳐 파탈리푸트라 (혹은 파트나)와 보드가야에 도착했다. 이제 그의 긴 여정이 여기서 막을 내린다. 현장 스님은 그 후 2년간 명성 높았던 나란다 대학에서 논리학과 문법, 산스크리트어를 연구했다.

현장 스님은 그의 임무를 마쳤고 그의 이름 ‘현장’, 즉, ‘놀랄 만큼 비의(秘儀)에 통달한 스님’을 뜻하는 그의 이름에 정말로 걸맞은 삶을 살았다.
 
국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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