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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의 장인]④ 은대공장 백 용 식

기자명 법보신문

7평 남짓 공방서 사리함 복원하며 중도-조화 체득

10대 견습공 입사
은공예 첫 인연
이재호 문하서 본격 탁마
1000년 은공 맥 이어가

한국기업-팔레비 국왕도
세련-신선미에 찬사
전통-현대미 깃든 불구 창작
사리함 등 원형복원에도 심혈

<사진설명>백용식 은대공장은 지금도 기계를 마다하고 망치로 두들겨 원형을 잡아간다.

1996년 경상북도 월성군에 있는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 중 동쪽 석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발견된 사리장치. 외함, 사리기(내함), 사리병으로 구성된 이 사리장치(보물 제1359호)는 신라 ‘불교예술의 백미’라 평가될 정도로 은공예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외함 사벽면에는 사리를 수호하는 사천왕상과 상서로운 구름무늬를 새겼고 귀면 장식을 한 고리도 달려 있다. 압출기법으로 표현된 사천왕상은 당장이라도 튀어 나와 세간을 향해 불호령을 내릴 것만 같다.

사리를 안치한 사리기(내함)는 기단부, 신부, 천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단부 네 모서리에는 사자가 조각돼 있으며 기단면에는 안상을 크게 투조했고, 투조된 내부에는 신장상과 공양보살상이 각각 양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기단 상단부인 신부는 사리를 안치한 복발형 용기를 중심으로 사천왕과 승상이 각 네 구씩 따로 배치되어 있다. 또한 외곽으로는 난간을 돌리고 네 귀에 각각 죽절형 기둥을 세워 천개를 여법하게 떠받치고 있다.

수정제 사리병의 높이는 3.65cm, 누금기법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뚜껑과 받침, 그리고 원판 수정제 받침, 금동제 투조 받침 등이 세트를 이루고 있다. ‘누금’이란 순금으로 만든 장신구 표면에 가느다란 금선과 금입자를 금이 녹는 온도인 1,063도의 열을 가해 아무런 흔적 없이 녹여 붙여 모양을 내는 기법을 말한다.

2005년 2월. 은공대장 백용식(57세) 씨는 이 ‘감은사지 사리장치’를 재현해 보자는 원력을 세웠다.

“신라의 아름다움을 오늘날 재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내 기술로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도전도 해보지 않는다면 옛 선인의 손길조차 느껴보지 못한다 생각하니 용기가 나더군요.”

<사진설명>백용식 은대공장이 재현한 감은사지 사리장치. 사리가 안치되는 내함.

힘든 도전이었다. 실물을 옆에 두고도 재현하기란 어려운 일인데 논문과 사진 등의 자료만을 토대로 1000여 년 전의 예술품을 재현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작품도 아닌 불교, 그것도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던 사리장치가 아니던가! 불자로서, 장인으로서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그의 작업은 1년1개월이 지속돼 지난 2006년 3월 재현에 성공 ‘불교박람회’에 출품했다.

그의 은공 일은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출생인 그는 일곱 살 때 부친이 별세함에 따라 모친과 함께 유년기를 보낸 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상급학교를 포기하고 서울 충무로에 있는 정공사에 견습공으로 입사, 은대공 분야에 입문했다.

“1남1녀 중 장남이었던 저는 기술이라도 배워야 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정공사 직원이 15명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입사해서인지 선배들로부터 많은 귀여움을 받으며 공부했지요.”

차 세트, 주전자 등의 부속품 다루는 법이 고작이었지만 그는 ‘멋진 은공장이 되겠다’는 희망으로 일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는 곧 퇴사해야만 했다. 작업 중 꼭두망치에 자신의 손가락이 크게 다쳤기 때문이다.

<사진설명>내함을 덮는 외함.

“손가락을 다친 순간 다시 한 번 저의 인생을 생각해 보았지요.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어쩌면 일하기 싫어 그런 마음을 낸 것인지도 모르지요. 하하하하….”

그러나 그의 학업도 길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상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고등학교 중퇴 후 잡일을 하던 중 은방에 다니며 조각일을 하던 지인의 권유로 23세 때 서울 종로의 ‘태리 공예사’견습공으로 입사했다. 그의 은공예 인연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당시 태리 공예사는 고(故)이학응 옹(중요무형문화재)의 아들 이재호 씨와 태산호 씨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명품 금은방이었다. 그는 이 곳에서 물 뿌리(주전자 꼭지), 차 도구 등의 용접 등의 기초 작업부터 조각과 은 녹이는 법, 광 내는 법 등 대공과 은세공에 이르기까지의 섬세한 기법을 연마했다. 이재호 은공장이 그의 스승인 것이다.

1979년 29세 청년 백용식은 자신의 기술에 자신감을 갖고 남산 회현동에 자신의 첫 개인공방을 열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도 정밀화된 기계를 마다하고 일일이 망치로 은을 두들겨가며 늘려서 작품 원형을 만들어내고 있다. 금속표면에 홈을 파고 은을 박아 넣는 상감 기법. 금속표면을 정으로 쪼아 거칠게 하고 여기에 은을 붙이고, 다시 정으로 쪼아 문양을 만들고 이외의 부분은 벗겨지도록 하는 은입사 기법까지도 손수 다 해내고 있다.

<사진설명>백용식 은대공장이 현대감각과 전통미를 조화시켜 선보인 사리장치.

그의 작품은 1986년부터 세간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현대, 삼성, 코오롱 등 수많은 기업체와 관공서가 그의 작품을 찾았으며 이란의 팔레비 국왕 전용 선박에서 사용할 은 양식기도 제작한 바 있다.

1994년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96 우리공예 한마당 큰잔치’에서 대상과 국회 문화체육 공보위원장 상을 받기도 했다. 수많은 상을 받았지만 그는 “상을 받으면 명성도 따라오니 무엇인가 해 낸 것 같지만 여기에 집착하면 자만에 빠지고 만다”고 강조한다.

“옛 선인들의 솜씨를 보세요. 정말 치밀하면서도 여유가 보입니다. 큰 것과 작은 것의 조화, 치밀함과 여백의 조화,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결정판을 선인들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은사지 사리장치만 보아도 외함에서 보여주는 사천왕의 힘과 내부 사리기의 부드러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이 배워야 할 것은 당시의 기법이 아니라 이러한 치우침 없는 중도의 정신일 것입니다.”

금·은·동을 조각하는 기예가 우리 전승문화 속에서 생생하게 숨쉬고 있지만 현대기물을 만드는 금속공예가 발달되면서 전통 공예기법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인 오늘 날, 그의 이러한 메시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감은사지 사리장치’재현에 왜 도전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진설명>7평 남짓한 서울 인사동 영주공방 작업실.

그는 앞으로 불교계에서 보존되고 있는 사리함 원형 복원을 비롯해 다양한 불구 제작에 심혈을 기울일 계획이다.

“물론 식생활용품 등 대중들이 선호할 수 있는 작품도 내놓겠지만 무엇보다 사리함과 같은 불구 원형 복원에 매진해 볼 생각입니다. 전통미감 토대에 현대 감각을 투영한 다양한 창작 불구 작품에도 노력할 것입니다.”

그는 2004년 서울 인사동에 ‘영주공방’(02-734-0668)을 마련, 자신의 작품을 전시, 세상 사람들에게 전통 은공예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부인 유경순 씨는 기물에 칠보를 접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뉴질랜드 미술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귀국한 차녀 백서현 씨도 그의 뒤를 이어 세공과 디자인 분야에 정진하고 있다.

영주공방 2층에는 그의 7평 남짓한 작업실이 있다. 각종 기구들이 들어차 있어 그는 1평 남짓한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켜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그는 이 작은 공방에서 천년의 손길을 이어가고 있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사리-보석함 조성 ‘은대공’
비녀-노리개 제작 ‘은세공’

은대공장이란

금이나 은을 주원료로 해 각종 기물을 만드는 사람을 은장 또는 은공장이라 한다.
우리나라 경우 청동기시대부터 금속공예가 발달했는데 거울이나, 검도, 방울, 의기 등을 만들었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며 신라시대의 공장 제도를 이어 관공장을 두었는데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공로서, 중상서에서는 어용 장식기구 제작을 맡았고 장야서에서는 금속 세공 분야인 은장, 화장, 백동장 등을 주관했다.

조선시대에는 관공장 형태로 관아가 주체였으나 후기에는 사공장 형태로 바뀌었다.

관공장이란 서울에 경공장을 두어 왕실이나 귀족 관아의 수공업적 수요품을 제작했고 외공장에서는 지방 병영과 주, 군, 현에 소속되었는데 경공장엔 2,841면의 공인이, 외공장엔 4,461명이 27분과로 나눠 작업 했다.

사리함이나 보석상자, 신선로 등의 식생활 용기 등은 대공에 속하며, 비녀, 노리개. 가락지 등은 세공에 속한다.

백용식 씨는 대공과 세공을 모두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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