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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소리 내어 읽게 만든 ‘꽃신’

기자명 법보신문

『꽃신』
김용익/돋을새김

나는 책을 읽을 때 소리를 내어 읽기를 좋아합니다. 눈으로만 읽어 내려가면 도대체가 건건하니 맛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끌고 있는 불서읽기 모임도 이렇게 한 사람씩 소리 내어 책을 읽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조용한 저녁 시간, 방안에 적막이 감도는 가운데 남자의 혹은 여자의 은은한 책 읽는 소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력으로 나를 유혹합니다.

내게 이런 습관이 붙은 것은 오래 전 김용익씨의 『꽃신』을 읽었을 때가 그 시작입니다.

주인공 상도는 백정의 아들입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웃에는 상도네에게서 소가죽을 받아다 꽃신을 만들어 생계를 잇는 꽃신쟁이집이 있었습니다. 소를 잡는, 천하기 그지없는 백정 신분이었지만 상도의 마음속에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세상의 모든 악과 추함에서 훌쩍 벗어나 허공에서 아슴하게 빛을 내는 꽃신집 딸이 자그맣게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가난하여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혼례 날 꽃신 하나는 장만할 줄 아는 멋이 있던 시절에는 마음도 푸근하였던 꽃신쟁이. 하지만 사람들의 인심은 달라져 갔습니다.

“우린 풋고추 시절에는 꽃신 없이 혼인 못할 거로 알았지. 우리 보다 자식놈들이 더 똑똑하다 생각지 않소? 그놈들은 돈 먹는 꽃신보다 고기를 사라하니.”

세상의 인심이 백정집에 돈을 벌어주면서 꽃신쟁이집 외동딸은 결국 남의 집 부엌아이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상도는 그 아련한 이별의 슬픔을 달래며 어느 날 딸을 달라고 꽃신쟁이집 부인에에게 청을 넣습니다만 세상의 각박한 변화에 가슴이 조각난 꽃신쟁이 아비로부터 모진 멸시의 대꾸만을 듣고야 맙니다.

『꽃신』은 아주 짧은 단편입니다. 단편의 아쉬움을 달래려고 무심코 책의 뒷부분을 열었을 때 그곳에는 『책을 쓰는 모험』이라는 작가노트가 실려 있었습니다. 작가 김용익씨가 미국으로 건너가 영어와 친해지는 과정을 참 소박하게 기록한 내용이었습니다. 켄터키 대학 도서관에서 한 시간에 50센트씩을 받으며 가죽 장정본 커버에 왁스칠을 하면서 영시를 외던 일, 아르바이트생들이 일하는 시간에 책을 읽지 못하도록 감시해야할 도서관 부관장이 가난한 동양학생이 영시를 낭송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두 손에 묻힌 왁스 때문에 책장을 넘기지 못하자 조용히 다가와 페이지를 넘겨주었다는 이야기, 헤아릴 수 없이 원고를 써서 보냈지만 반송원고만 받느라 소심해지고, 절망에 사로잡혀 주머니를 툭 털어 축음기를 사서 비발디의 『사계』를 반복해서 들었다는 이야기, 막연하게 창밖에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다 우연히 환상처럼 떠오르는 꽃신을 하염없이 따라가게 된 이야기, 돈이 없어 고기 두 조각만 사려는데 무뚝뚝한 표정으로 2달러 어치의 고기를 싸주며 20센트를 받곤 하던 정육점 남자 이야기가 그 작가 노트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영시를 외웠다던 작가를 흉내 내어 다시 한 번 『꽃신』을 펼쳐들고 낮은 소리를 내어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아... 말과 글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내 음성을 통해 활자는 흰 비단을 밟으며 옆집 상도에게 걸어가는 꽃신처럼 가슴에 아련하게 새겨졌습니다. 글이란 것은 사람의 입으로 발성이 되어 공간으로 퍼져가야 향기를 머금고 힘이 생기고 울림을 안겨준다는 것을 그때 느꼈습니다.

『꽃신』을 읽으실 때는 모쪼록 나지막하게 소리 내어 천천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루 일을 마치고 뉘엿뉘엿 해가 저무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면 더 좋을 것만 같습니다.
 
동국대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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