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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스님]느림의 공덕

기자명 법보신문

등불-빛이 선정-지혜이듯
속도 경쟁 치우침서 벗어나야

관음상 앞에 수선화가 병아리 부리처럼 노란 꽃대를 살포시 내밀었다. 올해는 한 달 가량 봄이 빠르다고 해도 왠지 달갑지가 않았는데 갑자기 강풍과 함께 꽃샘추위가 찾아왔다.
 
이러한 변덕스런 날씨는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지난 겨울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올 봄에는 최악의 황사까지 예상 된다고 하니 걱정스럽다. 이같은 급속한 기후변화의 원인은 이산화탄소와 같은 온실가스의 증가 때문이며 이 부분의 개선 없이는 파국을 면하기 어렵다고 환경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인류 대재앙을 대처하기 위하여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하니 참으로 두렵기만 하다. 외국 사람들은 한국을 상징하는 말을 물으면 빨리 빨리라고 대답을 하는 것을 들었다. 이것을 보면 그 동안 얼마나 정신없이 살아왔는지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이렇게 빨리 달리게 되었던 것은 산업화를 통해 빨리 가난을 탈출하려는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먹고 사는 것은 풍족해 졌으나 자연이 파괴되고 심성마저 황폐해져서 자살률 세계제일이라는 부끄러운 단면을 가지게 되었다.

삶이 난파선처럼 심하게 흔들리고 브레이크가 터져버린 자동차처럼 끝없이 달려갈 때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멈출 수 있을까 한번 돌이켜 살펴야 할 것이다. 『육조단경』에서는 대법(對法)으로 중도에 이르는 길을 설하고 있다. 빠름으로 인한 병폐는 느림을 실천함으로써 극복되어 결국 중도로 통하기 때문이다.

발우공양을 통해서 천천히 먹으면서 한 생각 흐름을 관찰하고 오후 불식을 통해서 배고픔에서 오는 감각과 비움으로 인한 행복을 알아차리는 것은 출가 수행자들의 덕목이다.

천천히 걸으면서 발바닥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극대화하여 한 생각 틈을 엿보아 회광반조로써 순간 부처성품을 낚아챈다면 빠르고 느림이 본래 하나인 세계를 체달할 것이다.

영가 현각 선사가 육조 스님를 찾아와서 무상이 신속하다고 하니 “어찌하여 남이 없음을 체달하여 신속한 무상이 없음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자 “체달한즉 남이 없고 요달한 즉 본래로 빠름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인가를 받았다. 우리의 존재실상은 느림과 빠름이 하나로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느림은 등불과 같아서 선정이며 빠름은 빛과 같아서 지혜이다. 그러므로 느림 속에서 빠름을 보고 빠름 속에서 느림을 보는 중도의 실천 없이는 범부의 일상이 한쪽에 치우치는 병폐를 벗어나기가 어렵다.

아날로그 세계는 인정과 따뜻함이 있지만 속도가 느려서 불편함이 있고 디지털의 세계는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고요하고 평화로움이 없다. 그래서 이어령 선생은 ‘디지로그’라는 신조어로써 중도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인터넷 세상은 메마른 속도의 세계이다. 그러나 창에 나타나는 그림은 끝없이 흘러가더라도 마우스를 움직이는 주인공을 놓치지 않는다면 화엄삼매를 이룰 것이다. 육지에서 섬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풍경은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저마다 급하게 달려왔던 마음의 속도를 멈추고 회광반조하는 기다림이 있어야 갈수가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자기를 안전한 섬으로 삼고 법을 등대로 삼으라고 자등명 법등명을 가르쳐 주셨다. 속도경쟁의 숨 막히는 일상에서 탈출하여 왠지 그 섬에 가보고 싶은 것은 누구나 피안을 꿈꾸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걸음을 옮기지 않으면 여기가 바로 저기다.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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