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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즉 보리’ 가르친 혜가의 법향만 남아

기자명 법보신문

중국 선종(禪宗)사찰 순례기

2. 이조암(二祖庵)

<사진설명>소실산 발우봉 이조암은 법당 하나가 전부라고 할 만큼 형색이 초라하다.

달마대사는 서토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모았다.

“이제 때가 되었다. 너희들은 얻은 바를 말해보라.”

“제가 보기에는 문자를 집착하지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고 도를 삼는 것입니다.”(도부)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제가 알기에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보았을 때에 단 한 번 보고는 다시 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총지)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사대가 본래 공하고 오온이 있지 않으니,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습니다.”(도육)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이때 혜가 스님은 말없이 다만 공손히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고, 자기 자리에 곧게 섰다. 이를 본 달마대사는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면서 “내가 이제 그대에게 전하노니 그대는 잘 지키라”며 가사와 발우 그리고 능가경 4권을 전했다.

달마대사는 혜가 스님에게 가사를 전한 자리에서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해 어리석은 이를 제도하고자 함이었다. 한 꽃에서 다섯 개의 잎이 피게 될 것이니, 열매는 자연히 맺어지리라”는 전법게를 주었다. 동토 선종의 제2대 조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자, 제자가 스승의 법을 잇는 선종의 전등이 시작되는 장면이다.

이조 혜가 스님은 무녕 사람이며 속성은 희(姬)씨였다. 나이 30세에 용문의 향산사로 가서 보정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32세에 구족계를 받고 수행하기를 8년이 지난 어느 날 밤 “과위를 받으려하면서 남쪽으로 가 도를 가까이 하지 않고 어찌 여기에만 머물러 있는가”라는 신인의 말을 듣고 숭산 달마대사를 찾아 법을 구했다. 팔을 자르면서 법을 구한 자리에서 달마대사로부터 안심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은 혜가 스님은 달마 곁에서 6년여의 수행 끝에 법을 받고, 소림사가 있는 숭산 오유봉 건너편의 소실산 발우봉으로 수행처를 옮겼다. 이곳이 이조암(二祖庵)이다.

중국선종사찰을 찾아 나선 구법 순례단은 십리 산길을 걷는 대신 문명의 이기를 빌려 스키장에서나 볼 수 있는 리프트를 타고 10분도 안 걸려 이조암에 도착했다. 이조암은 아담한 전각 하나가 전부인 작은 암자다. 법당안으로 들어가니 혜가 스님의 좌상이 모셔져 있다. 혜가의 좌상은 금칠을 한 소상에 다시 옷을 입혀놓은 모습인데, 오늘날 중국 법당의 전형적인 모양새라고 할 수 있다.

네가지 맛 우물은 흔적 뿐

<사진설명>고승들의 묘탑 230기가 숲을 이룬 탑림.

법당 앞쪽으로 네 개의 우물이 있다. 전법제자 혜가의 수행처를 네 차례에 걸쳐 찾은 달마대사가 이조암에 올 때마다 하나씩 지팡이로 탁! 하고 쳐서 만들었다는 우물이다. 이 우물은 각각 쓴맛, 매운맛, 신맛, 단맛이 나는 우물이라고 해서 사미정(四味井)으로 불린다. 물론 지금은 그 물맛을 볼 수가 없다. 어쨌든 팔을 잘라 구법의지를 보인 연후에야 법을 설했던 달마대사가 물이 없어 고통받는 제자를 위해 각기 다른 맛이 나는 물길을 열어 보이며 정진할 것을 독려했으니, 그 자체가 또한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이조암에는 또 다른 우물을 하나 만들어서 작은 바가지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소림사에서 파견한 스님이 그 앞을 지키고 있고 우물 옆에는 보시함(?)이 놓여 있다. 물맛을 본 사람들 치고 이 함을 외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작은 암자에서까지 느낄 수밖에 없는 중국 사찰의 관광지화 풍경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중국 사찰에서는 고승들이 지팡이로 탁! 하고 쳐서 만들었다는 탁석천(卓錫泉)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부 사찰에는 탁석천 대신 호랑이가 발로 파서 만들었다고 하는 호포천이 있기도 하다.

이조암 앞쪽으로는 20여 미터 아래에 원나라 때 축조한 6각 전탑이 있고, 뒤쪽으로는 당나라 때 세운 4각 전탑이 있다. 이것이 발우봉 이조암에서 형상으로 볼 수 있는 전부다.

혜가 스님은 스승 달마대사가 입적한 후 유골을 수습해 강기슭에 묻고, 이후로는 교화에 주력했다. 혜가 스님이 달마대사로부터 마음을 주제로 한 안심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이후, 안심법문은 중국 선종사에서 핵심적인 물줄기가 되었다. 혜가 스님은 교화에 나서면서 대중들에게 “무명과 지혜, 그리고 번뇌와 보리는 같은 것이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설파했다. 그러던 중 551년 무렵 40대의 장년이 혜가 스님을 찾아 절을 하고는 이름도 밝히지 않고 청했다.

<사진설명>달마대사가 지팡이로 물길을 연 4개의 우물 가운데 하나.

“제자는 풍병(한센병)을 앓고 있으니 화상께서 제자를 위하여 참회해 주십시오.”

“그대는 죄를 가지고 오너라. 죄를 참회해 주리라.”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의 죄는 참회가 끝났다. 그대는 그저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기만 하라.”

제자는 여기서 크게 깨닫고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이 안과 밖과 중간에 있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마음이 그렇듯이 법과 부처가 둘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라며 예를 갖췄다. 혜가 스님은 그가 법기임을 알아보고 곧 머리를 깎아 주면서 “그대는 승보이니 승찬(僧璨)이라 하라”하고 이름을 지어주고는 법을 전했다.

법당 하나 탑 2개가 전부

승찬에게 법을 물려준 혜가 대사는 업도(하북성 임장현)에서 법을 펴던 중, 대사의 회상에 사람들이 운집하는 것을 시기한 변화법사가 현령인 적중항에게 사도로 모함하면서 처형당했다. 중국 선종의 2대 조사 혜가 스님은 세수 107세에 이르러 그렇게 모함을 받아 처형되면서도 자신이 떠날 때를 미리 알았기에 의연하게 이생에서의 연을 다했다.

세월이 흘러 1990년대 들어 한중일 3국 불교의 황금연대를 강조했던 전 중국불교협회 조박초 회장은 혜가 스님이 법을 폈던 안휘성 안경시 악서현 사공산의 이조사를 복원하면서 “이조는 중국선종의 초조라고 할 수 있다. 만일 혜가 대사가 아니었으면 중국불교 선종의 전개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혜가 대사를 찬했다. 이는 오늘날 중국인들이 혜가 대사에 대한 존재가치를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조암에 오를 때 탔던 리프트를 타고 내려와 10여분 정도 걸으면 거대한 탑림(塔林)이 나타난다. 당나라 때부터 청나라 때까지의 고승들 묘탑으로 230여 기에 달한다. 형태가 다양해서 중국의 고대 전탑을 연구하는 중요한 문화재이자 석탑예술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하남성 소실산=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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