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2. 욕망-충지의 ‘그윽한 머뭄’

기자명 법보신문

“작은 집엔 처마 짧으니 달 먼저 맞네”

<사진설명>충지 스님이 잠시 머물렀던 충남 논산의 개태사. 잦은 왜구의 침략으로 고단한 나날을 살아야했던 옛 시대의 민중들에게 개태사는 의지처이자 위안처가 됐다. 이곳에 몸담았던 충지 스님도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속세의 삶 대신 욕심을 벗어놓고 자연에 기대는 삶을 그려보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열렬하고 순수하게 첫사랑을 하는 두 연인이 왜 만나기만 하면 싸우고 떨어져 있으면 왜 그리 괴롭고 안절부절 노심초사하는가? 이들은 상대방에게 120에서 200을 기대한다. 상대방이 절대적으로 사랑을 해 주어도 100이기에 이들은 항상 20에서 100의 괴리를 느낀다. 자신의 후배가 30분 이상을 지각해도 “차 막혀서 혼났지?”하고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그보다 더 사랑하는 연인에게는 5분 지각하였다고 화를 낸다. 기다리는 5분이 너무도 길었기 때문이다. 아니, 분노는 그가 카페에 도착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상대방이 자기보다 먼저 와서 자기를 고대하며 기다려 주기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가장 큰 때가 첫사랑을 할 때이기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 스토커이기에 첫사랑은 열병이자 정신병이다. 그러기에 첫사랑은 대개 실패한다. 상대방에게 상처만 남긴 채.

첫사랑은 삶의 속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보다 정도는 못하지만, 사람은 누구나가 첫사랑을 하는 연인처럼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절감하며 괴로워한다. 명문대에 들어가려 했는데 겨우 2류 대학에 들어갔을 때, 승진을 바랬는데 그 명단에 자신이 없을 때, 한 몫 잡으려 했는데 주가가 폭락하여 집까지 날리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던가? 하지만 명문대에 들어가고 부장이 된다 한들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삶은 꿈-현실 사이의 진동

<사진설명>개태사의 미륵은 마치 장수와 같은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스토커이다. 살을 섞기 전까지는 그 대상을 심청과 춘향과 양귀비, 베아트리체와 롯데의 모든 장점을 가진 여인으로 생각하여 온 몸을 던지는 스토커처럼 우리는 욕망의 대상을 향하여 질주한다. 부장에 오른 사람이 이사를 꿈꾸듯 꿈을 이루는 순간 또 다른 꿈을 만들어 질주를 하기에 인생은 늘 바쁘고 항상 괴롭다. 이렇게 끊임없이 꿈과 현실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꿈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 삶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 바로 불타는 욕망, 갈애(渴愛)에 있다고 한 것은 인간 삶의 본질을 통찰한 붓다의 말씀이다.

라깡(Jacques Lacan)의 말대로 욕망은 신기루이다. 아무도 그에 이른 사람은 없다. 욕망의 대상을 향해 고단한 길을 가지만, 갈 때는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추구할 유일한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달해 보면 그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에 이르고 나서야, 때로는 죽는 순간에서나 자신이 그토록 추구한 대상이 한갓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 인간 삶의 속성이다. 스토커가 그리 고대하고 갈망하던 이와 살을 섞고 나서야 그 여인이 한갓 비계덩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듯. 

기름진 배엔 진리 깃들지 못해

그러니 모든 고통을 없애려면 욕망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허나 일상의 삶을 살면서 욕망을 완전히 버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아니, 욕망을 완전히 버리는 길은 죽음이다. 욕망은 절대 악이 아니라 창조와 실천의 원동력이자 삶의 에너지이기도 하니, 욕망의 원천인 몸을 불사르지 못하는 우리 중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처마 짧으니 달 먼저 맞고
담이 낮으니 산 보기 좋네
비 그쳐 냇물은 콸콸 흐르는데
바람조차 멈추어 산마루엔 한가로운 구름.
短先邀月/牆低不山/雨餘溪水急/風定嶺雲閑

원감국사 충지(止: 1226-1292)의 선시, ‘그윽한 머뭄(幽居)’이다. 집이 작고 조촐하니 동산 위에 두리둥실 떠오르는 달을 집이 커서 처마가 긴 사람보다 먼저 맞는다. 마음을 비우면 달이 가슴에 들어와 자신처럼 둥그런 가득함으로 채운다. 담이 낮으니 늘 산이 보이고 산이 보여주는 사시사철의 파노라마가 눈앞에 펼쳐진다. 파릇파릇 새싹 사이로 온갖 꽃들이 흐드러진 봄 산은 고통을 이긴 생명의 아름다움을 말해주고 녹음 짙은 여름산은 자신을 훼손하는 자마저 끌어안는 너그러움을 보여주고, 낙엽이 지는 가을 산은 버림이 곧 채움임을 넌지시 들려주고 흰 눈 덮인 겨울 산은 공(空)이 바로 생성의 바탕임을 알려준다. 그리 집이 자연의 한 부분이 되었으니 비 그치고 물이 불어 흐르는 냇물 소리는 더욱 크게 들린다. 그 소리에 빠져 저절로 정적에 이르고, 적멸의 마음에서 먼 산을 바라보니 바람도 멈추었는지 산마루에 구름도 걸리어 한가로이 여유를 즐긴다.

많은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만이고 불안이다. 기름진 배에는 명석한 진리가 깃들지 않고, 좋은 옷을 입으면 거추장스러워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다. 큰 집에 있으면 내가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집에 갇혀 나의 정신과 몸 모두 나태해지고 타락의 유혹을 쉽게 받으며 인간끼리 거리가 너무도 멀어 인간의 향기가 상대방에게 스며들지 않는다.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 가난한 이를 그의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 없다. 소유하면 할수록 더 많은 소유를 원하기에 불만은 커지고,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고 늘 노심초사하며 불안에 떤다.

20세기는 한 마디로 말하여 서로 지나치게 욕망을 확대하는 바람에 갈등과 전쟁을 낳은 시대였다. 지금 인류는 여러 가지로 위기에 있다. 이 위기의 근저에는 욕망의 확대재생산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다.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만 하더라도 산업사회의 확대재생산 원리에 따라 자연을 무한한 곳으로 보고 마구 착취하고 개발하였기 때문이다. 10, 20년 전만 해도 자연의 여분이 있어 산업화가 300여년 단행되었어도 오염은 국부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그곳마저 개발하여 버리는 바람에 이제 빈 곳이 거의 없어져 전 지구에 환경위기와 기상이변이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도 수천, 수만의 생명이 죽어가고 있고 8천 미터 설산을 나는 새나 북극의 생명체까지도 오염으로 신음하고 있다. 환경뿐인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서 욕망이 극단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바람에 ‘빈 곳’은 사라지고 서로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지구엔 욕망 수용할 여분 없어

이제 인류가 사는 길은 단 한 가지 선택밖에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욕망을 확대한다면 지구사회는 멸망을 맞는다. 욕망을 수용할 여분이 지구에는 더 이상 없다. 이제 충지의 시처럼, 욕망을 확대하는 것보다 절제하는 데서 행복을 더 느끼는 것으로 삶의 방식을, 패러다임을, 사회체제와 제도를 전적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결혼기념일이라고 고운 이와 샹들리에가 번쩍이는 특급 레스토랑에서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바다가재를 뜯어야 두 사람은 황홀할까? 그보다 갈잎들이 살랑거리며 바람이 지나는 소리를 들려주는 동네 약수터에서 싸 간 김밥을 나누며 잎새 새로 보이는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마냥 청정한 마음을 서로 나누는 것에서 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계속〉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