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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인천불교회관 주지 일 지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下心 하나로
불국토 초석 일군
인천의 부루나 존자

‘어디 등 비빌 작은 언덕이라도 있다면….’ 그랬다. 불자들 기억 속 인천은 절망 그 자체였다. 종교인구 40% 이상이 불자라는 통계에도 인천은 유별났다. 항상 10%안팎이었다. 만(卍)자 대신 붉은 십자가가 날마다 숫자를 더하고, 불교라면 점이나 부적을 먼저 떠올리는 도시. 불자들에게 인천은 풀 한포기 자랄 수 없는 불모지, 어쩌면 사막 그 자체였다.

그런 그곳에 몇 해 전부터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막에 내리는 비처럼, 또는 신기루 끝에 찾아 낸 오아시스처럼, 메마른 땅이 불법이라는 감로수에 조금씩 젖기 시작한 것이다.

인천불교회관 주지 일지 스님. 햇볕 한줌 들지 않던 각박한 인천에 한 가닥 빗줄기로 포교의 씨앗을 뿌린 스님이다. 절망을 희망으로, 좌절을 열망으로 돌려 세운 인천 불교의 구심점. 어쩌면 인천불교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 부처님이 보내신 부루나 존자의 후신인지도 모를 일이다.

일지 스님은 지난 2004년 인천의 도심 한복판에 4층 규모의 초현대식 포교당 인천불교회관을 건립했다. 인천에 전법도량의 구심점을 마련한 것이다. 20억 원이 넘는 재원을 혼자서 감당하다 몇 해를 골조만 세운 채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고, 더딘 불사에 믿었던 사람들마저 등을 돌려 바랑을 꾸리기도 수십 번. 그러나 수로나국 사람들의 포악함에도 전법을 포기하지 않았던 부루나 존자처럼, 스님은 시련 속에서도 인천을 버리지 않았고 그 결과 인천불교회관이라는 장대한 결실을 거둔 것이다.

“덕도 없고 수행력도 높지 않은데 부끄럽습니다. 늘 말씀 드리지만 제 이야기가 불자님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괜한 걸음을 하신 것은 아닌지….”

인천불교회관에서 만난 스님에게서 맑은 하심(下心)이 묻어났다. 진심을 담아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스님의 모습에 절로 고개를 숙였다. 오늘날 인천불교회관의 포교성공 신화는 스님의 끝 모를 겸양과 낮춤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스님은 말끝마다 “출가를 했으면 도인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정진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해 부끄럽다”고 했다. 스님이면 마음의 깊이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작은 도량 하나 마련한 것으로 분에 넘치는 관심을 받고 있으니 이 점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일류 포교사로 평가받고 있는 스님의 겸양이라 듣는 귀가 부끄러웠다.

맨손으로 불교회관 건립

인천불교회관 창건 3년 만에 1500여명의 불자들이 이곳을 구심점으로 활동하고 있고, 불교대학을 통해 매년 100~150여명의 정예 불자들이 배출되고 있다. 또 서너 대의 버스를 이용, 인천 지역 곳곳을 누비며 어린이들을 실어 나른 결과 이제 법당은 100여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쏟아내는 활기로 놀이터가 된지 오래다. 최근에는 파라미타 인천지역 총재라는 책임까지 마다않고 청소년 포교에 일로매진하고 있다. 포교를 위해서라면 은산철벽이라도 뚫고 가겠다는 스님의 열정이 진득이도 묻어난다.

“인천불교회관의 주변 입지를 볼 때마다 감탄을 하곤 합니다.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고서는 이런 장소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처음 부지를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은 허허벌판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경찰청에, 예술회관에, 터미널에, 백화점까지 들어서고, 한 정거장만 가면 시청입니다. 도심 포교당으로 이보다 좋은 장소가 있을까요. 가끔 4층 법당에서 도심 주변을 둘러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참고 견디고 인욕하니 이런 좋은 날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하지요.”

전남 강진의 옥련사로 출가한 스님은 도반의 소개로 인천 중구의 능인사에 자리를 틀면서 인천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얼떨결에 접한 인천은 허약한 교세만큼이나 부처님의 가르침과 한참은 어긋나 있었다. 불교라고 하면 점이나 부적을 먼저 떠올리고, 신도들로부터 이삿날이나 잡아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면 야속한 마음에 말문이 막히고 가슴까지 먹먹해 왔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교대학 강의를 그래서 시작했지요. 간단한 교리는 제가 가르쳤지만, 학문적인 분야는 어려운 살림에도 꼭 교수님과 박사님들을 초빙해 강의를 맡겼어요. 수준 높은 강의로 불교의 골수를 전하고자 하는 욕심이 앞섰던 겁니다. 매년 100여명의 불자들을 배출했는데 3년 후 능인사에서 부평에 있는 마하연포교당으로 옮기면서도 강의만큼은 쉬지 않았어요. 한 10년을 그렇게 하고 나니, 불교에 대한 지역 내 인식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더라구요.”

시련도 적지 않았다. 목탁 소리가 시끄럽다는 민원에 고통을 겪기도 했고, 임대를 살았던 마하연포교당의 건물주가 타종교인인 관계로 갖가지 시비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스님은 굴하지 않았다. 꾸준히 불교대학을 운영하며 인천불교의 변화를 위한 씨앗들을 배양했고, 이런 노력의 결과로 지난 2001년 조계종과 인천지역 스님들로부터 인천불교회관 건립을 요청받게 됐다. 부지는 조계종 총무원과 인천불교사암련에서 마련했다. 그러나 20억 원이 넘는 건축비는 온전히 스님의 몫이었다.

“교세가 약한 지역인 인천에 전법도량을 건립한다는 취지였어요. 그런데 제가 덜컥 불사 소임을 맡게 된 것입니다. 처음엔 막막했지요. 그래도 부처님의 일이니까, 중간에 걸망을 지고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씨앗만큼은 뿌려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지요. 제가 기둥을 세우면 누군가 지붕은 덮겠지 하는 심정이었어요.”

“예불 개근이 유일한 포교비결”

그러나 인천불교회관 불사는 신산(辛酸)의 연속이었다. 재원을 마련하지 못해 골조만 세운 채 2년 동안을 눈물로 지새워야 했다. 공사 착공이 늦다며 벌금까지 물어 피 같은 정재를 고스란히 날리기도 했다. 불사가 늦으니 모연에 참여했던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사기도 하고, 때로는 적지 않은 항의도 받아야 했다. 상의할 사람도, 하소연할 사람도 없었다. 오로지 홀로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이었다. 스님은 마하연포교당 신도들과 모연을 위해 거리를 누볐고, 불사를 위해서라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루는 포교원장 도영 스님이 오셨어요.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더니, 그러시더군요. 너무 무거우면 내려놓으라고. 무거우면 쓰러지니까. 차라리 내려놓으라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말씀드렸지요. 약속한 3년이 안 지났으니,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보겠노라고. 도영 스님께서 안쓰럽게 저를 보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그러나 더 큰 고통은 믿고 의지했던 마하연포교당 신도들과의 불협화음이었다. 항상 큰 힘이 돼 주던 거사회가 만장일치로 불사를 반대한 것이다. 인천불교회관이 공찰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사설사암 대신 운영권을 보장받지도 못할 공찰을 짓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후 반대 성명서가 발표되는 등 불사를 둘러싼 소음은 날로 커져갔다. 마하연포교당의 살림을 신도 중심의 열린 행정으로 꾸리다보니 생긴 필연적인 결과였다.

“설득을 했지요. 사설이든 공찰이든 다 조계종 재산이라고. 왜 그렇게 좁게만 생각하느냐고. 그래도 이견이 좁혀지지 않더라구요. 마음을 많이 다쳤어요. 끝이 좋아 다행히 모든 오해가 풀렸지만 당시에는 야속한 생각이 없지 않았지요.”

시련이 커질수록 기도에 매달렸다. 오로지 기도를 통해 부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아침과 사시 예불은 마하연포교당에서 모셨고, 인천불교회관 터에 마련된 컨테이너 법당에서 홀로 저녁 예불을 했다. 한 여름 컨테이너 박스 안은 그야말로 찜통. 그러나 말없이 견뎠다. 결국 꼬박 3년의 인고 끝에 2004년 6월 인천불교회관은 역사적인 완공과 함께 인천 지역을 대표하는 전법도량으로 나래를 펼 수 있었다.

“포교 비결을 물어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별다른 포교 노하우가 없어요. 예불을 빠지지 않는 정도입니다. 어쩔 수 없이 절을 비워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침, 사시, 저녁 예불은 제가 꼭 챙깁니다. 굳이 말하자면 절을 잘 지킨다고나 할까요. 다른 재주가 없으니, 절 지키는 것이라도 잘 해야지 하는 것이지, 다른 건 없어요. 제가 염불과 기도는 조금 자신이 있거든요.”

스님은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덕분에 신도들도 불우이웃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다. 인천의 동구복지관을 비롯해, 둥지청소년의 집, 노인요양원 자재정사로 꾸준히 봉사활동을 나가면서 지역 내 평판이 날로 좋아지고 있다. 능력이 되면 자체적으로 노인요양원을 꾸려 오갈 곳 없는 노인들을 모실 생각이다.

그러나 도량이 자리를 잡자 시기질투도 적지 않았다. 비구니의 몸으로 큰 소임을 맡다보니 자리마저 흔들린다는 이야기들도 주변에 심심찮게 들린다. 도고마성(道高魔盛). 도가 높아지면 덩달아 마도 극성스러워지는 법이다.

보는 바가 없으면 분별 사라지고
듣지 않으면 절로 시비 끊어지네
분별, 시비를 모두 버리고
마음 속 부처님 찾아 귀의하리라
 -부설거사 열반송

우려스러운 주변 풍문에 대한 심정을 묻자 스님은 부설거사의 열반송을 나지막히 들려주었다. 시시비비를 놓아 버리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겠다는 일종의 선답(禪答)이다. 산티데바의 『입보리행론』의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고민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불행을 느낄 이유가 있겠는가. 고민해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불행을 느껴 무엇하리.” 분별을 놓아 버리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라는 성현의 가르침이다. 일지 스님의 허허로운 마음에 머리가 가벼워졌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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