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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유마사승가대학 개원 일 장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강원은 홀로서기의 연습장
스스로 등불 삼는 場 열 터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을때 사람들이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부처님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얻지 않았다. 단지 그동안 찾아오던 것이 항상 내안에 있었음을 이해하게 됐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깨달음은 참으로 쉽다. 모든 것이 갖춰져 있으니, 밖에서 찾을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정작 눈을 돌려 안을 들여다 보면 천길 낭떠러지다. 보이지 않는 미로같은 길.

과연 어떻게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 안의 진면은 또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화순 유마사 주지 일장 스님. 출가 이후 40여년 간을 이 하나의 질문을 품고 살아왔다. 머리깎기 무섭게 선방으로 달려가고, 배움은 오히려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는 우리네 절집 풍토. 중앙승가대를 졸업한 후 일본 릿쇼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스님의 이력은 그래서 칭찬보다는 불필요한 군더더기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스님에게 배움은 내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었고, 경전이라는 퍼즐을 맞추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스님은 올해 3월 호남 지역 최초로 전통 비구니 강원 유마사 승가대학을 개원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작은 해답을 던지고 있다.

“흔히 위패 은사라고 하지요. 저는 입적하신 스님을 은사로 모셨어요. 그래서 돌봐주는 스님이 없이 홀로 공부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돌봐주는 스승이 없으니 배움이 더욱 절실했는지도 모르지요. 유마사에 비구니 강원을 개원한 것도 출가 이후 제가 겪었던 이런 고생을 후학들이 겪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의 발로로 이해해도 좋을 거예요”

스님의 출가는 처음부터 예견된 신산(辛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절에 가면 은사 스님은 으레 “너 내 상좌하자” 이렇게 말을 건냈고, 별뜻없이 던진 긍정의 목소리는 어느덧 굳건한 약속이 돼 버렸다. 이미 입적해 버린 스님을 은사로 모시게 된 것은 이런 정리를 차마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은사없는 스님의 생활은 그야말로 혹독했다. 옷이 없어 스님들이 목욕탕에 버리고 간 옷을 기워입었고, 행자 시절 부엌에서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쉬라는 애정어린 말 한마디 건네는 스님도 없었다. 명절날 동료들이 은사 스님을 따라 큰 스님 절에 가버리면 홀로 남아 절 살림을 며칠 동안 도맡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눈물나는 광경인데 그때는 외로움을 느끼거나 서운해 하지 않았어요. 내가 선택한 길이니, 감수해야 한다.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당시는 초발심이 서리발 같은 시기라 그런 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지요.”

은사 없는 홀로서기 40년

스님은 출가와 동시에 은사 스님이 계시던 김해 수인사를 나와 부산 대성암 선방에서 생활했다. 사찰의 공양주 소임을 맡았는데 하루종일 일하고 잠깐씩 짬을 내 참선을 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없으니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했다.

“어느날 노 스님의 제사가 있었는데, 참석한 스님들이 강원 이야기를 해요. 상좌들을 이번에 강원에 보내야겠다고. 귀를 쫑긋하고 세웠다가 강원 이름을 외운 후에 찾아갔어요. 처음에는 다른 스님에게 부탁을 했지요. 내가 길을 모르니 같이 가자고. 그런데 그 스님이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는 거예요. 결국 혼자서 버스 타고 택시 타고 입을 지도 삼아 물어 물어 찾아갔지요. 도착하고 보니 용인에 있는 화운사더군요.”

스님은 지니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 장삼 두벌을 샀다. 탄허 스님의 번역본 한권도 구입해 품에 안았다. 모든 것을 혼자서 했다. 다른 스님들과 함께 공부하려면 복장이 깨끗해야 할 것이고, 빈손으로 강원에 들어가기는 미안했던 탓이다.

스님의 공부는 용이 물을 만난 듯했다. 당시에는 학기 중간에 바랑을 짊어지고 다른 강원으로 떠나는 스님들이 많았다. 강원 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당시 하나의 유행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님은 돌부처였다. 내리 한 곳에서 4년을 꿈쩍 않고 버텼다. 스님에게 배움은 사치가 아니라, 목숨을 건 구도였기 때문이다. 경전을 읽으면서 신열처럼 일었던 막막함과 불안감이 자취를 감추고 수행의 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스님은 강원을 졸업한 이후 또 다른 배움의 길, 즉 중앙승가대의 문을 두드렸다. 이제 막 4년제 대학으로 전환된데다, 호진 스님의 열의 가득찬 강의가 큰 인기를 모으던 때였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다른 길은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경전 속의 부처님 말씀이 너무 좋았고 하나 하나 깨달아 가는 맛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지요. 저를 눈여겨보셨던지 호진 스님이 그러시더군요. 성균관대 도서관학과에 진학해 보는 것이 어떠겠냐고. 경전을 너무 좋아하니까 아마 책에 파묻혀 보라는 의미였던 것 같아요”

그러나 스님의 발길은 일본으로 향했다. 내친 김에 더 넓은 곳에서 제대로 불교를 배워보고자 하는 열정이 넘쳤기 때문이다. 나이는 이미 불혹.

그러나 배움의 세계에 발을 들인 스님의 마음은 청년의 상큼함으로 넘쳐났다. 허나 열정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 수는 없었다. 일본 생활 내내 스님의 삶을 붙들고 늘어지는 생활고는 언제나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혈혈단신. 언제나처럼 스님의 처지가 그랬다.

100만원 들고 일본 유학

“일본에 유학 갈 당시 여동생이 100만원을 마련해 줬어요. 그런데 오사카에서 3개월만에 돈이 다 덜어져 버린 거라. 차비는 없지요. 말도 잘 하지 못하지. 남의 나라에서 이러니, 눈 앞이 캄캄하데요. 그런데 죽으라는 법은 없나봐요. 은사가 없으니 손 벌릴 곳도 없고,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거류민단을 찾아 갔어요. 사정을 설명했지요. 공부를 하려고 왔는데 돈이 다 떨어져 버렸다. 도움을 줬으면 한다. 그랬더니 흔쾌히 10만엔을 주데요. 지금 생각하면 그분이 보살이 아니었나 싶어요.”

일본의 공부법은 한국과 너무나 달랐다. 한문·일본어는 기본이었고 산스크리트·팔리·티베트어는 덤이었다. 대장경은 줄줄 읽으며 수업을 했다. 원문 하나를 놓고 수많은 언어와 번역본들을 비교해서 골수를 찾는 것이 일본의 공부 방법. 일본말도 더듬거렸던 스님에게는 또 하나의 은산철벽이었다.

“베개와 이불을 덮고 잠을 자본 적이 없을 정도였어요. 밤을 꼬박 세워야 겨우 따라갈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일본은 열심히 공부하면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절로 만들어져요. 우수한 학생의 경우 학교에서 직접 나서서 장학재단을 연결해 주고 재정적인 도움을 제공하기 때문인데, 우리 대학도 배워야 할 대목이지요.”

스님은 일본 유학 10년만에 일본 릿쇼우대에서 「남악혜사의 수행도론」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20년 전통의 릿쇼우대에서 한국인이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은 스님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논문을 준비하며 박사 학위보다 더 소중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수행에 대한 확고한 신념, 그리고 교육체계에 대한 나름의 지혜였다.

“천태지의 대사의 스승인 남악혜사 스님은 선승이면서 학승이었어요. 천태의 수행체계 근간을 마련한 분이지요. 그런데 이분은 경전 한권을 10만번씩 읽었다고 해요. 요즘 누가 그렇게 경전 하나를 놓고 10만독을 합니까. 옛 스님들은 선승이라 해서 경전을 멀리 한 적이 없어요.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지요.”

스님의 남악혜사 스님의 논문을 준비하며 우리 선조들의 위대함을 체득했다고 했다. 조석예불, 오분법신, 모든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제시한 것인데 이를 마음으로, 가슴으로, 화두로 알지 않고 입으로 했음에 대한 뼈져린 반성이었다. 더불어 아침 예불이, 강원의 교육이 그대로 깨달음의 길이 돼야 하는데, 수행을 하기 위한 통과의례 정도로 여기고 선원에 가야 비로소 깨달음이 있다는 우리 절집 가풍에 대한 우려이기도 했다.

최근 개원한 화순 유마사 전통 비구니 강원은 40년에 걸친 스님의 남다른 배움의 과정을 집대성한 소중한 결실이다. 학인들에게 계정혜(戒定慧) 삼학에 대한 확실한 의미를 체득케 해 홀로 설 수 있는 수행자의 자질을 길러주는 것, 이것이 스님의 목표다. 또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어학 강의에 남다른 애정을 쏟고 있다.

“강원은 홀로서기의 연습장입니다. 강원의 공부는 끝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 또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반이 돼야 합니다. 모든 것을 혼자서, 홀로 체득해야 합니다. 학인들이 이 점을 명심했으면 해요.”

스님은 재력있는 스님에게 상좌가 몰리고, 큰 강원에 학인들이 쏠리는 현상이 안타깝다고 했다. 홀로 서려고 하지 않고, 은사 혹은 문중에 기대는 나약한 정신으로는 결코 수행자의 길을 갈 수 없다는 한탄이다.

후학들 자립 터전 마련

스님은 지난 2000년, 한국전쟁으로 폐허로 변한 전남 화순 유마사 옛 터에 주지로 부임한 이후 대작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7년여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허허벌판에 법당과 요사채가 하나씩 들어서고 이제는 강원까지, 3000여평에 이르는 대지가 정갈한 도량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스님의 꿈은 조금 높다. 호남 유일의 비구니 강원을 세계 최고 비구니 강원으로 개화시키는 것. 어학과 원전 중심의 강의를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뒤를 봐줄 은사가 없으니 항상 고아처럼, 고통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얻은 것이 더 많아요. 은사 스님이 안 계시니 처음부터 부처님을 은사로 삼았거든요. 출가 이후 남다른 배움의 과정이 모두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스님의 치열했던 홀로서기의 비결은 이처럼 간결했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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