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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다설의 발굴’

기자명 법보신문

茶교역 통해 국익 꿈꿨던 흔적 소중

<사진설명>추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글.

소설(小雪)도 지났건만 노란 단풍이 제철을 만난 듯, 오가는 이, 나무 아래 서성이게 한다. 하늘에 가까운 나무 가지야 서리의 혹독한 시련을 견디다 못해 상처 낭자(狼藉)하지만 그래도 낙낙한 기상(氣像)이 있어 좋다.

최근 차 문화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인 ‘다설’의 발굴은 고무될 만한 사건이었다. 특히 한국 차 문화의 쇠퇴기였던 18세기 후반 거의 황폐했던 정황을 읽을 수 있는 자료요, 찬란한 문화적 기반을 갖춘 것일지라도 사람들의 무지(無知)와 경제력의 약화는 쇠퇴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차도 예외(例外)가 아니어서 찻잎을 고아서 고(膏)를 만들어, 일상에 필요한 약으로 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실마리를 만드는 것은 그 시대의 눈 밝은 사람들이다. 한국의 차 문화가 오늘과 같은 부흥을 이룩한 것은 조선 후기 소수의 안목(眼目)있는 지식인들에 의해서이다. 『동다송』의 저술도 이런 이유에서 우연은 아니었다. 초의선사에게 위촉했던 사람들의 의식수준도 그렇다. ‘다설(茶設)’을 지었던 이덕리(李德履 :1728~?)처럼 차의 교역을 통해 국익(國益)을 꿈꿨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의 고민과 땀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세월의 흔적이 있는 것들은 아무리 작고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그만한 가치를 지닌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초의선사가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종사(大覺登階普濟尊者草衣大宗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이 일을 기뻐한 추사는 사시(私諡:개인이 특별히 지어 보내는 시호(諡號))를 지어 초의선사에게 보낸다. 사시는 허균이 김시습에게 보낸 것이 최초라는 연구가 있으며, 실제 사시가 실물로 전하는 경우는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추사는 사시를 지어 초의선사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대각등계보제존자(大覺登階普濟尊者)인 초의대선사(草衣大禪師) 예좌(猊座: 고승에 대한 존칭) 에 보냅니다. 대각(大覺)이 된 후에는 원래 작은 부끄러움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법의 깃발(法幢)을 높고 견고히 달고서 급히 계단(登階)에 나아가 팔도(八道)의 승속(僧俗)을 바로 잡을 뿐, 다른 것은 미칠 겨를이 없습니다. 급급함이 법령과 같습니다. 경자(庚子:1840)2월 초 10일 비정(飛丁) (大覺登階普濟尊者草衣大禪師猊座 大覺之下 元無細羞小恥 惟當高竪法幢 速卽登階 大開宗風 糾正八道僧俗而已 他不餘及 急急如律令 庚 子2月初 10日 飛丁)”

아마 비정(飛丁)은 추사의 별호(別號)인 듯, 1840년은 초의선사가 헌종에게 시호를 받은 해이다. 팔도 승속의 규정(糾正)을 재촉하는 추사의 부탁은 간곡하다. 승려의 신분으로 왕의 시호(諡號)를 받은 것은 서산대사 이 후, 드문 일이었다. 추사의 사시는 당부치곤 엄중함이 추상(秋霜)같다. 붕우(朋友) 간에 이런 보인(輔仁)은 얼마나 될까.

동아시아 차 문화 연구소 소장 dongasiach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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