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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회광의 제2차 조일불교 연합시도

기자명 법보신문

끊임없는 왜색 책동…불교계 개혁 후폭풍 이어져

강대련에 30본산 위원장 내준 후 반전카드로 활용
동경유학생 반발…조선불교청년회 탄생 계기 마련

<사진설명>이회광이 일본 승복 하오리 하까마를 입은 모습.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였던 거족적인 항일운동이었던 3·1운동이 수그러든 1920년에 들어서 불교계는 해인사 주지였던 이회광이 1910년에 이어 또다시 조선불교계를 일본 불교 임제종과 연합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불교계는 또 한 번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왜 이화광은 이렇게 무모한 발상을 하게 되었을까. 그 배경은 1920년 초에 수원 용주사 주지였던 강대련이 30본산연합사무소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이회광과 강대련 사이의 갈등이 하나의 원인이었다. 이회광은 당대 최고의 강백으로 추앙되고 있었고, 1908년에 성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종단이었던 원종의 종정으로 추대될 만큼 신망이 두터운 승려였다. 일제시대에 들어와서도 사찰령 체제 이후 1912년에 출범한 30본산주지회의원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런데 1915년 30본산주지회의원이 30본산연합사무소 체제로 개편되고 초대 위원장 경선에서 이회광은 강대련에게 압도적인 표차로 패배하게 된다. 교계 최고 지도자 자리를 강대련에게 내어준 이회광은 설욕의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일본 불교 임제종 묘심사파의 출장소 주임이었던 고토 쯔이강(後藤瑞岩)과 몇 차례 만나면서 고토로부터 자기는 조선말을 몰라서 조선 사람에게 설법을 할 수 없으니 대신 설법을 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이후 두 사람은 잦은 만남을 가졌다.

이회광은 조선의 인정과 풍속을 알기에는 조선 승려가 적임이지만 포교방법은 일본이 좋으므로 포교는 조선 사람이 하되 방법은 일본 방법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원래 조선 승려는 임제종 태고파의 문손인 만큼 조선불교를 개혁하자면 종명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회광이 일본 불교 임제종과 연합을 하려는 논리는 이렇다. 일본 사람과 제휴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 국가나 민족의 관념으로 사상을 판단하는 것은 정치가의 좁은 소견이고, 도덕가는 국가나 민족의 관념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이회광은 본격적으로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 임제종 묘심사파와 연합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는 5월 2일 대원사 주지 조영태와 청암사 주지 김대운, 실상사 주지 진창수 등과 함께 동경으로 건너가서 총리대신과 체신대신을 만나 조선불교계의 형편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마침 동경에 와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을 만나서 조선에는 지금 여러 가지 종(宗)이 있으나 선교양종은 몇 천 년 전 신라나 고려 때에 적합하였지 현재 조선에 적합하지 못하다. 조선시대 이후로는 임제종이 조선불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임제종과 연합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하였으나 확답을 얻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이회광의 이러한 책동은 1920년 6월 4일자 교토(京都)에서 발행되는 『중외일보』에 보도되었다. 보도 요지는 조선의 유명한 사찰 해인사의 주지인 이회광이 동경으로 건너와 정계의 주요 대신들을 만나고, 교토의 임제종 묘심사 본사에 들러 하룻밤을 묵으면서 조선불교와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와 연합을 논의하였다는 것이다.

귀국한 이회광은 경상남북도의 고운사·김용사·은해사·동화사·기림사·통도사·범어사·해인사 등 8개 본사 주지들을 대구로 불러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일본 총리대신과 체신대신을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전했다. 조선 불교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종명을 개칭하여, 종무원을 설립하고 사찰재산을 정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어서 30본산에 통문을 보내어 종명 개정신청서와 이유서에 연명해 가지고 총독부에 제출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회광은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경운궁 내의 토지 7000평을 27만 5천원에 매입하려고 하였다.

각 사찰에서는 이회광이 발송한 공문을 받아 보고 이 사실에 대하여 30본산연합사무소위원장 강대련에게 문의하였다. 일본의 주요 대신들과 조선총독과 사전 협의를 거치고 진행하는 이회광의 이러한 책동에 위기감을 느낀 강대련은 총독부에 들어가서 종교과장 나카라이 기요시(半井淸)를 만났다. 그는 “이회광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중앙정부와 교섭하여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 임제종 묘심사파에 부속시키기로 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각 사찰의 승려들이 동요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물었다. 종교과장은 “조선 사찰 문제는 사찰령에 의하여 조선총독이 결정할 것이니까 아무리 각 대신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여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강대련은 이회광의 일본 방문 사실이 보도된 『중외일보』 기사를 번역하여 조선의 각 사찰에 돌렸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이회광 측은 강대련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하였다. 고소의 당사자는 이회광이 아니고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던 경남 산청군 대원사 주기 조영태와 경북 금천군 청암사 주지 김대운이었다. 이회광은 이들이 강대련을 고소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종교가가 교계 내부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법정에까지 가는 것은 창피하니까 취하할 것을 권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워낙 분개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므로 무조건 말리는 것만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당시 언론에서는 강대련 일파도 응소하려 한다는 사실과 함께 종교가가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형사법정에 고소를 한 것은 불교가 전래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논평하였다.

<사진설명>이회광의 조일불교 연합책동이 불교계의 반대에 부딪혀 고립되었음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사진제공=민족사.

강대련이 이회광의 연합책동에 대한 반박 사유는 이러하다.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와 연합하는 것은 중대 사안이므로 30본산 주지들의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일은 30본산연합사무소위원장인 자신이 교계의 의견을 종합하여 처리할 일이지 이회광이 개인 자격으로 운위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강대련은 이회광이 조선불교계에 야심을 가지고 일본에 들어가서 운동을 하였으나 조선에는 사찰령이 있으므로 염려할 것이 없으며 종명 개칭 신청서에는 도장을 찍을 필요가 없다는 공문을 전국 사찰에 발송하였다.

연합책동에 대한 반대 의견이 들끓자 이회광의 의견에 동조하였던 경상남북도 8본사도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창립을 서두르고 있던 불교청년회는 맹렬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여 이회광에게 『중외일보』의 기사를 철회하라고 요구하였다.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던 불교청년 학생들은 이회광의 경솔한 행동에 대하여 동년 6월 20일자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유학생들은 교토에 있는 임제종 대학과 중학에 재학하던 20여 명에게 동맹 퇴학 권고문을 발송하여 다른 학교로 전학하게 하고자 하였다. 조선의 불교가 경솔한 몇 사람에 의하여 멸망의 화를 입게 됨을 앉아서 볼 수는 없으며, 만여 명의 조선 승려는 한 사람도 저들의 망동을 인정치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아울러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에도 조선에 있는 1,500여 처의 사원과 10,000여명의 승려는 한 사람도 이 사실을 즐겨할 자가 없다. 그러니 저들 무리들의 망령된 의견을 듣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언론에서도 『중외일보』의 기사를 번역하여 소개하는 등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이 사건을 연일 대서 특필하였다. 언론의 입장은 이 사건을 강대련과 이회광의 세력 다툼으로 보도하면서도 단순히 불교계의 내분으로 치부하기 보다는 자주성을 회복할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본류라고 한다면 일본은 지류라고 할 수 있다. 지류가 본류에 합쳐질 수는 있어도 본류가 지류에 합쳐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1910년 일본 조동종과 연합책동을 벌였다가 성공하지 못한 이회광은 이후 방법을 바꾸어서 다시 시도하였다. 그는 종교의 보편성만 알았지 제국주의의 본질이 식민지의 인력과 자원의 수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조선인들이 식민통치로 고통 받고 있는 상황에서 위안과 희망을 주어야할 종교가 자주적인 발전을 지향하지 못하고 일본 종파의 힘을 빌려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생각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조선불교의 포교방식이 낙후되어 있었다면 발전된 방법을 배워서 해결할 일이었다. 그는 연합이라는 예속의 길을 택함으로써 빚어질 여러 가지 폐단을 고려하지 못하였다.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 특정종파와 연합시키는 것과 같이 중대한 일을 특정인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더구나 교섭의 대상이 임제종의 책임자도 아닌 일개 포교사였다는 점에서 연합책동은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이회광은 1912년 30본산연합사무소 초대 원장을 지냈지만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30본산연합사무소위원장이 된 강대련에 비해서 입지가 약화되었다. 이 사건은 이회광이 자신의 세력만회를 위하여 벌인 무모한 책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렇게 혼탁한 불교계에 개혁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 위하여 1920년 초에 조선불교청년회가 탄생하게 된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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