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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불교계의 임시정부 지원 활동

기자명 법보신문

국경 넘나들며 무장투쟁-군자금 모연 주도

만세시위 주도
중앙학림 학생
임시정부서 활동

독립투쟁 앞장
이종욱 스님 변절
오점으로 남아

<사진설명>김봉률 출옥 사진. 해인사 스님으로 3·1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진주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왼쪽부터 백성원·김종률·임치)

불교계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전국의 큰 사찰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3·1만세 시위는 3월 말 경이 되자 수그러드는 양상을 보였다. 3·1운동의 의의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하여 거족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의 의지를 만천하에 선포하였다는데 있다. 3·1운동은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하였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거족적인 저항은 훗날 연합군이 국제회의 석상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한 가지 큰 의의는 비록 중국 땅이기는 하지만 조선왕조 군주제를 청산하고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공화제 정부가 탄생하였다는 점이다. 비로소 국민들이 국가의 주권을 행사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19년 4월 상해에 성립된 임시정부는 3·1운동 결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는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지도하기 위해서 성립되었다. 불교계는 임시정부 지원활동과 무장투쟁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중순경이 되자 지방으로 만세 시위를 주도하러 내려갔던 불교계의 청년들은 경성으로 돌아왔다. 그 가운데 해인사의 청년 승려였던 김봉률, 박달준 등과 전남 해남 대흥사의 박영희는 만주 봉천성 유하현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김봉률과 박달준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 9월경 해인사로 가서 김장윤, 김경환, 우민수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서 한족회 사판장(司判長) 최명수에게 교부하라고 당부하였다. 이들은 1920년 10월경 문경 김용사와 의성 고운사에서 각각 40엔을, 대봉사와 범어사에서 각각 50엔씩 모집한 혐의로 체포되어 경성 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취조를 받고 공판에 회부되었다.

지방으로 내려가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던 중앙학림의 학생들은 혹 검거되기도 하고, 혹은 귀경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신상완의 집에 모여서 향후의 활동 방안을 모색하였다. 학생들은 4월 하순에 상해에 임시정부가 성립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신상완, 백성욱, 김대용, 김법린 등 4명은 상해로 밀항하였다. 신상완과 백성욱은 임시정부의 국내 특파원 자격으로 불교계의 항일운동을 지도하기 위하여 5월 중순에 귀국하였다. 이들은 귀국 후 김상호, 김상헌, 박민오, 김봉신 등과 『혁신공보』라는 지하신문을 간행하여 해외 소식을 국내에 알렸다. 신상완은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불교계의 원로를 대표로 파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여러 동지들과 협의한 결과 중앙학림 강사를 지냈던 김포광을 대표로 밀파하였다. 신상완은 이종욱·김봉신·백성욱·김법윤 등과 협의한 후 승려들의 단결을 도모할 목적으로 대한승려연합회 명의로 임시의용승군헌제(臨時義勇僧軍憲制)를 만들어 독립투쟁을 전개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임시의용승군헌제는 승려들로 구성된 승군(僧軍) 조직으로 총령부 산하에 비서국·참모국·군무국·군수국·사령국의 체제를 갖추었다. 총령부는 임시정부와 승군간의 연락기관으로서 임시정부 작전계획을 거들어 협의·실행할 것을 규정한 것으로 보아 임시정부 산하조직으로 활동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천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신상완이 일경에 체포되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월정사 출신의 이종욱은 이탁이 중심이 되어 만주에서 결성된 의열단체인 27결사대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27결사대는 을사5적과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고종의 양위를 강요한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임선준, 탁지부대신 고영희, 군부대신 이병무, 법무대신 조중웅, 학부대신 이재곤,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등 이른바 7적을 암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27결사대는 1919년 3월 3일 고종의 국장일에 거사를 계획하고 망우리 고개에서 기다렸으나 역적들의 위치가 순종이 탄 어가(御駕)와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순종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어 거사를 실행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27결사대 대원들은 3월 20일경 독립문의 퇴색된 태극기를 다시 칠하고 성토문과 경고문, 격문 등을 독립문과 종각 기타 여러 곳에 게시하였다. 이들은 5적, 7적의 암살 기회를 엿보다가 5월 5일경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이종욱은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박한영과 함께 불교계의 대표로 한성임시정부의 발족에 참여하였다. 그는 3·1운동 이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내무부 참사로 임정 활동에 참가하였다. 이종욱은 1919년 9월 임시정부 국내 특파원으로 파견되었다. 1919년 5월경에 상해로부터 국내로 돌아온 그는 조용주, 연병호, 송세호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외교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국제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목적으로 성립된 독립운동단체였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구성원들은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종욱, 송세호, 용창은 등은 모두 월정사의 승려였지만 기독교인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처럼 이종욱은 1920년대 초반까지는 항일운동에 투신하였으나 1930년 오대산 월정사 주지로 취임하면서부터 조선총독부 권력과 타협의 노선을 걷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31본산 주지회의 의장직을 맡게 됨으로서 수시로 총독부를 드나들면서 불교계에 총독부의 시책을 수행하는데 앞장섰다. 1940년 우리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이 시작되자 히로다 쇼이쿠(廣田鍾郁)이라고 개명하고 여러 편의 친일 논설을 발표하였다.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이 성립되자 지금의 총무원장에 해당하는 종무총장직을 수행하면서 전쟁터로 위문단을 파견하고, 국방헌금을 모으고, 금속류를 헌납하고, 전투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행위를 하였다. 해방 이후 혁신세력에 의해 3년간 승권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곧 이어 강원도 평창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약하였고, 동국대학교 이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건봉사 출신의 정남용은 이종욱, 송세호 등과 함께 1919년 3월말 경에 결성되었던 대동단에 깊이 관여하였다. 대동단은 전협, 최익환, 정남용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의 독립쟁취를 목적으로 결성된 의열단체였다. 전협은 1919년 4월 김가진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동년 10월에 이종욱을 통하여 김가진과 그의 아들 의한을 상해로 탈출시켰다. 전협은 김가진, 정남용, 이재호, 한기동, 동창률, 나창헌, 김중옥 등과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탈출시켜, 이강을 수령으로 하여 제2의 조선독립선언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이강이 상해로 가던 도중에 중국 안동에서 일경에게 적발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정남용은 징역 5년, 송세호는 징역 3년 형을 언도 받았으며, 이종욱은 검거를 모면하였다.

<사진설명>신상완·김법린·김상호·박민오·김상헌 등이 간행해 독립운동 상황을 국내에 전한 지하신문 혁신공보.

불교계는 군자금 모집에도 참가하였다. 1919년 10월 무렵 김상호, 김상헌, 김석두 등은 범어사의 원로였던 이담해, 오성월, 김경산 그리고 중견이었던 오리산 등과 협의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모아서 김상호가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담해, 오성월, 김경산 세 원로를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김상호는 세 승려의 임시정부 고문 추대장을 가지고 돌아와 국내 불교계 비밀 통신사무를 담당하였다. 이 밖에도 1919년 3·1운동 당시 통도사 주지를 지냈던 김구하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1만 3천 엔을 보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실은 해방 이후 1952년 8월 17일자로 통도사 사중(寺中)에 제출한 진정서에 나타나 있다. 그가 제출한 독립운동 자금은 사내 대중들과 협의를 거친 것이 아니고 독단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김구하가 사찰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한데 대하여 당시 통도사의 회계를 맡았던 김혜경이 일경에게 밀고를 하자 그는 이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하고 사찰공금 1만 3천원을 메우기 위하여 개인 소유의 전답 6천 5백평을 팔아서 충당하였다고 한다. 진정서에는 이 자금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임시정부에 전달되었는지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안창호가 보낸 밀사에게 5천엔, 백초월에게 2천엔, 이종욱에게 3천엔, 정인섭에게 1천엔, 오리산이 상해에 갈 때 5백엔, 장재륜에게 5백엔, 신정흔에게 5백엔, 김포광이 상해 갈 때 3백엔, 정탁에게 1백엔, 양만우에게 1백엔 등 모두 1만 3천엔이라고 한다. 그러나 통도사의 대중 승려들은 그가 주지로 재임한 10년 동안 약 1만 엔을 횡령하였다고 총독부에 주지인가 취소 신청을 하였고, 결국 김구하는 주지직에서 축출 당하였다. 불교계 인사들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독립군으로 무장투쟁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는 후일 변절하여 친일행각을 함으로써 오점을 남긴 사람도 있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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