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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畵僧들] [9] 월주 덕문 하

기자명 법보신문

‘금니’-‘채색’ 조화한 ‘금니채색’기법 개발

우주만법 진리
대자연과 맥 같이해
오묘한 대화 통해
자아를 발견해야

스승의 엄격한 가르침
후학에 그대로 실천
게으름 피운 제자
나이 불문 바로 퇴출

<사진설명>물금포교당 독성탱. 덕문 1944년 作.

1990년대 초까지 활약한 월주 덕문 스님의 불화세계는 70년대에 접어들며 자리를 잡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 도상과 색채, 그리고 ‘목본금니채색불화’라는 새로운 기법의 불화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불국사 괘불(1973년 작), 공림사 신중도(1979년 작), 부산 칠성암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1970년대 작) 등의 대표작이 대부분 1970년대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구도를 보면 자연스러운 존상의 모습에 역동성이 서려 있어 기존의 불화에 비해 운동감이 활발하다. 더욱이 색감은 바닥만 황토색을 띠고 전체적으로는 주홍 계통의 색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구름에서 느껴지는 색감도 다채롭고 밝은 분위기로 바뀌어 강렬함을 선사한다.

바로 이 시기에 새로운 불화양식이 한국불화계에 등장하는데 바로 ‘목본금니채색불화’다. 덕문 스님이 개발한 이 기법은 기존의 방법으로 금니를 이용해 선으로만 표현하는 방식에다 채색을 담채로 사용해 그 위에 다시 금으로 바림(색을 칠할 때 한쪽을 짙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엷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기존의 금니불화는 금니를 이용해 선으로만 표현 한 것임을 감안할 때 구사하는데 있어 상당히 까다로움은 물론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금색의 화려함과 채색의 다채로움이 조화를 이뤄 밝고 화려하면서도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목본금니 채색불화로는 부산 칠성암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 서울 ‘만법사 삼신불회도’ 등이 있다.

이 시기에서 주의해 볼 대목은 인체의 비례다. 전대에 비해 이때는 인체의 비례가 길어지면서 8등신에 가까워지는데 얼굴 상호 길이는 1940-60년대에 비해 다시 길어졌다. 상호의 길이는 본존과 다른 인물군과 비례폭이 크지 않으며, 본존의 넓이가 줄고 다른 인물군과 비슷한 수준으로 되었다. 그러나 손의 비례는 전 시기보다 작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김석곤 씨는 논문 ‘화승 원덕문의 불화연구’를 통해 “전시기의 이상적 미감에서 현실적인 미감으로 전환되었던 시기에서 다시 이 시기에는 월주 스님의 화풍이 완성되어가는 시기로 이상적 미감으로 다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불제자로서 부처님 법음을 한시도 놓치지 않은 월주 스님이 대중에게 전한 일갈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연’이었다.

<사진설명>성전암 석가모니후불탱. 덕문 作.

월주 스님이 일생에서 대중과 호흡한 것을 꼽으라 하면 세납 74세에 가졌던 첫 개인전인 ‘인간문화재 월주 원덕문 한국화전’이다. 이 전시회를 준비하며 쓴 글을 통해 월주 스님의 불화세계와 대중에게 간곡히 당부하고자 했던 ‘일갈’을 엿들을 수 있다.

“........ 그림의 여러 분야 중 조각분야와 초상화분야, 불교설화분야, 한국산수화분야에 애써보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침묵하고 있는 자연과 접하게 된 것이다. 자연은 분명히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연 속에는 우리 인간에게 교훈을 끝없이 주고 있다. 우주만법의 진리가 대자연의 진리와 그 맥을 같이 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새삼 발견한 나로서는 이 자연의 오묘한 대화를 만 사람과 깊은 대화를 통하여 나누고 싶어진다. 특히 우리 한국화 분야에서도 우리는 우리들 조상의 슬기와 그 맥을 지켜 후손에게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자아발견이라는 커다란 명제 앞에 서서 그 명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깊은 사명감에 이르게 된다. ........”

‘자연과 진리에서 자신을 찾으라’는 74세 노승의 일갈. 그 일갈은 유독 불화와 한국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가슴에만 새길 것은 분명 아니다.

월주 스님은 불화를 배우는 제자들에게 엄격하기로 정평이 난 화승이었다.

새벽에 제자들을 깨워 예불을 올리게 하는 것은 물론 절과 작업실 청소하는 것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켰다고 한다. 또한 만일 하나 게으름 피우는 제자는 나이를 불문하고 바로 퇴출시켰다.

월주 스님의 이러한 엄격함은 스승 완호 스님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주 스님도 엄격한 스승에게 배웠고 그 자신이 스스로가 엄격했기에 제자들에게도 엄격하게 가르친 것이다.

<사진설명>물금포교당 신중탱. 덕문 1994년 作.

월주 스님은 말년에 충남 공주에서 활동하다 다시 흥천사로 올라와 그의 제자 소운 김용우 씨와 함께 작업을 했고 1년 정도 더 활동하다 1992년 12월 흥천사에서 입적했다.

월주 덕문 스님의 제자로는 소운 김용우 씨를 비롯해 진종만, 박무웅, 유병운, 박정민 씨 등이 있다. 월주 스님의 수제자는 소운(素雲) 김용우 씨. 그는 월주 스님이 흥천사에서 입적할 때까지 시봉했으며 월주 스님으로부터 소운에게 화맥을 전한다는 글도 받았다. 현재 월주 스님이 운영하던 ‘월주고전미술전수원’을 이어가며 많은 후학들에게 월주 스님의 화풍을 전하고 있다. 

사진제공 = 성보문화재연구원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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