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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불교 개혁 선봉 조선불교청년회

기자명 법보신문

이회광의 朝日불교연합 저지…사찰령 철폐 선봉

1920년 중앙학림학생 중심 창립…조선불교의 자주 요구
산하조직 불교유심회 발족…총독부 불교정책 정면 비판

<사진설명>조선불교청년회는 체육활동을 장려했다. 사진은 1922년 배재학당 운동장에서 가진 제3회 전조선축구대회의 우승 기념사진.
사진제공=민족사

1920년 불교계는 이회광의 조일불교 연합책동으로 소란스러웠다.

이 사건은 해인사 주지였던 이회광과 당시 30본산연합사무소위원장이었던 강대련 사이에 교계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진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조일불교 연합책동은 불교계의 전면적인 저항에 부딪혀서 무산되기는 하였지만 불교계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표출시켰다. 당시 불교계는 30본사 주지들에 의해서 운영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총독은 30본사 주지들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사 주지들은 자신의 신변 안전과 권익을 지키기 위하여 총독부 권력과 일정하게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사찰의 재산을 매각할 때 사전에 관청의 허가를 받도록 함으로써 재정권 또한 총독부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로 인하여 불교계의 교육사업과 포교사업은 지지부진 하였고, 재정운영도 불투명해졌다. 당시 언론은 불교가 이같이 타락하고, 쇠퇴한 원인을 승려가 관권과 결탁하여 각종 부패의 근원이 된 데 있다고 보았다. 언론 보도기사에 의하면 30본사 주지들 가운데는 대중들의 공론을 무시하고, 사찰 재산을 함부로 낭비하는가 하면 결혼을 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고기를 먹는 승려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1915년에 발족한 불교진흥회와 그 후신인 불교옹호회 등 재가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사업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9년 3·1운동이라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경험하면서 불교계도 많은 희생을 치뤘다. 3·1운동을 경험한 일본은 조선의 통치정책을 강압적인 무단통치에서 회유와 감시를 강화하면서 일정하게 문화적인 자유를 허용하는 문화정치로 바꾸었다.

문화정치는『동아일보』·『조선일보』와 같은 신문과 잡지의 발간을 허용하였고, ‘통치질서를 문란시키지 않는다’는 범위 안에서 각종 문화단체의 활동을 용인하였다. 일본의 통치정책이 이같이 바뀌자 불교계에서도 30본사 주지들과는 성향이 다른 청년 승려들 사이에서 본사 주지들의 전횡을 비판하고, 정법을 수호하며,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여 불교계를 혁신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 해 5월 12일 중앙학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으로 불교청년회 발기인 대회 개최에 관한 통지서를 발송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6월 6일 중앙학림에서 열린 발기인 총회에서 임시 실행위원을 선정하고, 6월 9일 임시 실행위원들은 중앙학림에서 조선불교청년회의 규칙 및 취지서를 제정하였다. 이들은 6월 20일 오후 1시에 각황사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때 발표된 취지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체로 이러하다. 지금 불교계의 상황은 외형적으로는 공화(共和)와 평등이라는 말이 난무하지만 말장난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교세가 쇠퇴하고, 지식면에서도 다른 종교에 뒤져있다.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동포애 마저도 싸늘하게 식어 사문의 형제가 해를 만나도 구하기가 어려워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조선불교의 현실은 천년 전에 지어진 낡은 집과 같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인데 의식(衣食)을 구하기 위하여 출가한 승려는 말할 것도 없고, 노승들은 여전히 옛날이야기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불교청년회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고해에 빠진 중생들과 불타는 집에서 고통 받는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발기한다고 하였다.

발기인은 강성찬·강도호·김상호·김정해·기상섭·도진호·이종천·이혼성·박영희 등 76명이다.

이러한 불교계 청년운동의 시원은 1910년 연말에 일어났던 임제종 설립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임제종 설립운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종단이었던 원종의 종정이던 이회광이 일본 불교 조동종과 연합하려는데 반대해서 조선불교의 독자성을 천명한 사건이다. 임제종 설립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한용운은 불교청년운동을 영·호남지방의 유수한 사찰에서 조직 활동을 해 본 경험이 없는 승려들로 구성된 까닭에 형식과 내용면에서 서툰 점이 많지만 그 정신만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젊은 청년들로 구성된 조선불교청년회의 활동으로 전개된 임제종 설립운동은 조일불교 연합책동을 무산시켰다. 그러나 이 때 창립된 조선불교청년회는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였고, 전국적인 조직망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후 침체되었다.

조선불교청년회는 창립 이후 토론회·강연회·교육사업·체육활동 등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불교계 현실을 개혁하려는 개혁운동이다. 청년 승려들은 관권과 결탁된 일부 주지 계층의 권위적인 행태를 시정하고, 불교계를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방향으로 개혁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조선불교청년회는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불교청년회의 지회는 평양·대구·안동 등의 지역과 전국 사찰에 두었다. 지회를 둔 사찰은 밝혀진 것만으로도 통도사·은해사·김용사·선암사·유점사·백양사·석왕사·관음사·범어사·표충사·건봉사·마곡사 등이다. 이밖에도 많은 지역과 사찰에 지회가 있었겠지만 기록으로 전하지 않아 자세한 전모는 알 수 가 없다.

1920년 12월 15일 조선불교청년회는 지방위원들과 간부들을 소집하여 유신예비회(維新豫備會)를 개최하고, 이어 16일에는 유신협의회를 개최하여 당시 불교계가 당면한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그 결과는 30본산연합사무소에 8개항의 건의문을 제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의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진설명>일제시대 불교개혁의 선봉 역할을 했던 조선불교청년회의 창립취지서.

조선불교청년회는 종래 30본산 주지들의 독단적인 사찰운영을 부정하고, 만사를 민중적 공의(公議)에 의해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30본산연합제규를 수정하여 위원장 아래 의사(議事)△서무△재무△교육△포교△법규부장을 둘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30본산연합사무소의 재정관리를 일원화 할 것을 요구하였다. 교육문제는 일요학교, 유치원, 보통학교를 신설해야 한다. 아울러 지방학교는 병합해야한다는 것과 도시에는 중학교를 경영할 것, 중앙학림은 전문학교로 승격시킬 것과 일본△중국△인도에 유학생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번잡한 의식의 개선, 포교사업, 인쇄물의 발간을 통한 교리의 전파와 홍보활동 등을 전개해야 할 필요성 등을 건의하였다. 이러한 구체적인 사업들이 실천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30본산연합사무소와 교섭할 교섭위원으로 김석두△이환해△이춘담△김경봉△김락순 등 15명을 선출하였다.

이들은 일본 불교와의 연합책동이 진행되었던 점과 교육과 포교사업이 부진한 점 그리고 재정운영이 불투명한 점 등 여러 가지 모순의 원인이 산중공의제가 시행되지 않은 데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산중공의제의 부활을 주장하였다. 혼미한 불교계의 상황을 극복하고 대중불교를 실현하기 위해 창립된 조선불교청년회의 주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는 이회광의 조일불교 연합책동을 저지한 것이었다. 불교청년회는 이회광을 조선불교를 망하게 하는 악마이며, 조선사회에 대한 중대한 죄인으로 규정하고, 4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4개항의 결의문이란 첫째 일본 임제종과 제휴한 맹약을 해제할 것, 둘쩨 일본 『중외일보』에 실린 연합책동 보도기사를 취소할 것, 셋째 이회광은 조선승려에 대하여 참회할 것, 넷째 만일 이회광이 일 개월 이내에 위에 열거한 내용을 실행치 않을 때 청년회는 상당한 제제를 가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결국 이회광의 제2차 조일불교 연합책동은 불교계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조선불교청년회가 성립될 수 있었던 배경은 1920년대 들어서 조선총독부의 정책노선이 표면단체의 설립을 허용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표면단체는 총독부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주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불교청년회는 1921년 말에 보다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보다 젊은층으로 구성된 일종의 행동대격인 조선불교유신회를 발족시킨다.

조선불교유신회는 불교계의 현안을 개혁하려는 개혁운동의 전면에 나서서 활동하게 된다. 이들의 현실개혁 요구는 1922년에는 일제시대 불교계를 구속하는 악법이었던 사찰령철폐운동으로 나타난다. 사찰령철폐운동은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일제시대 불교계의 최대의 과제였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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