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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불교계의 3·1운동(3) - 범어사

기자명 법보신문

경남지역 만세운동 확산에 결정적 영향

범어사 소속 스님·학생 시위 주도… 31명 구속 옥고치러
부설 명정- 지방학림 폐교… 금정중 남아 당시 행적기념

<사진설명>1917년 경 범어사 전경.

범어사는 우리나라의 사찰 가운데 비교적 일찍 개화문물을 받아들였다. 개화승 이동인이 범어사에 머물면서 일본을 왕래하였고, 1906년에는 명정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재정적으로도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승려들이 갑계(甲契)·도종계(都宗契)·서청계(書廳契)·판청계(判廳契) 등을 운영하여 그 기금과 수익금을 사찰에 기부하였다. 신도들 사이에서도 미타계·지장계·나한계·칠성계·열반계 등이 운영되어 사찰 경제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재정적인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1912년에 경성에 임제종 포교당을 운영할 수 있었고 부산과 인근 지역에도 포교당을 설치하여 야학과 유치원 등을 운영할 수 있었다.
일찍이 개화문물을 접한 범어사의 3·1운동은 1919년 2월 하순경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한용운이 내려와서 당시 주지였던 오성월과 이담해·오리산 스님을 만나 3·1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올라갔다고 한다.

3·1운동 당시 동래 범어사에는 초등학교 과정의 명정학교와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세 승려는 경성에서 중앙학림에 다니고 있던 김법린과 범어사 강원의 대표로 차상명·김영규·김봉한 그리고 명정학교 학생이었던 김한기를 불러 경성의 파고다 공원의 만세시위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사진설명>범어사 3·1운동 주역 김한기.

이들은 상경하여 3월 1일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난 다음 제각기 흩어져 범어사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였다. 김법린과 김상헌은 2월 28일 밤 한용운의 부름을 받고 계동 유심사(唯心社) 사옥에서 민족대표들의 3·1운동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인사동 범어사 포교당에서 범어사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다는 역할을 부여 받았다. 두 사람은 경성 만세 시위에 참가하고 난 다음 기차를 타고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부산역까지 가지 않고 양산군 물금역에 내려 고달재를 넘어 범어사 소속 말사인 청련암에 도착하였다. 범어사 파견원인 김법린과 김상헌은 3월 4일 유석규·김상호·차상명·김성구 등을 만나 경성의 상황을 전하고 동래에서 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협의하고, 절 안에 있는 명정학교 학생들과 협의하여 30여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김법린과 김상헌은 범어사로 들어가서 오성월·이담해·김경산 스님에게 경성의 소식을 전했다. 두 사람은 동지들과 범어사 강원의 학인 스님들과 명정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18일 동래 장날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태극기를 만들고 선언서를 등사하는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들이 만세 시위를 준비하는 동안 동래고보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10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한 사건이 벌어졌다.

동래고보 만세시위 사건은 경성 고등공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곽상훈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서 동래고보의 수학 교사이던 이환과 협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모의에 참가한 사람은 교사이던 이환을 비롯해서 곽상훈·엄진영·김인호·김귀용·손영수·이수열·정호종·백정기 등 이었다. 이들은 3월 13일 동래 장날 만세 시위를 결행할 것을 결의하고 학교 근처 서원에서 살고 있던 박달호의 거처에서 학교 등사판을 가져다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장날이 되자 이들은 등사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품에 숨기고 장터 길목에서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선언서를 나누어 주었다. 정오 무렵 엄진영이 당시 군청 정문에 있던 망미루에 올라가서 만세를 선창하자 삽시간에 장터 곳곳에서 선언서가 뿌려지고 만세 소리가 드높게 울려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을 탄 일본 경찰 20여명과 수비대 군이 50여명 출동하여 총을 쏘기 시작하자 군중들은 흩어지기 시작하였고, 일본 경찰은 이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동래고보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만세 시위는 범어사의 3·1운동을 한층 고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장날인 3월 18일에 일어났다. 범어사의 3·1운동은 경성에서 내려온 불교계 지도층의 지도를 받은 이들 학생층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주동 학생들은 독립선언서 5천 여매와 대형 태극기 1개 그리고 작은 태극기 1000 여개는 준비하였다.

3월 17일 저녁에 범어사에서는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두 학교의 졸업생 송별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차상명·김영규·김봉환·김상기·김한기 등은 거사계획을 설명하고 졸업생들로부터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겠다는 약속받았다. 학생들은 밤에 범어사를 떠나 선리 뒷산을 넘어 동래 향교를 지나 복천동에 있는 불교포교당에 도착하였다. 새벽이 되자 이들은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서 김한기가 장터의 동정도 살필 겸해서 장터로 나가 곳감 5접을 사와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일본 헌병과 군인 20여명이 들이 닥쳐 김한기·차상명·김영규·김상기의 이름을 부르며 이들을 경찰서로 연행하고 나머지는 해산시켰다. 후일 밝혀진 바에 의하면 명정학교 학생이었던 오계운이 나카무라(中村)라는 일본인 교사에게 거사의 사실을 몰래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해산 당한 학생들은 몇 십명씩 떼를 지어 동래로 들어갔다.

이들은 18일 밤 동래읍 서문 부근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여 동래 시장을 거쳐 남문에 이르기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근우·김해관·김재호·박재삼·박영환 등 40여명의 명정학교와 지방학림의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군중들과 함께 동래읍 서문 부근에서 동래시장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부리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날 밤 이들은 다시 모임을 가지고 내일은 보다 큰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다. 시위대는 19일 오전 허영호·이영우·황학동·윤상은 등은 허영호가 쓴 ‘한번 죽음은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격문을 수 백장 만들어 군중들에게 배포하였다. 오후 5시경에 동래 시장 남문 부근에서 시위를 전개하여 동래 경찰서로 돌진하였다. 경찰은 이들에게 총을 쏘면서 저지하였고 주동자들을 체포하였다.

이 때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체포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김봉환·김상기·김상환·김영규·김영식·김재호·김충념·김태준·김한기·김해관·박영수·박영환·박재삼·박정국·박창두·손군호·신종기·양수근·양춘도·오병준·오시권·오점술·윤상은·이근우·이달실·이영우·정성언·지용기·차상명·최응관·허영호·황원석·황학동 등 이다. 이들은 부산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33명 가운데 박재삼과 김영식은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나머지 31명은 6개월 내지 2년의 징역형을 받아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이들 가운데 김한기 등 15~16명은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를 하였다. 동래지역 3·1운동의 주축은 범어사의 청년 승려들과 범어사 내에 있던 학교의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이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여기에 각종 학교의 교사, 학생 등을 비롯한 일반 민중들이 참여하여 전개되었다. 이러한 범어사의 3·1운동은 이후에 전개되는 경남 지역 사찰의 만세시위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범어사 3·1운동의 주역 가운데 김법린은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명정학교와 지방학림은 재학생들의 만세시위사건 참가로 인해 일제로부터 1919년 3월 31일자로 폐교 처분을 받게 된다. 1921년에 범어사 사립명정보통학교는 운영난으로 공립청룡보통학교에 병합되어 운영되다가 1926년부터 해방 이전까지 금정불교전문강원으로 존속하게 된다. 해방 이후 1950년에 금정중학교로 명칭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정중학교는 1919년 범어사 학생들의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70년 3월 1일 교정에 3·1운동 유적비를 건립하여 당시의 행적을 기념하고 있다. 범어사 만세시위 사건에 참여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지용준과 박정국은 1992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김상기·김영규·김한기·차상명·허영호 등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으며 김법린은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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