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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무학자초 대사

기자명 법보신문

정권이 무너져 천하가 산다면 그 길을 가리라

마지막 왕사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 대사는 조선왕조 탄생의 산파역을 담당했고 조선의 도읍이 한양이 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고승이다.

풍수와 도참으로 온갖 전설과 신비의 대상이 된 무학대사. 역사서에 따르면 그는 1327년 경남 합천군 삼기면이 고향으로 어려서부터 천재로 일컬어졌다. 네 살 때 천자문을 배웠고 다음해에 효경, 사략, 당시(唐詩) 등을 익혔다. 특히 여섯 살 때 사서를 공부했다는 대사는 그 무렵 소나무를 보고 “푸른 수염은 대장부의 기상이요, 붉은 갑옷은 장군의 몸”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대사는 18세 때 홀연 송광사로 출가해 소지선사 문하에서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사는 용문산 혜명국사 등 고승을 참방하며 공부의 깊이를 더해갔고 부도암에서 능엄경을 보다가 크게 깨우친 바가 있었다. 그 때부터 대사는진주 길상사, 묘향산 금강굴 등에 머물며 불립문자의 깊은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1353년 원나라 연경에 가서 지공 선사를 만나 도를 인정받은 대사는 중국 대륙을 유람하던 가운데 그곳에서 평생의 스승인 나옹 선사를 만나게 된다.

“서로 안다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다 해도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너와 나는 이제 한 집안이다”라며 나옹 선사는 무학 대사의 그릇을 단박에 알아보고 법을 전하는 표시로 불자(拂子)를 건네주었다.

1356년 고려로 돌아온 무학대사는 산천을 주유했고 나옹 선사는 그런 대사에게 의발을 전해주었다. 대사의 법과 인품은 주머니 속의 송곳이 드러나듯 널리 퍼져나갔고, 고려 공양왕은 대사를 왕사로 삼고자 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사는 불세출의 영웅 이성계를 도와 개국의 등불을 환히 밝혔고, 그런 대사에게 이성계는 왕위에 등극하자마자 대사를 왕사로 책봉했고 묘엄존자라는 호를 수여했다.
대사는 법으로서 임금을 교화하고 억불의 흐름 속에서 불교의 위상을 높이려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가운데 1405년 도선의 후예라 일컬어지던 대사는 78세, 법랍 62세로 금강산 금강암에서 열반에 들었다.

▷무학(無學)이라는 법호에 대해 어떤 이들은 어릴 때 이름으로, 또 어떤 이들은 ‘무식하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모든 번뇌를 여의고 생사의 이치를 꿰뚫는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배우리오.”

▷스님의 어머니께서 냇가에서 참외를 먹고 잉태했고, 태어나 바로 버려졌을 때에는 학들이 스님을 감싸 보호했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믿고 싶은 마음이 얘기를 만든 거 아니겠소.”

▷그래도 신비와 전설의 주인공이 되면 좋지 않겠습니까?
“진리에 이르면 석가와 미륵, 문수와 보현을 비롯해 천만 성인, 천하의 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데 남의 얘기나 하고 있다면 한심한 일 아니겠소. 주인공으로 살면 기왓장에서도 빛이 나지만 노예로 살다보면 진짜 금도 빛을 잃게 되오.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어리석음이 바로 그 아니겠느냐는 말이오.”

▷스님과 관련해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태조의 꿈을 해몽해 그 분이 임금이 될 것을 예견했다거나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 대궐을 짓고, 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한 여러 왕들의 왕릉을 점지한 얘기 등 말입니다. 그런데 설화에서는 주로 스님께서 정도전에게 당하거나 밭 갈던 노인보다도 풍수를 모르는 것처럼 나옵니다. 이런 평가절하에 대해 서운하신 점이 있겠습니다.
“나도 대략 들어 알고 있소. 풍수와 점술이 민중들이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고 그 프리즘으로 나를 바라보고자 하니 점술가·풍수가로서 비춰질 수밖에. 용의 눈으로 보면 용이요,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부처이니 말이오. 허나 그렇더라도 나에 대한 민중들의 독특한 관심과 애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소. 더욱이 실수를 통해 하나하나 깨우쳐 나가는 우직한 인물로 민중들의 조롱과 비웃음 속에서도 맡은바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인물로 인식된다는 것이 그런대로 괜찮치 않소.”

▷스님께서 중국에서 지공 스님을 뵀을 때 ‘고려 사람을 모두 죽이겠구나’라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스님께서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을까요?
“살불살조(殺佛殺祖)라. 부처, 조사, 심지어 부모까지 죽여야 한다는 게 선의 도리 아니겠소.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대자유의 경지에서 비로소 무엇이든 감쌀 수 있는 대자비가 나온다는 말이잖소. 임제선사가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지옥을 만드는 행위이며 나한의 벽지는 똥이요, 보리열반은 당나귀를 맨 말뚝이라고 한 것도 그 맥락 아니겠소. 돼지의 눈으로 보려 말고 용의 눈으로 보려하시오.”

▷태조와는 대단히 가까웠던 모양입니다. 왕도나 왕릉을 결정하는데 스님의 의견을 전폭 수용하고 스님으로 인해 아들 태종을 인정토록 했으며 스님의 청을 받아들여 대사면까지 단행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님의 영향으로 나중에는 고기도 일체 입에 대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고려왕조를 통해 폐단을 혁신하기에는 불가능했소. 오히려 새로운 왕조가 바로 서야 모든 백성들이 편안해 질 것으로 믿었소. 그 점에서 나와 태상왕은 뜻이 맞았던 거요. 이색이라는 분이 말했듯이 우리는 왕과 승려라는 직위를 떠나 물과 물고기 같은 벗이었소.”

▷『태조실록』에 보면 스님께서 입궐해 처음 법문하셨을 때 이를 기록한 사관들이 상당히 비꼬아서 쓴 것 같습니다. 스님이 능히 종지(宗旨)를 해설하지 못하니 탄식하는 승려들도 있었다고 말입니다. 당대 동아시아 최고 선지식이라는 지공. 나옹 스님이 인가하셨는데 너무 혹독한 비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비록 나라가 문을 여는데 공이 있고, 조선의 유일한 왕사라 하더라도 숭유억불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나는 방외인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 아니겠소. 고려불교가 뿌린 인과이고 조선불교가 짊어질 업보이지 않겠소.”

▷그렇다하더라도 태종이 ‘지난날 승(僧) 무학은 사람들이 모두 숭앙했으나 끝내 그는 깨달은 경험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나는 노상의 행인과 같이 본다’고 『태종실록』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 구절을 보니 600년 뒤에 사는 저까지 울컥하네요. 왕이 되기 위해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고 이에 분노한 태조가 함흥으로 가 있을 때 되돌아오도록 한 분이 누굽니까? 스님이잖아요. 그런데 깨달은 적이 없다고 치욕적인 비난을 퍼부은 건 참으로 몰염치한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태종께서 서운한 게 있으셨던 게지요. 왕자시절 그분은 개국에 누구보다 적극 나섰지만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소. 내가 태상왕의 신뢰와 존경을 받음에도 그 분을 도와드리지 않았다고 여기신 모양이오. 그러나 나는 승려지 세자 책봉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정치가가 아니지 않소.”

▷스님께서 참으로 고결하게 사신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깨달았네, 못 깨달았네 하는 얘기는 있지만 권력을 행사했다거나 재물을 축적했다는 등 기록은 전혀 없으니까요. 아무튼 오늘날까지 스님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글쎄, 내가 태조의 왕사였다는 유명세와 아울러 조선후기에 유행했던 풍수도참의 영향 탓 아니겠소. 나에 대한 평가는 온전히 내가 받아야 할 몫이지만 난세에 추락해가는 불교의 미래를 보았고 이를 막으려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 그리고 출가수행자의 본분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점을 주목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오.”

▷오늘날에도 역시 불교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많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몇 십 년 후에는 불교가 군소종교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 까요?
“옛 사람들의 말처럼 도를 구하는 마음은 춥고 배고픈데서 나오는 것 아니겠소. 돈과 권력을 가까이 하면 고려말 불교의 전철을 되밟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특히 나랏돈 무서운 줄을 아시오. 나랏돈 잘 끌어다 쓰는 게 결코 능력이 아니오. 불조의 혜명이 끊이게 하고 나라까지 망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오.”

▷불교가 흥하려면 불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교가 왜 필요한지를 돌아보오. 불교를 위해 불교가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나를 위해 불교가 있어야 하는지를 말이오. 불교를 위한 불교가 될 때 그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오. 내 속에서, 우리 속에서, 사회 속에서 불교를 이루고 실천해갈 때 불교의 참다운 의미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황인규 『무학대사』, 강석근 「무학전승의 특징과 그 의미」, 서울시 「무학대사 한양전도의 공로자」, 김영두 「무학대사의 생애」, 박성수 「무학대사」, 「불교춘추」(1997·8)


무학대사 어록

“여기는 3세의 여러 부처님들도 이르지 못하는 곳이며 역대의 조사님들도 다가오지 못하는 경계이니 대중은 이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만약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여 비교하며 설명하는 것으로써 종지를 삼는다면 어찌 우리의 선종이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묘엄국사 탑명 중)

“유교에서는 인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자비를 주장하나 쓰임은 하나인 것입니다. 백성을 보호하되 마치 갓난아이와 같이 여겨야만 참으로 백성의 부모라 할 수 있으며, 지극한 인(仁)과 큰 대비심으로 나라에 군림하신다면 자연히 임금의 수명이 끝이 없으며 임금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사직이 편안할 것입니다. 지금은 개국 초이기 때문에 형법에 걸린 자가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 모두 죄를 사면하여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천명대로 살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이는 나라의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 (묘엄국사 탑명 중)

“팔만행 수행 중에 천진한 아이행이 제일이라.” (묘엄국사 탑명 중)


찬탄과 평가

“그대 일상생활의 모든 기틀이 일반 사람들과 다르다. 선악과 성스러움과 삿된 생각이 없으며 인정과 도리에도 끌려가지 않는다. 말을 뱉거나 기운을 토할 때는 마치 화살과 칼날이 서로 부딪치는 것 같고 글귀의 뜻이 기틀에 합함은 마치 물이 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한 입으로 손과 주인을 삼키고 몸으로는 부처와 조사님의 관문을 뚫으리라.”
 (고려말 나옹선사)

“대사는 성품이 고상하고 질박하여 화려하게 꾸미는 문식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낮추어 매우 공손하였으며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기를 좋아했다.” (조선초 변계량)

“무학대사는 숭유억불정책이 전개되는 가운데에서도 왕실의 불사를 주관하면서 불교계를 주관했고 특히 우리 역사상 불교계가 탄압을 받아 최대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불교계를 보존하여 조선시대 불교의 명맥을 이어가도록 했다.”
 (동국대 황인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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