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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실력 없는 이는…

기자명 법보신문

노교수 해석에 학생 문제 제기
실수 인정한 노교수에 박수갈채
잘못된 佛紀 인정은 참된 용기
경계해야 할 것은 후대의 조롱

대학 2학년 교양영어 시간 때의 일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당시 영어 과목을 담당했던 한 교수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갈색 버버리를 걸치고 반백의 고수머리를 한 50대 후반의 중후한 모습은 요즘처럼 스산한 초겨울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지요. 바리톤 음성의 영어발음은 또 얼마나 좋았는지, 지금은 이름조차 잊어버렸지만 참 멋진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님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은 그런 멋들어진 외양 때문만은 아닙니다. 열린 사고와 닫힌 생각, 또 권위와 고집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보여준 철학과 용기가 그분을 잊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해 가을의 어느 날, 영어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은 교과서에 실린 한 젊은 여인의 삶을 다룬 서양 작가의 단편소설을 읽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렴풋하지만 이 여인을 설명하는 단락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여인의 얼굴은 예뻤고, 지적이었으며 지혜로웠고, 성격도 좋았으며 또한 훌륭한 ‘line’을 가졌다는 부분이었지요. 그런데 여기서 교수님이 ‘line’을 멋진 몸매라고 해석하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수님, 이 문장에서의 line은 멋진 몸매보다는 훌륭한 가계(家系)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순간 교수님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쳐갔습니다. 안경을 고쳐 쓰고는 문장을 다시 검토하는 시간이 적막처럼 흘렀습니다. 질문을 던진 학생도 괜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닌지 안절부절 하고 있었고, 다른 수십 명의 학생들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30초쯤 흘렀을까. 이윽고 교수님이 무겁게 말문을 여셨습니다.

“이럴 때, 실력 없는 교수는 멋진 몸매가 옳다고 우깁니다.”

잠시 후 학생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교수님을 향해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실수를 깨끗이 인정하고 바로잡는 교수님의 열린 사고, 그리고 실수를 인정하는 방식에 깃든 기지와 응변에 존경과 감탄을 금치 못한 것이지요.

만에 하나 교수님이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고집했더라면,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화를 냈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무엇인가 찝찝하고 어색하며 개운치 않은 기운이 학기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겠지요.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이 일이 있은 후 교양과목이었는데도 학생들과 교수님 사이에는 전공과목 교수님 이상으로 돈독한 사제지정이 생겨났습니다.
 
최근 교계에는 본지의 문제제기 이후 한국불교의 불기(佛紀)가 국제공용 기준보다 1년 빠르게 잘못 사용되고 있어 이를 바로잡아야 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세계불교도우의회가 정한 불기를 사용하기로 결의해놓고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한 해가 빠르게 가고 있으니 실소를 금치 못할 일입니다.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것은 부끄럽거나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이런저런 핑계를 보태는 것이야말로 구차한 일이지요.

글로벌 시대입니다. 한국불교의 국제교류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틀린 불기를 사용하는 것, 나아가 틀린 것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특히 경계하는 절집에선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처럼 무서운 일도 드뭅니다. 역사에 어리석음을 행한 당사자로 기록돼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되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표이사〉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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