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창호장 심 용 식
⑤ 창호장 심 용 식
  • 법보신문
  • 승인 2007.03.13 15: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0여년 나뭇결 따라 순진무구 마음새겨 ‘문 없는 문’ 세우다

17세 조찬형 문하 입문
최영환 만나 만리동에 둥지
목공소 화재 역경 딛고
‘장인 탁마’열정 불태워

창호 선보인 사찰만 500개
미술관-한옥서도 맹활약
세계 문양-기법 탐구하며
1000년 전통 맥 이어가

<사진설명>심용식 창호장은 17세에 목공에 입문해 30여년 동안 외길 인생을 걸었다.

서울 만리동의 시멘트 건물 사이로 금강송 향내음이 짙게 풍겨온다. 심용식 창호장의 손길이 머무는 성심예공원. (誠心藝工院·02)715-3342)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격자문을 열자 눈꼽쟁이창, 머름창, 팔각창, 소슬모란무늬문, 격자문, 불발기문 등 다양한 무늬의 창문과 출입문이 즐비해 있다. 30여년 장인의 길을 걸어 온 그의 여정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6호 창호장 심용식(55세). 그는 불국사, 송광사, 운문사 등 전국 유수 사찰 법당의 창호를 만든 인물이다. 영국 대영박물과 내 한옥 ‘사랑방’의 창호도 그의 작품이며 이응노 화백의 프랑스 고암미술관 창호도 그의 손이 빚어 낸 것이다. 강원도 평창의 한옥문화원, 강화 학사재의 창호에도 그의 손길이 배어있다.

충남 예산이 고향인 그는 7남매 중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삼년 정도 서당 다닌 것이 배움의 전부였다. 지척의 수덕사 법당 창살과 단청을 보며 넋을 잃곤 했던 그는 1969년 열일곱에 고향 덕산 마을서 소목일을 보고 있던 조찬형(충청남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18호 소목장) 선생의 제자로 들어가 처음으로 대패와 끌을 쥐었다.

<사진설명>청량사 어린이 법당.

밤잠도 잊은 채 탁마한 그는 스승의 허락도 없이 장롱이나 책상 제작에 손을 대 혼이 난 적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어깨 너머로 배운 것 하나로 제작에 손을 댔으니 제대로 될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귀한 목재만 날린 셈이지요.”

당시엔 많은 목재를 쌓아놓고 제작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이틀 쓸 목재만 준비했던 형편이었다. 허락도 안 받은 상태에서 나무를 자르고 켜 못질을 해 대 못쓰게 만들어 놓았으니 스승의 불호령이 내린 것은 자명한 일. 그럼에도 스승은 그를 내치지 않았다. 비록 목재를 자주 상하게 하는 제자지만 일을 즐기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스승의 기대와 사랑은 남달랐다.

당시 수덕사 인근에는 또 한 명의 대목장 이주탁 선생이 머물고 있었다. 조찬형 선생에게 일을 부탁하러 왔다가 심용식의 손놀림과 눈썰미를 눈여겨 보고는 ‘빗살공법’을 전수했다.

“그 공법을 접한 순간 수덕사에서 보았던 법당 창호를 나도 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솔직히 고가구 만드는 일도 재미있었지만 사찰 창호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었거든요.”

그 비법을 전수 받은 후 처음으로 창호를 제작한 것이 바로 수덕사 청련당 교창이다.

<사진설명>창경궁 문정전.

군 입대로 잠시 손을 놓은 그는 제대 후 다시 조찬형 문하서 일을 했지만 독립을 결심했다. 재정이 넉넉지 않았던 그는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이국 땅 사우디아라비아로 날아갔다. 우리나라에서 목수일을 하며 재정을 마련하기란 너무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는 타국땅에서 2년6개월 동안 향수병을 달래며 왕궁 짓는데 몰두했다.

귀국 후 자신만만하게 홀로 섰지만 그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형편이 어려워 끼니 걱정까지 할 정도였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궁과 사찰을 둘러보며 자신의 안목을 높이고 기술을 향상시켜 갔다. 이 때 만난 스승이 바로 최영환 선생. 그는 이광규(중요문화재 제74호 대목장) 선생과 함께 일하며 창호를 전담했던 인물이다. 만리동 고개에서 목공소를 운영하던 그는 장안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손꼽혔던 목공인재였다. 그는 드디어 최영환 선생을 만나며 귀향을 포기, 만리동 목공소에 남아 새 스승의 솜씨를 탁마해 갔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5년 밖에 없었습니다. 1985년 작고하셨거든요.”

<사진설명>심용식 창호장 작업실. 30년 여정을 대변하듯 그와 그의 스승이 쓴 도구가 즐비하다.

최영환 문하에는 50여명의 제자가 있었지만 대부분 삶의 무게에 눌려 떠났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자리를 지켰다. 그가 지금도 만리동에 ‘성심공예원’을 마련해 둥지를 튼 것도 스승의 뜻을 좀 더 가슴 속에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사실 그는 만리동을 떠날수도 있었다. 1989년 자신의 목공소가 전소된 적이 있는데 쌓아놓은 목재는 물론 세간에 선보일 작품 일체가 화마에 의해 한 줌 재로 변했다. 더욱이 한 가정집의 전세로 들어가 목공일을 하고 있었기에 화재 후 그는 손수 집 한 채를 주인에게 지어주어야 했다. 이 상황에서 웬만한 사람이라면 만리동을 떠날 법도 한데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새 집을 지을 때 동네 분들이 격려를 해 주셨는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손수 목재를 나르고 자르며 울력을 해 주셨어요. 보시하는 마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그는 만리동 사람들의 인정과 스승의 뜻을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 화재 이후에도 다시 만리동에 둥지를 틀고 지금까지도 창호장으로서의 두 날개를 펴고 있다.

“조찬형 문하서 목공의 기본을 배웠다면 이주탁 선생으로부터는 사찰문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다”며 “이광규, 최영환 선생이 있었기에 창호장으로서의 올곧은 길을 걸을 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그는 정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장인으로서 일가를 이뤘지만 창호에 대한 깊이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말하는 그는 보물로 지정된 창호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 동남아, 중국, 일본, 네팔, 인도, 티베트 등 외국의 창호를 찾아 연구하고 있다.

“물론 창호에 관한한 우리나라 솜씨가 제일이지요. 하지만 타국 작품에 쓰인 문양이나 기법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어요. 그들만의 독특한 정취가 묻어나 있거든요. 그들의 기법을 어떻게 활용해 우리 정서에 다시 맞도록 재개발 하느냐 하는 문제도 제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전통창호 연구 뿐 아니라 10여년 전부터 현대흐름에 걸맞는 창호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창호도 결국 문입니다. 문은 우리가 가장 친근히 접하는 대상이라는 점에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인의 손길이 머무는 문.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나, 내가 상대방을 찾을 때나 사람을 보기에 앞서 자신의 손으로 문을 열어야 합니다. 사람을 직접 만나 가슴의 문을 열기 전 상대방이 타인에게 선보인 이 문을 먼저 열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쩌면 이 문을 여는 순간 이미 자신과 타인의 문을 연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진설명>양평 돌 박물관. 심용식 창호장의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따라서 문은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전통 창호는 물론 아파트나 빌라에도 어울리는 창호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실내 인테리어로도 활용되고 있는 문은 점차 각광을 받아가고 있는 추세이고 보면 그의 선견지명에 놀라울 따름이다.

그는 아산에도 자연건조된 목재를 보관하는 공방을 갖고 있다. 최고의 솜씨도 질 좋은 목재가 아니면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모양새가 좋아 창호를 구입했는데 일 년도 안 가 뒤틀렸을 때 상처 받은 사람의 마음을 헤야려 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신용도 문제입니다. 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할 필요 없습니다. 저부터 지키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눈만을 현혹시키는 상술은 아예 배제한다는 그의 한마디에 장인 정신의 단면을 엿볼수 있다.

1996년에는 동국대 불교대학원에 입학 불교미술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한 후 동국불교미술인 회장도 역임한바 있는 그는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다. 어려운 가정의 집수리와 도배, 전기 수리는 물론 소년소녀가장에게 생활비도 지원해 주고 있다.

“제 유년 시절도 가난했습니다. 만리동 화재 당시에도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은혜, 저도 일평생 살면서 갚아야지요.”

일평생 창호제작 외에는 단 한번도 눈을 돌리지 않았던 심용식 창호장. 수덕사 창살에 흠뻑 취했던 그가 벌써 500여 사찰의 창호를 맡았다. 천년의 전통을 잇는 그의 손에 또 다시 후대에 물려 줄 천년의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창·출입문 만드는 소목장

창호장이란?

창문, 또는 출입문의 창호(窓戶)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소목장(小木匠)을 만드는 사람을 말한다. 단순한 문의 기능 뿐 아니라 다양한 창살을 이용, 아름다운 무늬까지 새겨 넣어 문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내소사 법당의 ‘꽃살문’을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문양별로는 완장창, 세살문, 빗살문, 꽃살문 등이 있다.

완자창에는 아자(亞字) 완자창과 칠살완자창이 있으며, 고궁 고궁창살은 모두 이 문양들로 만든다. 세살문과 빗살문은 각각 그 모양이 앞과 뒤가 같은 배밀이형인가 아니면 앞은 원형이고 뒤가 네모형인 투밀이형인가에 따라 구분된다. 꽃살문은 연꽃형, 원형, 육각형, 나뭇잎형 등이 있다.

나무는 가래나무과인 추목, 또는 춘양목이 으뜸이지만 적송이나 육송 등을 많이 쓴다. 이 나무를 대략 3년 동안 묵히면서 나무의 결을 다진다. 나무가 마르면 각목을 켜서 끌과망치 등의 도구를 이용해 각 살을 다듬으며 문양을 새겨 넣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