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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불교계에서 전개한 지방 3·1만세 시위

기자명 법보신문

표충사·통도사 ‘만세시위’ 최대 군중 결집

기록 속 사찰시위 16곳 … 중앙학림학생 확산 주도
시위 전 발각도 많아… 총독부의 사찰령 위력 발휘

<사진설명>이순재·김성암 등이 부평리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전개했던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봉선사 전경. (사진제공=민족사)

나라가 망한 이후 사찰령 체제하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불교계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전국에서 호응하였다. 기록으로 전하는 만세 시위가 전개된 곳으로는 봉선사(경기도 광주)· 해인사(경남 합천)· 통도사(경남 양산)· 범어사(부산 동래)· 표충사(경남 단장)·동화사(대구)· 도리사(경북 선산)· 석왕사(함남 안변) 등 16곳이며, 이 밖에도 만세 시위는 전국에서 주요 사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컸던 해인사와 범어사의 만세 시위 현황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는 경기도 양주의 봉선사와 대구 동화사, 단장의 표충사와 통도사의 승려들이 전개한 연대 시위 그리고 함경남도 석왕사의 3·1만세 시위 사실을 소개한다.

봉선사의 3·1만세 시위는 경성에서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승려 이순재와 김성암 등은 경성 창성동에서 약재상을 하는 김석로와 함께 부평리 주변 부락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우선 부평리 부근 주민들을 모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이를 촉구하는 문건을 제작 배포하기로 결정하였다.
문건의 내용은 임시로 만든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 명의로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운동을 하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의 유인물이었다. 이순재·김성암·김석로·강완수 등은 3월 29일 봉선사 서기실에서 약 200매 정도의 유인물을 인쇄하고 그 날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부평리 부근 진벌리 등 4개 동리의 민가에 배포하였다.

부평리에 살고 있던 이재일은 자신의 집으로 전달된 ‘동리의 주민들이 광릉 천변에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읽었다. 그는 이 격문을 동리 사람들에게 돌려서 읽게 하고 그들과 함께 격문의 내용에 호응하여 3월 31일 광릉 천변에서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3월 31일 이재일·김순만 등의 주도로 최대봉·박석몽·최대복·유희상·이홍록·최영갑·양삼돌 등 동리 사람 600여명이 광릉 천에 집결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즉시 헌병들을 출동시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주동자 8명을 체포하여 기소하였다. 광릉 천변의 만세 시위는 4월 2일 봉선사 승려였던 김성숙·이순철·현일성·강완수 등 4명의 주동으로 양주군 광주 시장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로 이어졌다.

다음은 대구 동화사의 3·1만세 시위 현황을 살펴보자. 불교계의 3·1운동 확산은 경성 중앙학림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지방은 연고가 있는 학생들이 파견되어 만세 시위를 주도함으로써 확산되었다. 대구 지역은 3월 30일 남문 시장에서 약 3,000여명이 모여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시위는 중앙학림 학생인 윤학조가 경성에서 3·1운동에 참여한 후 고향인 달성군 공산면에 내려와 있다가 3월 23일 공산면 도학동에 있는 동화사 소속 지방학림 학생 권청학·김문옥과 협의하여 전개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백안 장터에서 의거를 할 계획이었으나 대구로 옮겨 대대적인 민중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이 만세 시위는 규모가 크고 기세가 드높아 일본 군경이 출동하여 총검으로 진압하고 지방학림 학생 전원을 검거하였다. 검거된 학생은 이성근·김문옥·이보식·김종만·박창호·김윤섭·허선일·이기윤·권청학이었다.

표충사는 경남 명찰의 하나로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구국의 위훈을 세운 곳으로 표충이라는 이름은 사명대사의 입적 후에 나라로부터 받은 시호이다. 이러한 사명대사의 정신을 이어받은 표충사의 승려들은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표충사 승려들의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20일 경 통도사 승려 50여명이 찾아와 비밀회합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모의한 데서 시작되었다. 통도사의 만세 시위는 한용운의 지시를 받은 오택언이 주도하기로 되어있었다. 오택언은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통도사로 내려와서 비밀리에 통도사의 승려 및 학생 대표들과 의거를 모의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이 사실이 탄로되어 오택언은 일경에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2년 형을 받았다. 통도사의 3·1운동은 3월 29일 부속 보통학림 및 지방학림 학생 김상문을 비롯하여 40~50명과 불교전수부 학생 10명과 승려 10여명이 주동이 되어 통도사 부근의 하서면 신평 장터에서 군중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불교전수부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배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진오가 검거되어 2년형을 받았다.

한편 3월 31일에는 하서면 석계에서도 군중들의 만세 시위가 있었다. 통도사의 만세 시위는 표충사의 승려들과 연대해서 전개되었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다. 표충사 시위는 그곳의 승려이면서 강사로 법무의 임무를 띠고 있던 이장옥이 법무계의 서기인 김종석에게 ‘선서’라고 한 격문을 주면서 등사하게 하였다. 격문의 내용은 ‘우리는 민족대표들의 신탁에 따라 조선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하며, 2천만 민족은 사람마다 만세로써 품고 있는 정의의 군을 길러 민족대표의 최후 신탁을 져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표충사 의거는 이장옥·이찰수·오학성·손영식·김성흡·구연운·오응석 등이 주동이 되어 4월 4일 단장 장날을 기해 거사를 일으키기로 하고 승려·학생 30명도 장꾼들에게 나누어 줄 태극기를 품고 장으로 들어왔다. 정오 경에 일본 경찰의 집계로 약 5,000여명의 군중들이 모였으며 12시 30분 경 이장옥·이찰수·오학성 등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대를 세우고 주동 인물들이 앞장서서 장터를 돌기 시작하자 군중들은 여기에 호응하여 만세를 고창하였다.

<사진설명>표충사 스님들이 인근 주민과 함께 시위를 전개한 내용을 보도한 독립신문 기사.

이 때 학생들에 의해서 선언서가 살포되었으며, 군중시위대는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는 군중들의 투석으로 유리창·지붕·벽 등이 전파되었다. 군중들은 일본 헌병 하사관을 때려 눕혀 부상을 입혔다. 곧이어 밀양 헌병대로부터 급파된 일본 헌병의 발포로 말미암아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헌병들이 시위 군중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자 군중들은 격분하여 다음날 오후 2시까지 일본 군경의 경계 속에도 수차례 주재소 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응원부대가 도착하자 군중들의 항쟁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표충사와 통도사의 승려가 주동이 된 단장 장터 만세 시위 사건은 3·1만세 시위 가운데서도 규모가 큰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주동자 3백 64명이 검거되었고, 그 가운데 71명이 검찰에 송치되어 이장옥·오학성·손영식은 부산 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3년형을 받았고, 이찰수·김성흡은 1년형을 받고 공소를 제기하여 대구 복심법원에서 2년형으로 가중되었으며, 나머지는 원심의 형을 받았다.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는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후원을 얻어서 지어진 고찰로써 유래가 깊은 사찰이었다. 석왕사의 3·1운동은 3월 9일에서 11일에 걸쳐 3일간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저지당하였다.

함경남도 장관이 정무총감에게 보낸 3월 9일자 전보를 보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전보의 내용은 3월 8일 함흥군 퇴조 부락민 200여명이 일본인 상점 앞에서 일으킨 만세시위를 해산시켰고, 또 석왕사에서 9일부터 3일간 추도회가 열릴 것이라는 정보가 있어서 소요를 일으킬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연기시켰다는 것이다.

석왕사에서 열린 이 집회가 단순한 추도회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설사 순수한 추도 법회였다고 할지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충분히 만세시위로 전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함경남도 지방장관이 수집한 정보의 내용을 보면 충분히 만세 시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집회였다고 할 수 있다. 석왕사를 중심으로 인근 부락의 주민들과 연락을 취하여 계획된 만세 시위는 준비 단계에서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무산되었지만 3월 초순에 이미 만세 시위가 함경남도까지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사찰령이 불교계를 얼마나 구속하였으며 그 반감이 어떠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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