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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로 할 수 있는 일 있나 일 하려면 욕심부터 버려야”

기자명 법보신문
  • 인욕
  • 입력 2007.03.19 10:05
  • 댓글 0

동방대학원대학교 정 상 옥 총장

“내 마음이 기쁠 때나 증오로 가득찰 때에도 부처님은 항상 미소로 나를 바라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의 장난일 뿐 시련도 하나의 과정입니다. 하심하고 인내하면 때는 찾아옵니다.”

2005년 3월 14일 동방대학원대학교 정상옥 총장이 취임사 낭독을 위해 단상에 올랐다. 200여명의 하객들은 정 총장을 박수로 환영하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동방대학원대학교의 설립을 발의하고 터를 닦기 시작한지 꼭 10년이 지났습니다. 오늘은 우리 동방대학원대학교가 파란만장하고 천신만고의 온갖 고난을 딛고 개교한 날이기도 합니다. 동방대학원대학교는 미술, 음악 등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 콘텐츠를 학문적으로 정립하는 상아탑이 될 것입니다.”

단상에서 조용히 내려오는 내내 정상옥(62·우현) 총장의 입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는 작은 공성이 이어졌다. 작지만 지심으로 염송하는 염불, 그것은 동방대학원대학교를 개교하기까지 겪었던 팔고(八苦)를 벗어날 수 있게 한 힘이었다.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하였기에 삿된 길을 피할 수 있었기에, 그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자연스레 입으로 이어진 것.

여초 선생 당부로 학교 설립

1996년 봄,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정상옥 박사는 계명대학교 서예과 교수로서 새로운 삶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지천명에야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인데다 이미 능력을 인정받아온 전공 분야에서 가르침을 편다는 것은 더 없이 기쁘고 행복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연이은 사업실패와 유학 등으로 희생만을 강요했던 가족들에게 웃음꽃을 필 수 있게 하고 행복을 줄 수 있다는 데서 만족스러웠다.

그는 넘치는 에너지로 강의에 열을 다했고 학생들은 그런 스승의 모습에 매료돼 갔다. 시나브로 대학교수로서의 어색함이 사라져 가고 있던 어느 날, 여초 김응현 선생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학교를 하나 설립하려고 하는데 마땅히 물어 볼 곳이 정 교수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며 도움을 요청해 왔다. 그리고 “학교 설립을 전적으로 알아서 추진해 달라”는 당부를 덧붙였던 것.

서예 분야에 뿌리를 내리도록 지도해준 하늘같은 은사의 첫 당부였기에 제자는 장고할 수 밖에 없었다.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며 백방으로 수소문해 내린 결론은 전문인 양성을 목표로 ‘대학원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매사 긍정적이면서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정 교수는 즉시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작업에 착수했다.

대학 설립을 위한 과정은 그의 성격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준비 6개월여 만인 1996년 12월 교육부로부터 학교법인 설립인가를 획득했다. 법인명은 여초 선생이 평생을 몸담아 서예 연구를 매진해 온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의 이름을 따 ‘동방학원’으로 결정했다. 이듬해에는 경기도 포천에 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연건평 2300평 규모의 교사 신축에 착수했다. 6개월이 지나자 제법 건물의 틀이 잡혀 갔다. 개교가 멀지 않을 즈음, 그는 교수 자리를 과감히 포기하고, 학교 공사에만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인간만사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라고 했던가. 그에게 고난이 들이쳤다. 모든 일이 잘 진행됐기에 당시에는 너무나 급작스러웠고 당혹스러웠다. 그토록 염원했던 교수직까지 박차고 나왔건만 신축 불사가 소송이 휘말리다니, 원망스러웠다. 공사 관계자가 재정 사고를 낸 뒤 잠적한데다가 몇몇 사람들의 농간이 이어지면서 재정 사고가 잇따랐던 것이다.

시공회사는 교사 신축을 중단하고 공사비 지급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현장 임부들은 노임을 요구하며 동방연서회를 찾아와 집기를 부수고 난동을 부렸다. 그 충격으로 여초 선생마저 쓰러지자 모든 화살이 정상옥 교수에게 돌아왔다. 순조롭게 항해하던 동방대학원대학교 불사가 난파 직전의 위기에 몰리자, 우후죽순처럼 몰렸던 후원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가장 어려운 순간 등을 돌린 후원자들에 대한 증오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희망의 빛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동굴 같은 절망의 어둠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부처님께 엎드려 지혜의 빛을 구하면서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어려운 순간 등돌린 후원자

“부처님은 그저 미소만 짓고 계시더군요. 내 마음이 기쁠 때나 증오로 가득 찰 때나 항상 같은 모습으로요. 미소 지으신 부처님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분노와 욕심은 어떠한 해법도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틀어쥐고 놓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법이죠.”

법인 명의의 토지를 처분하고 유일한 재산인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먼저 분노한 인부들을 위로했다. 사회적 지위나 명망은 더 이상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외부활동을 일체 자제하고 지인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오직 개교만을 위해 일심으로 정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그를 달갑게 보지 않았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처자식마저 팽개친 냉혈한이라는 등 중상모략과 유언비어가 끊이지 않고 그를 뒤따랐다. 오해와 고통의 시간은 6년간이나 지속됐고 그런 그가 의지할 곳은 오직 한결같은 미소로 그를 바라보는 부처님뿐이었다.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습관은 이때부터 생겼다.

개교 1년만에 석박사 과정 개설

그의 원력이 마침내 부처님께 도달할 만큼 지극했던 것일까. 2002년 봄, 고려대학교로부터 갑작스런 제안이 들어왔다. 동방연서회의 소장 작품들을 인도받는 조건으로 개교 자금 일부를 지원하겠다는 낭보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몇 달 뒤에는 태고종 총무원으로부터 학교 부지와 운영자금 일부를 지원하겠다는 제안과 ‘함께 일해 보자’는 연락이 이어졌다. 정 교수는 2002년 12월 태고종 총무원장 운산 스님과 동방대학원대학교를 태고종 종립대학으로 건립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2003년 7월 옛 태고종 총무원 건물을 인수받아 2004년 12월 교육부로부터 정식 개교인가를 승인받았다. 6년간의 고통스런 정진 끝자락엔 ‘개교’라는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다.

동방대학원대학교는 정 총장을 중심으로 쾌속 질주 중이다. 개교 1년 만에 교육부로부터 학교운영능력을 인정받아 박사과정 및 석·박사 통합과정이 개설됐다. 또 신입생 수급에 어려움을 빚고 있는 여타의 신생학교와 대조적으로 매 학기 정원을 초과하는 입학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4년제 사이버대학 개교를 목표로 콘텐츠 개발과 자료 확보에 매진하고 있다. 사이버대학이 문을 열면 동방학원은 학사와 석사, 박사를 배출하는 완전한 형태의 대학교육기관으로 거듭나게 된다.

새벽 3시, 정상옥 총장은 집안에 모셔진 원불을 마주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예불과 108참회로 시작된 오전일과는 먹을 갈고 붓을 잡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모든 것은 마음의 장난일 뿐입니다. 분심이 일어나 평상심이 흐트러질 때에는 2시간, 3시간이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먹을 갑니다. 모든 일은 때가 있고, 지극한 정성이면 반드시 이뤄지는 것이 이치입니다. 시련도 하나의 과정일 뿐 하심하고 인내하면 때는 찾아옵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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