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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응화비진분 1

기자명 법보신문

진리 그대로 움직임 없어야

<사진설명>경주 불국사의 화랑.

千尺絲綸直下垂 一波動萬波隨 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載月明歸

천척의 낚시 줄을 드리우니, 작은 물결 하나에 만 물결이 따르네. 밤이 고요하고 물은 차가와 물고기도 입질하지 않으니, 배에 가득 허공 싣고 달 밝은 밤에 돌아오네.

〈보충설명1〉 오온(五蘊)의 바다에 깊이 숨어 있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큰 자비와 수많은 방편으로 교화를 드리우지만, 우리의 불성(佛性)은 본래 고요하고 청정해서 그런 교화를 받을 것도 없고 드러낼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과 설법이 없었다면 어찌 중생이 곧 부처임을 알았겠습니까?

〈보충설명2〉 밤이 고요하고 물이 차갑다는 것은 모든 망상이 끊어진 상태이며 물고기가 입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삼라만상이 하나를 이룬 상태입니다.

〈보충설명3〉 달 밝은 밤에 돌아온다는 것은 법계의 진여성으로 되돌아가 청정한 대비심으로 중생제도에 나서는 것을 뜻합니다.

응화(應化)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교화한다는 뜻으로서 응신(應身)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와 중생을 교화(敎化)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금강경은 ‘있는 바 모든 모습이 모두 진실된 실체가 아니다(凡所有相皆是虛妄)’라는 것이 주요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법신과 구별되는 화신으로서의 석가모니는 법신의 그림자로서 모양을 지니고 있으니 허망한 것이 아니겠느냐, 또한 그 말씀에 따라 수행하는 것도 잘못이 아니겠느냐 하는 의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32분 응화비진분이라는 과목은 ‘석가모니 부처님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라고 단정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옳지 않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진실한 것이 아닌가?’ 라는 뉘앙스를 풍기게 해석해야만 합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오해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석한다면 진리로서 이 세상에 오신(如來) 석가모니를 통해 시공을 초월한 법신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須菩提 若有人 以滿無量阿僧祇世界七寶 持用布施 若有善男子善女人 發菩薩心者 持於此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人演說 其福勝彼 云何爲人演說

“수보리여! 만일 어떤 사람이 무량 아승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하고, 만일 또 어떤 선남자·선여인 중에 보리심을 발한 이가 있어 이 금강경 사구게 등을 수지독송하여 남을 위해 연설한다면 이들의 복이 저 보시한 사람보다 수승하리니, 남을 위해 어떻게 연설해야 하겠는가?”

{冶父}要說 有甚難 卽今便請 諦聽諦聽

설법을 요구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 지금 곧 청하노니,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으라.

行住坐臥 是非人我 忽喜忽嗔 不離這箇 這箇 驀面唾 平生肝膽一時傾 四句妙門都說破

행주좌와·옳고 그름·나와 남·기쁨과 진노가 ‘이것(這箇)’을 떠난 적이 없는데, ‘이것’이라 한다 해도 돌연히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로다. 부처님께서 평생의 살림을 한 순간에 쏟아 부었으니, 사구의 묘한 법문을 모두 설파했도다.

〈보충설명1〉 저개(這箇)는 언설로 표현할 수 없으며 누구나 다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진리입니다.

〈보충설명2〉 우리의 일상생활은 때마다 곳곳마다 이 진리를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법을 청한다면 그저 말하는 것으로 그 뿐입니다. 또 진리가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라 해버리면 나와 진리를 두 갈래로 나누게 되는 것이며 곧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허물이 되는 것입니다.

不取於相 如如不動

“상에 집착하지 않고 진리 그대로 움직임이 없어야 하느니라.”


{冶父}


〈보충설명〉 점 세 개가 그려진 원(원이삼점)은 사상(四相)이 사라진 무아(無我)를 드러내는 것이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절대 평등의 모습입니다.

末後一句 始到牢關 直得三世諸佛 四目相觀 六代祖師 退身有分 可謂是江河徹凍 水泄不通 極目荊榛 難爲措足 到這裏 添一絲毫 如眼中着刺 減一絲毫 似肉上瘡 非爲坐斷要津 盖爲識法者恐 雖然恁 佛法只如此 便見陸地平沈 豈有燈燈續焰

말후구가 비로소 진리의 성에 이르니, 바로 삼세제불도 네 개의 눈으로 보아야 알 것이며 육대조사도 몸을 물리쳐야만 분수를 알 것이다. 가히 강이 꽁꽁 얼어서 물이 샐 수도 없고, 눈을 뜨려 해도 가시에 찔리고, 발을 쳐들기도 어렵다 할 것이다.

‘이것’에 이르러서는 한 터럭을 더하더라도 눈 속의 가시와 같고, 한 터럭을 덜어 내더라도 피부 위의 종기와 같으니, 앉아서 요긴한 자리를 무턱대고 끊는 것이 아니라서 모두 진리를 알 것이다. 그렇지만 불법이 단지 이와 같다면 곧 육지가 평평히 침몰함을 보리니, 어찌 등불이 서로 전승됨이 있으리오.

〈보충설명〉 더 이상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이 절대 평등의 자리는 부처님 눈으로도 볼 수 없고 조사도 알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그 자리를 모르면서 ‘여여부동(如如不動)’이란 말을 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비록 부처님께서 알고 말씀하셨더라도 단지 ‘여여부동(如如不動)’이라 말하면 이에 걸려 진실된 개념들이 사라지므로 불법을 이어간다는 것 또한 거짓이 됩니다.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진리를 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야보스님 자신이 바로 진리의 등불을 이어나가는 법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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