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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차의 춘궁기

기자명 법보신문

차의 춘궁기를 나는 법

춘분(春分)이 지나고도 춘설(春雪)이 분분(紛紛) 터니 서울 근교 매화나무는 이제야 겨우 올망졸망한 꽃망울을 막 피울 참인가 보다. 필시 그윽한 암향(暗香)으로 벌뿐만 아니라 문향객(聞香客)을 유혹할 것이다.

산하(山河)의 만물(萬物)들은 봄맞이가 한창이다. 대나무 아래 차나무는 봄꿈을 깨었을까. 이미 바닥난 차 통을 안고 이리저리 궁리해 본다. 햇차가 나오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텐데, 슬며시 조바심이 일어난다.

기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춘궁기(春窮期)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백화사에 머물던 어느 날 응송 박영희(1893~1990)스님에게 차 춘궁기를 지내던 얘기를 듣고 파안대소(破顔大笑)하던 기억이 난다. 불과 2~3십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지 못했다. 겨우 가양(家釀)할 만큼 차를 만들었으니 서너 곳에 인심을 쓰다보면 햇차가 나기도 전에 양식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여간 절약하지 않고는 일 년을 넉넉히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간혹 차가 떨어져 며칠 동안 차를 거르다 보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하루 이틀 견디다 못해 뜨거운 탕수를 다관(茶罐)에 부었다가 마시는 것으로, 그야말로 빈 다관에 물을 부어 다관을 우리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일처럼 생각되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원리, 오랜 세월 차를 가까이 하는 다인(茶人)의 다관에는 해 묵은 경륜만큼이나 찻 진이 배어 있기 마련이다.

이 검은 빛의 찻 진은 차를 즐기는 사람의 정도에 따라 두껍게 층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것을 우리는 방법이다. 한 바탕 웃음거리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가볍지 않은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실제로 필자가 경험해 보니 달착지근한 차 맛이 청아하다. 은은한 차향이 살짝 들어 그 기품이 담담한 이의 품격을 닮았다. 순일한 이 맛에 기미(氣味)를 살린다면 훌륭한 차 품이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마치 여백이 넉넉한 담담한 한 폭의 문인화(文人畵)처럼, 차의 은미(隱微)한 경지는 아마 이 정도이면 족한 것이 아닐까.

한편 춘궁기의 임시방편(臨時方便) 중 하나는 묵은 차 잎으로 차를 만드는 방법이 있다. 묵은 잎은 뻣뻣하고 강하기 때문에 덖어 찧는다. 유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찻잎을 으깨는 것이다. 대강 뻣뻣한 기운과 생기(生氣)만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조악하기 그지없다. 대강 이렇게 만든 차는 맛이 강하고 뻣뻣한 장작 같아서 다관에 넣어 우릴 수가 없다. 큰 주전자에 차를 놓고 끓여 마시는 것이다. 차 맛이야 없지만 시원하고 거친 맛이 그래도 춘궁기를 이기는 방편 중 하나였다. 조선 후기 차가 자라던 산지에서 감기, 이질에 마시던 차의 형태와 비슷하다.

이덕리(李德履 :1728~?)의 ‘다설(茶設)’에서 차의 가치를 알 지 못한 수령의 무지를 이렇게 탄식하지 않았던가.

“동복(同福)은 작은 읍인데 얼마 전 들으니 고을 수령이 8말의 작설을 따서 이것을 끊여 고(膏)를 만들었다고 한다. 대저 8말의 작설이 다 크기를 기다려서 딴다면 수 천근의 차를 만들 수 있고 또 8말을 딸 노력이면 수 천근의 차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저 수령이 다소(多少)와 난이(難易)를 동 떨어지게 하여 나라를 이롭게 하는데 쓰지 못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춘궁기를 해학적으로 보낸 시대는 차를 아끼고 즐기는 사람들의 재치 중 하나요, 좋은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시대의 안목도 있으리라. 얼마 후면 햇 차를 만든다.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진정 차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알고자 했는가.

동아시아 차 문화 연구소 소장 dongasiach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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