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화각장 이 재 만
② 화각장 이 재 만
  • 법보신문
  • 승인 2007.01.2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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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뿔 속 민화 별천지 유람 30여년
‘화각 삼매’ 정진 무형문화재 등극

화롯불에 여덟 손가락 큰 화상
‘천년 맥 이어라’ 가르침 실천

<사진설명>한 살 때 입은 화상으로 여덟 손가락이 온전치 못한 이재만 씨. 그러나 그는 올곧은 ‘장인’정신으로 일관하며 그 손으로 대작들을 쏟아냈다.

미색의 얇은 종이처럼 가공시킨 소뿔 안으로 부처님과 관음보살, 지장보살이 여법하게 나투고 있었다. 관음보살과 함께 작게 그려진 동자들의 웃음이 맑기만 하다. 아직 채색 단계에 이르지 않아 색감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벽화나 일반 불화와는 또 다른 불교예술 걸작이 출현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인천 간석동 한 작은 작업실의 이재만 씨는 요즈음 불화 서적과 경전을 탐독하며 10년 전에 세웠던 2m 불탑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목조 불탑에 화려한 화각 탱화를 입힌 장엄한 ‘화각불탑’이 벌써 눈에 어른거리는 듯하다.

대중들에게는 다소 낮선 ‘화각장’은 1996년 12월 3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되었는데 그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은 인물이 바로 이재만 씨다. “화각의 색감을 직접 보고 싶다”고 전하자 그는 작업실 옆방으로 안내했다.

10代 음일천 옹 만나 입문

문을 연 순간 50여 점에 이르는 화각 작품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장, 궤, 사리함, 보석함, 경대 등의 공예품들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십장생, 꽃, 과실, 토끼, 호랑이 등이 반투명성의 소뿔 위에 세심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우리가 익히 보았던 토끼, 호랑이, 꽃이 아니었다. 소 한 마리는 앞다리를 구부리고 있는데 마치 장애물을 뛰어 오르는 말처럼 역동적이다. 그 뿐인가. 우아하다고만 인식되었던 학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무 위를 날고 있었고 머리가 뿔처럼 우뚝 솟은 산신령 또한 웃음을 지어내게 한다.

이러한 화풍을 굳이 분류하자면 ‘민화’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딱히 ‘민화’라고만 규정지을 수 없는 그림이다. 약간의 만화성도 깃든 민화라 할 수도 있는데 풍자와 해학을 담은 야릇한 미감이 살갑게 다가온다. 그의 그림을 두고 ‘현대 민화’라고 이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그는 소뿔을 얇게 만드는 ‘각질장’, 뿔 편 위에 그림을 새겨 넣는 ‘화공’, 경대장을 만들 경우 경대의 뼈대(백골·白骨)를 만드는 ‘소목장’, 마무리 작업으로 옻칠을 하는 ‘칠장’일 등의 전문 공정을 모두 손수 해내고 있는 화각장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모두 손으로 이뤄져야 하기에 그의 손은 섬섬옥수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우악스럽게 보이는 육중한 황소뿔을 0.3mm로 얇게 펴야 하는 작업은 물론 세필로 밀도 있는 그림을 그리려면 손끝의 미세한 감각이 초 절정에 이르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손을 잠시 보여 달라’고 청했다. 그가 미소를 보이며 손을 내민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왼손 손가락 다섯 개가 온전치 않았고, 오른 손 검지는 한 마디만 있으며 약지와 중지의 손톱부위도 보이지 않았다.

“한 살 때 화롯불에 손 화상을 당해서 이래요. 죽을 지도 모른다 해서 출생 신고도 3년이나 늦었지요. 하지만 화각일 하는 데는 아무런 불편도 없습니다.”

<사진설명>화각 3층공간 탁자.

호적상으로는 1953년생이지만 실제 그의 출생년도는 1950년이다. 초등학교 당시 전국사생대회 대상을 놓치는 법이 없었을 정도로 그의 예술 기질은 천부적 이었다. 조부는 단청의 대가였고, 부친은 절을 짓는 대목이었으며, 특히 모친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자수장 이었다고 한다. 유독 만화를 좋아했던 그는 10대에 접어들며 만화 그리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당시만 해도 만화가가 되려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의 어머니는 “손이 온전치 못하다 해서 낙심하지 말아라. 오히려 그 손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을 찾아 매진해야 한다”고 당부했었다. 어머니는 조부와 모친의 작품을 보여주며 어린 ‘이재만’의 가슴에 긍지를 심어주었다.

만화에 푹 빠져 있을 때 한 벗의 권유로 당시 화각일을 하던 ‘음일천’옹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음일천 옹의 작업도 그림 그리는 일인데 “너도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친구의 권유가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처음부터 화각에 반했던 것은 아닙니다. 궁핍한 살림에 노 부부가 애써 일 하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여 도와주려는 마음에 일을 시작했습니다. 손재주는 좀 있었으니 뭔가 제가 도울 일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1966년 10대 중반, ‘화각’이 뭔지도 모르며 맺어진 음일천 옹과의 인연은 그의 인생을 가름했다. 스승은 ‘원석(元夕)’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한 자리에서 늘 변치 않는 돌 같은 굳은 심지로 ‘으뜸’이 되라는 당부가 배어 있었다.

“화각일 하면 살림은 똑같은 가 봅니다. 저 역시 지금도 좀 궁핍한데 그만둘까 하는 마음 여러 번 가졌지요. 그 때마다 스승의 한마디가 저를 붙잡더군요.”

화각 장인의 길을 끝내 벗어나지 않은 이유는 스승의 당부, 스승과의 의리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스승은 그에게 화각일을 가르치며 이 말을 전했다.

“화각쟁이 길을 걷는 순간 세상 풍파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만이 갖고 있는 전통 예술이기에 누군가 이 일을 이어가야만 한다. 지금은 ‘쟁이’에 불과하지만 ‘장인’으로 불리며 빛을 볼 것이다. 용기를 잃지 말고 전통 예술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으로 인내해라.”

입문 30년 후인 1996년 그는 스승의 예언처럼 ‘중요무형문화재’로 우뚝 올라섰다.

이재만 화각장은 단순히 스승에게서 배운 기술을 유지하는데 급급해 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변화를 위한 끊임없는 도전을 하고 있다. 20세기의 화각장과 21세기의 화각장, 그리고 22, 23세기의 화각장의 작품은 달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2m 화각불탑 제작에 혼신

“전통 유물 복원은 기본으로 해야 합니다. 복원에만 그친다면 다음 후손에게 전해줄 것은 또 다시 복원뿐입니다. 고려, 조선 시대의 화각만 보여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2m의 ‘화각불탑’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는 지금도 자료를 수집하는 것으로 시작해 각종 다양한 문양을 촬영한 후 연구하며 새로운 도상, 새로운 디자인과 문양을 창조하고 있다. 그가 야심차게 완성한 작품을 일일이 사진으로 남겨놓는 이유도 후학이 참조해 새로운 작품을 창출해 달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반투명 미색의 황소뿔 속에서 호랑이와 학, 꽃과 함께 유영하며 ‘화각삼매’에 빠져 있다. 아쉬운 것은 그의 작품 대부분이 그저 방에만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전시를 끝으로 말이다. 나름대로 종이칼, 필통, 넥타이, 명함집 등의 대중성 있는 화각소품도 제작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판로를 확보하기 어려워 방 한 켠에 쌓여만 있다.

한국 중요무형문화재의 현 주소인 듯싶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주저 않아만 있지 않는다. 그는 “현실은 현실이고 이제 또 일 해야지요”하며 화각불탑 제작을 위해 작업실로 발길을 돌렸다. 누가 의뢰하지도 않은 불탑제작에 매진하는 그의 손길에서 고려, 조선, 근대의 장인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황소 뿔’ 얇게 편 후 그림 새겨
나전칠기와 쌍벽이룬 왕실공예

화각공예란?

화가공예는 고려 초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거북등갑에 호박이나 수정 등을 이용해 뒷면에 진채로 그림을 그려 앞면에 비쳐 보이게 하는 기술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들어와 변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값비싼 호박이나 수정 보다 구하기 쉬었던 쇠뿔을 이용하는 기법으로 발달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화각공예의 시원이다.

소의 뿔을 종이장 같이 얇게 편 후 팔강, 파랑, 노랑, 검정, 희색 등 5가지 색을 기본으로 사군자, 십장생 등 다양한 상징이나 자연물을 그려 넣는데 민화풍인 것이 특징이다. 소뿔 위에 그려진 그림을 장, 궤, 함, 농, 보석함, 경대, 반짇고리, 장도 등의 용품에 부착한 후 옻칠로 마무리 한다.

화각공예는 우리나라만이 유일하게 꽃피운 공예법으로 고려시대의 나전칠기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시대의 왕실공예라 할 수 있다.

화각 공예의 기본 재료인 소뿔은 황소뿔을 주로 사용한다. 뿔의 투명도가 관건인데 암소 보다는 수소의 뿔 투명도가 높다. 이재만 화각장에 따르면 외국 소 보다는 한국 소의 뿔이 우수하며 우리나라의 수소라 하더라도 사료 보다는 풀을 먹고 자란 소의 뿔 투명도가 높다고 한다.

화각공예는 ‘畵閣’, ‘花角’, ‘火角’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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