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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스님]수련회 단상

기자명 법보신문

경계 피하지 말고 공함 요달해야

흐름을 거슬러 뒷산에 오른다. 낙엽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지난 이야기를 속삭이고 빈 골짜기엔 메아리 발자취가 끊어졌다. 겨울산은 온통 진실 하나로 본래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더없이 편안하다. 양지쪽에 앉아서 끝없이 펼쳐진 다도해를 바라보며 수평선처럼 아득한 옛 길을 되돌아본다.

성철 스님의 봉암사 결사 후 폐쇄되었던 산문을 다시 열고 선원을 개원하던 해였다. 기라성 같은 구참 납자들과 첫 철을 함께 나면서 모범적인 대중생활의 청규를 배우고, 서암 조실스님께는 참으로 검소한 선가의 가풍을 익혔다.

많은 대중들이 함께 살면서도 여법하고 법을 구함에 치열했으며 구참 스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항상 초심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섬에 들어와서 선원을 열고 수련회를 이끌어 가면서 고독하고 정진의 끈을 놓칠 때마다 치열했던 첫 안거 시절을 떠올리면서 초발심으로 되돌아갔다.

수련회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서 안거를 대신 한 것이 벌서 20여 년이 넘었다.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시은에 떳떳하기 위해서 복과 지혜를 함께 닦는다는 생각으로 선택한 수행의 방법이다.

돌이켜보면 아직 수행력이 부족하고 덕화가 없어서 항상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항상 자기 허물을 보고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는 『육조단경』의 가르침을 경책으로 삼았다. 아무리 억울하고 분한 일도 밝히려고 하지 말아야 회광반조가 되어서 수행으로 나아가게 된다. 모든 사람을 선지식으로 섬길 수 있는 마음도 여기에서 나오고 끝없는 하심으로 일체 상이 녹아지기 때문이다.

수련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복잡하고 시끄러운 경계를 떠나서 조용한 곳에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 수행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선정과 지혜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일화는 어느 보살님으로 집안에 큰 우환이 생겨 집 근처 포교당에 나가서 『반야심경』을 사경하고 외웠다고 하였다.

몇 년을 빈틈없이 사경하고 외웠더니 가피력이 있어서 소원은 성취하였는데 친구들하고 노래방에 가면 자기도 모르게 『반야심경』이 나와서 재미가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눈앞에 경계가 나타나면 두려운 나머지 『반야심경』으로 끊어버리고 고요한 마음을 공부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습이 되어 끝내는 천진한 성품을 가리게 되므로 무기공에 빠져 헤어나기가 어렵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삶의 모습을 떠나서 다시 고요한 세계를 찾는다면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바라보아 내가 본래 부처이고 경계가 본래 공함을 요달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눈앞에 전개되는 일체 경계가 그대로 성품이 출현하는 것이므로 바로 확인만 하면 된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인가 보다. 방에 있어도 코끝이 맵다. 겨울 숲은 수척해 보여도 마음은 차가운 하늘처럼 투명하기만 하다.

낙엽은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르고
황혼은 돌탑에 붉은 털목도리를 걸쳤네.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haejoum@ggse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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