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장인] ① 옥새장 민홍규
[한국 불교의 장인] ① 옥새장 민홍규
  • 법보신문
  • 승인 2007.01.0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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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代 척추 다치고도 ‘명작’ 원력

16세 때 조부 권유로
정기호 문하에 입문

3년 동안 청소 허드렛 일
기교보다 정신체득 어려워

30代 방황 속 미술계 도전
전각-회화 접목 새 길 개척

무소유 삶 속 외길 걸어
아시아 최고 명인 반열

<사진설명>민홍규 씨는 열 여섯 살 때 석불 정기호 선생 문하에 입문에 40년 가까이 옥새장의 길을 묵묵히 걸어 왔다.

정부가 2006년 말 공모한 ‘새 국새 모형 공모전’에서 인문(글씨), 인뉴(손잡이·봉황 손잡이)부문에 모두 당선된 민홍규(52세) 옥새장.

공모전을 통해 국새 제작의 제1인자로 명실공이 인정받은 셈이지만 사실 그는 아시아권에서는 독보적인 옥새 제작자로 우뚝 선 인물이다.
 
한 나라의 왕권을 상징하는 이 옥새의 제작 기법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오직 스승이 제자를 두어 비밀리에 전수됐는데 그 비밀문서가 바로 조선 500년을 이어온 ‘영새부’다. 그 영새부 마저 상세하게 공개한 인물이 바로 세불(世佛) 민홍규(『옥새』· 인디북· 2004년)씨다.

경남 산청 출생인 그는 4,5세쯤 할아버지에게서 서예와 함께 사군자를 배웠다. 당시 할아버지는 부산에 머물고 있던 정기호 선생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15세가 될 무렵 하루는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도장을 제일 잘 새기는 선생님이 있다.” 동사무소 근처에 가면 도장 파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시큰둥한 그의 반응에 할아버지는 “동양에서 제일”이라며 한 번 더 거들었다고 한다. ‘동양 제일’이라는 말에 혹(?)해 할아버지와 함께 부산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동양제일’을 만나 “그동안 내가 좀 기초는 닦아놓았네”하며 손자를 맡아달라고 청했고 어린 그도 마음이 동했다. 이듬해인 16살 때 정식으로 입문해 정진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전각 일평생을 지켜본 ‘동양제일’은 바로 고종황제 이후 최초로 ‘대한민국’국새를 만든 석불(石佛) 정기호 선생이었다. 훗날 정인보, 오세창 등에 의해 ‘철심에 새긴 명장의 손길’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다.

말이 입문이지 그가 한 것이라고는 방 쓸고, 먹 갈고, 칼이나 망치 등을 깨끗하게 정리정돈 해 놓는 일 뿐이었다. 이러한 허드렛일은 3년 동안 지속됐다.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스승의 작품을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반면에 언젠간 나도 저런 작품을 세상에 내 보이겠다는 원대한 꿈도 품었지요. 어쩌면 내 몸이 아픈 만큼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듯 싶습니다.”

그는 정기호 선생 제자로 들어선 16살 때 철근을 옮기던 중 넘어져 척추를 다치고 말았다. 현재 그의 척추 네 마디는 거의 붙어 있는 지경이다. 나무나 금속 등의 다소 무거운 짐을 옮기려면 구부정하게 물건을 들어 팔꿈치를 두 다리 허벅지에 붙인 상태에서 서서히 움직여야만 가능하다. 그의 육체는 부자연스러웠지만 정신만은 더욱 강건해져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스승이 출타하자 그도 작품을 만들고 싶은 열정을 누르지 못해 나무에 글씨를 새겼는데 감히, 스승의 칼을 쓸 엄두도 낼 수 없었기에 과도를 사용했다. 스승이 돌아오자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순간, 날아온 것은 목침과 망치. 스승의 허락 없이 전각에 손을 댄 과보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다음 날 스승은 그에게 칼을 건네주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너의 심성을 작품에 새겨 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후 스승의 전수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정작 힘들여 배워야 할 것은 기교, 기법이 아니었다. 옥새제작의 심성, 즉 옥새제작 철학을 배워야 했는데 이러한 가르침은 선문답처럼 오고갔다. 스승이 그에게 주문했다. “살아있는 듯한 나뭇잎을 새겨 와 보라.”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잎은 살아있는 잎이고 떨어지면 죽은 나뭇잎인데 어떻게 살아있는 나뭇잎을 새겨보라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지요. 그냥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나뭇잎 모습을 새기면 되는 것은 아닐 것은 너무도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나뭇잎도, 떨어져 있는 나뭇잎도 아닌 뒹구는 나뭇잎에서 해답을 찾았다. 바람결에 따라 흩날려 비틀어진 나뭇잎을 새겨 스승에게 보여주며 당당하게 말했다. “나무 스스로는 생존을 위한 마지막 힘을 다하려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비틀어진 나뭇잎도 생존의 마지막 에너지를 다하고 있기에 살아있는 듯한 나뭇잎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삶도 이와 같습니다. 생사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의 이러한 철학은 지금도 그의 작품 속에 은은하게 배여 있다. 목각 인장 손잡이에 새겨진 동물을 유심히 보면 온전하게 새겨져 있지 않다. 앞면에는 동물의 얼굴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지만 발은 뒤로 가며 어느덧 점차 사라져 가고, 뒷면에 생생하게 새겨진 팔은 앞면으로 접어들며 다시 점차 사라져 간다. 불자인 그는 ‘생사불이’의 부처님 법음을 그의 예술 속에 새기고 있는 것이다.

호랑이 스승 아래서 혹독한 전수를 받았던 그는 30대에 접어들 무렵 더욱 힘을 얻어 작품에도 큰 진전이 있었다. 이 때 스승은 다시 한마디 던졌다.

“40세 이전에는 옥새를 갖고 세상에 나가지 마라. 세속의 나이로는 익은 시절이지만 예술 세계의 눈으로 보면 풋내기 일 뿐이다.”

“순간, 망치로 또 다시 머리를 한 대 맞은 충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스승님은 옥새제작의 비전이 담긴 ‘영새부’를 알지 못하면 전수자로서의 자격도 없다’고 누누이 말씀하셨지만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그 영새부를 보여준 적도 말씀 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오로지 이 한 길로만 들어서서 수업했는데 그에게는 명예도, 돈도, 영새부도 없었다. 철근을 나르다 척추를 다쳤을 때 보다 더 큰 아픔이었다고 그는 술회한다. 그는 곧바로 계룡산으로 향했고 그 곳에서 산 사람들을 만나 밥을 얻어먹으며 지냈다. 당시 탄허 스님과도 인연이 있었던 그는 절에 머무르며 끝없는 방황의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그 때 그는 한편으로 새로운 도전을 해 보기로 작정했다.

“그 동안 제가 익힌 서예, 회화, 전각 전 분야를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제 스스로 길을 찾아보려 했던 겁니다.” 그는 이 때 전각에 회화를 결합한 새로운 ‘현대서예’부분을 개척하며 화단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3년여의 방황을 끝낸 후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40 이전에는 안 되지만 40이후에는 가능하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옥새 복원의 원력을 세운 것이지요.” 지금까지 그가 복원한 조선시대 옥새는 ‘조선국왕지인’, ‘명덕지보’, ‘황제지보’ 등 35과. 조선시대 말까지 전해져 오는 옥새는 약 72과라고 한다.

그는 스승이 1989년 작고할 때까지 문하에서 전각을 익혔고 스승은 작고 1년 전에 “옥새, 동장, 전각을 금필하였다‘면서 그의 옥새 전각 기능을 인정했다.

옥새는 한마디로 종합예술의 완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양사상의 토대 위에 서예, 회화, 조각, 전각, 도예, 주물 등 다양한 표현 장르가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전통 기법을 통한 이러한 일련의 전 과정을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 뿐이다. 중국은 이미 사회주의 국가로 접어들며 그 맥이 끊겼고 일본은 주물 과정에서 금이 갈라지는 등 아직도 갈길이 멀기만 하다. 일본에서 국보급으로 칭송되고 있는 고바야시는 “한나라 때의 동장 하나도 옛 기법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고 토로한 바 있다. 동장도 어렵다면 옥새 제작 재현은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는 옥쇄 제작 연구가이면서 전각, 서예, 회화(동양화) 등의 미술 부문에도 발굴의 실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30대 초 방황하던 시기 뿐 아니라 옥새를 연구하면서도 틈틈이 새로운 창작열을 쏟아놓은 것이다.

<사진설명>세 평 남짓한 공간인 그의 작업실. 이곳에서는 '무심'의 경지서 '유심'을 새기는 옥새장의 외길 여정이 느껴진다.

그가 방마다 수북히 쌓여있는 작품 중에서 손닿는 대로 몇 점을 꺼내 놓았는데 작품의 완성도는 매우 높아 보였다. 대부분 80년대 중반을 전후한 작품들이었지만 2000년대의 지금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작품 ‘독수리’에서는 먹의 농담만으로 형성한 독수리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은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작품 ‘녹서’(綠書)는 압권이다. 전서, 초서, 해서 등 다섯 가지 서체를 혼용해 쓴 이 서예작품은 각기 다른 서체가 상호 조화를 이룰 때 어떤 아름다움을 선사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글씨와 회화를 접목한 전각 작품들은 한눈에 보아도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순간, 현재 전시되고 있는 현대 전각의 세계가 이 방에 모두 집결돼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미술의 기본원리를 체계화한 『랍아트1,2』 두 권을 1996년 내놓은 바 있다. 1974년 시작해 1990년에 원고를 마친 이 작업은 20년간 4만 점에 이르는 동서양의 미술작품을 분석했으며 원고만도 7천매에 이른다. ‘랍아트’란 ‘Line And Point’로써 ’선과 점의 예술‘이란 뜻이다. 즉, 동서양 회화, 조각 등의 모든 미술 분야를 선과 점의 측면에서 그 원리를 설명해 간 이론서라 할 수 있다. 당시 랍아트는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어 문자나 선묘의 새로운 분위기를 고조시킴은 물론 현대 서예, 전각의 새로운 장르를 창출하는데도 크게 일조했다. 서예·전각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할만 하다.

세상은 지난 2006년에서야 그에게 눈길을 돌렸다. 지난 해 12월 18일 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진흥원)의 ‘2006 올해의 예술상’ 전통예술부문에 선정됐다. 또한 한국예술평론가 협의회가 선정하는 ‘2006 올해의 최우수예술가’미술부분, ‘2006 이천시문화상’예술부문에도 선정됐다.

경기도 이천 태평리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그는 오늘도 옥새와 미술을 연구하고 작업한다. 생계는 어떻게 꾸려가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저 “한 달 2,30만이면 충분하다”며 웃어 넘겼다. 무소유 정신으로 무소의 뿔처럼 홀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그에게 우리가 선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중요무형문화재로 선정돼도 손색이 없는 독보적 옥새장이 아닌가.
 
이천=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가사 전하듯 제자에 ‘망치’ 물려 줘
5대 옥새장 소돌이

우리나라 옥새 전각장은 대대로 소돌이(망치·鎚·사진)를 물려준다. 소돌이 종류도 다양하다. 양쪽 면이 사각인 ‘방추’, 한쪽은 원, 다른 한 쪽은 사각인 ‘이합추’, 원이 한쪽은 작고 다른 한쪽은 큰 ‘전금추’, 작은 쪽은 원형이고 큰 쪽은 사각인 ‘건을추’, 약간 완곡하게 타원형으로 만들어졌지만 한쪽 끝이 작은 사각이고 하는 큰 사각으로 이뤄진 ‘귀두추’가 있다. 옥새나 동장을 새기는 쓰임에 따라 모두 다르다.

민홍규 옥새장은 그의 스승은 물론 5대 맥을 이어온 역대 5대 전각장의 소돌이를 소장하고 있다.

시불(示佛)의 소돌이는 매화 무늬에 ‘이합추’며 온불(溫佛) 전흥길은 새우 무늬에 귀추, 서사관을 지냈던 민상호는 애벌레 잠자리 무늬에 ‘방추’, 토불(吐佛) 황소산은 잉어 무늬에 이두추, 석불(石佛) 정기호는 파도 물결 무늬에 ‘전금추’며 세불(世佛) 민홍규의 소돌이 문양은 독수리이며 건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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