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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 항주의 차 문화 [끝]

기자명 법보신문

누구에게나 평등한 소박한 사치

<사진설명>항주는 중국 10대 명차 가운데서도 단연 첫 손에 꼽히는 용정차의 고향이다.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차밭은 차의 고장 항주의 또 다른 모습이다.

“항주에 가게 되면 꼭 서호변의 찻집에 들러서 차를 한잔 마셔 봐요. 항주의 용정차는 중국의 10대 명차 가운데서 최고이기도 하지만 해질 무렵 잔잔한 서호를 바라보면서 차를 마신다면 그 맛이 남다르지 않겠어요?”

차를 좋아하는 한 지인이 항주에 가기 전부터 신신당부를 했다. 용정차라면 우리나라에서도 적잖이 먹어본 경험이 있어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해질 무렵 서호변에서’라는 표현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들렸다. 마침 오락가락하는 빗줄기 때문에 낮게 드리운 안개에 잠긴 서호는 양귀비(楊貴妃), 왕소군(王昭君), 초선(貂嬋)과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월나라의 미인 서시(西施)를 떠올리게 할 만큼 아름답게 보였다.

서호를 바라보며 차를 마실 장소로는 ‘호반거’라는 꽤나 고풍스런 간판에 제법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엿보이는 찻집을 선택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사람당 찻값이 180위엔, 우리 돈으로 2만원을 훌쩍 넘어선다. 이곳은 강택민, 이붕 등 중국의 유명한 지도자들도 자주 찾아 차를 즐기던 명소였고 3층은 지금도 항주를 찾은 국빈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항주시 정부의 공식적인 접대 장소로 사용된다고 한다.

아무리 명소라 해도 차 한 잔 값이 너무 비싼 것 아닌가 싶었는데 그런 불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차를 내오기 전 종업원들은 석류, 신장산 말린 포도, 대추, 아몬드, 도토리, 땅콩, 호박씨, 수박씨, 말린 체리 등 20여 종류의 다식을 찻상에 펼쳐놓았다. 그리고는 찻 잔이 비지 않도록 계속해서 차를 달여 잔을 채워주었다.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손님이 차를 마시는 동안 차는 계속 채워졌고 각종 떡과 과일, 심지어는 죽과 국수까지 온갖 곁들임 음식이 줄을 이었다. 특히 첫잔을 달여 내기 전에 입구가 좁고 긴 잔에 차의 향을 가득 담아 향기를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향배(香盃)는 그윽한 향으로 상대를 무장해제 시키는 묘한 매력 그 자체였다.

그러고 보니 가게 안의 손님들 가운데는 차와 다식을 즐기며 회의를 하거나 사업에 관한 논의를 하거나 혹은 그냥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눈에 띤다. 중국 사람들이 차를 즐긴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몇 시간씩 앉아서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니 그들의 생활 속에 차가 얼마나 깊이 스며들어있는지 약간은 짐작이 간다.

20여 종류의 다식과 함께

<사진설명>항주의 용정차가 유명한 이유는 이곳의 특별한 물 때문이다. 호포천에서 떠온 물은 동전이 뜰 정도로 밀도가 높아 부드러운 차 맛을 만들어 낸다.

항주를 대표하는 차는 용정차다. 용정차 잎은 짙은 향, 부드러운 맛, 비취 같은 녹색 그리고 참새 혀 모양의 잎이라는 네 가지 특징이 있는데 이를 ‘4절(四絶)’이라고 한다. 용정차라는 이름은 서호의 서남쪽 봉황령에 있는 샘물 용정(龍井)에서 유래됐다. 이 샘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물이 곱고 물맛이 감미롭기로 유명하다. 이 샘의 서쪽에 있는 용정촌은 유명한 용정차의 생산지다. 지금은 항주 지역에서 나오는 차 대부분을 용정차라 부르지만 원래는 이곳 용정사의 스님들이 차나무를 재배해 그곳에서 딴 찻잎을 용정의 샘물에 달인 것을 용정차라 불렀다.

중국 청나라 때에는 이곳 차나무를 ‘어차’, 즉 ‘임금의 차나무’로 봉해 놓고는 황실에서만 그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남서지역을 순례하던 청나라 건륭황제가 이곳에 들러 찻잎을 따면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는데 마침 태후가 아프다는 급보를 듣고는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따던 찻잎 주머니를 둘러 맨 채 환궁해 병석에 있는 태후를 문안했다. 그런데 앓아누워있던 태후는 황제의 몸에서 나는 그윽한 차향에 반해 즉석에서 그 차를 달여 마셨고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 후로 건륭제는 이곳 차나무 열여덟 그루를 어차로 봉하고는 매년 봄 새 차를 따서 태후에게 보냈다고 한다. 지금은 항주 인근 곳곳에서 차밭을 쉽게 볼 수 있고 항주 시내 어느 곳에서나 용정차를 판다는 간판을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용정이라는 샘물에서 유래됐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용정차가 유명한 진짜 이유는 이곳에 좋은 물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 ‘용정’

항주에는 용정 외에도 진강의 중냉천, 무석의 혜천과 함께 ‘천하의 제 삼천’이라 불리는 호포천이 있다. 용정과 호포천의 샘물은 모두 광물질이 적고 분자의 밀도가 높아 맛이 순하고 부드럽다. 이를 확인시켜주기 위해 중국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물위에 동전을 띄우는 ‘마술’이다. 이곳 샘물의 물을 잔에 가득 담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동전을 올리면 동전은 가라앉지 않고 거짓말 같이 물위에 둥둥 뜬다. 물의 표면 장력이 높기 때문인데 그만큼 물의 밀도가 높다는 뜻이고 중국 사람들은 이를 일러 ‘물이 부드럽고 찰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진설명>차와 함께 나오는 각종 떡과 과일 등이 눈을 즐겁게 해 준다.

용정과 더불어 용정차를 달이는 대표적인 샘물인 호포천은 시내에서 5km 떨어진 서호 남쪽 대자산 정혜선사(定慧禪寺)내에 있다. 호포천 주변 바위에는 팔베개를 하고 느긋이 누워있는 노선사와 그 발아래 얌전히 앉아있는 호랑이가 조각돼 있는데 이곳 샘물에 얽힌 전설을 말해주는 조각이다. 중국 당나라 때에 성공(性空)이라는 스님이 이곳에 와보니, 산세도 좋고 경치도 아름답지만 샘물이 없어 머물기에 적당치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데 스님 앞에 갑자기 산신이 나타나서는 “내일 호랑이 두 마리가 이곳에 샘을 팔 것이니 대사께서는 이곳에 머물러 달라”는 것이었다. 과연 다음날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나 맑고 깨끗한 샘을 파 놓고는 사라졌다. 그 샘이 바로 호랑이가 파 놓은 샘이라는 뜻의 호포천이다.

이곳 호포천의 샘물 역시 용정의 물처럼 맑고 부드러워서 용정차를 달이는 데는 제격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용정차와 호포천을 일러 서호쌍벽(西胡雙璧)이라 극찬한다.

그래서일까. 호포천의 물을 길어다 차를 달인다는 이곳 찻집의 차 맛은 한국에서 익히 맛보았던 용정차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용정이나 호포천의 샘물을 이용해 차를 달여야 용정차의 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설명을 듣다보니 중국에 가서 용정차를 사왔다는 사람은 많이 보았지만 물을 사왔다는 사람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진설명>항주 시내의 차시장. 차를 사기 전에 맛을 볼 수 있어 좋다.

항주 시내에는 용정차를 파는 시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등급별로 찻잎을 구분해 놓고 판매를 하는데 차를 사기 전에 얼마든지 맛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저것 꺼내 실컷 맛을 보고나서는 맘에 들지 않는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가게 문을 나서는 중국 사람들의 모습이 이방인의 눈에는 당혹스럽게 보이지만 주인이나 손님이나 그것을 당연시 여기는 모습이다. 원하는 차를 고르면 주인은 정성스럽게 포장을 해주는데 손님이 원하는 만큼 무게를 달아 차 봉투에 담고는 밀봉을 한 후 ‘용정차’라는 상표가 새겨진 그럴듯한 차 통에 담아 준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포장돼 나온 제품인냥. 하지만 물색없는 관광객이 시장으로 차를 사러 왔다가는 십중팔구 싸구려 차를 사거나 바가지를 쓸 수 있으니 그리 추천할 만한 장소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이곳 항주의 시장에서 얼마나 많은 차가 유통되고 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기에 시간이 난다면 한 번쯤 둘러볼만 하다.

동전도 띄우는 찰진 물

<사진설명>호랑이 두 마리가 파 놓았다는 샘물 호포천은 용정차와 어울러져 최고의 차맛을 만들어 내는 일등공신이다.

중국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차를 즐긴다. 기름기가 많은 그들의 음식문화를 감안한다면 차를 많이 마신다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 사람들에게 차는 단순한 먹거리 그 이상이다. 굳이 고급 찻집이 아니더라도, 화려한 다식을 곁들이지 않더라도, 찻잔 가득 퍼지는 푸른빛과 싱그러운 향기를 감상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즐거운 사치다.

하지만 하루나 고작해야 이틀을 일정으로 후다닥 서호를 둘러보고 다음 목적지로 가버리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는 이런 사치가 좀처럼 허락되지 않을 듯하다. 중국, 항주를 찾는다면 반드시 서호변 벤치에 앉아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 마시며 서호의 풍광을 즐기기 바란다. 몸속 가득 스며드는 청아한 초록빛과 향기를 느끼고 나면 아름다운 호수의 도시 항주는 푸른 향기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중국 항주=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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