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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너’ 초월한 내 안의 부처님 믿어라

기자명 법보신문

밖에 있는 부처님 믿고
자기를 중생이라 학대

자기의 부처님을 찾아서
본래 모습대로 당당해야

13. 三歸 삼귀의

<사진설명>황매현 오조선사에는 육조 혜능대사가 방아를 찧으며 수행하던 곳이 있다. 고우 스님이 방앗간 앞 화랑 벽면에 그려진 혜능 스님의 수행 일화를 보고 있다.

자기의 마음이 바름(正)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아 곧 애착이 없나니,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離欲尊)이라고 한다.

‘바름으로 돌아간다’는 말도 역시 ‘있다-없다’를 초월한 것이 바른 자리입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애착이 생깁니다. 남편에 대한 애착, 아내에 대한 애착 그러면 그 애착이 상대편으로 하여금 굉장히 피로하게 합니다. 그 피로가 누적이 되면 싸움으로 갑니다. 그래서 나중에 도장 찍는 데까지 가는 거예요.

그럼, 애착 없이 무관심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지요. 애착을 안 가지면 진심으로 참된 사랑을 하게 됩니다. 집착하면 이기적인 사랑을 하지요. 나한테 잘해주면 좋고 잘 안 해주면 화나고 섭섭하고….

그런데 집착을 벗어난 사랑을 하게 되면 자기한테 잘해준다고 좋아하고 잘 안 해준다고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게 돼요.

그래서 나는 젊은 부부가 오면 “너희가 사랑을 아나?” 그래요. 늙은 중이 앉아서 사랑을 아나 하니까 모두 웃습니다. 웃는데 내가 “너희들 하는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 아니냐?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웃음을 그칩니다.

얼마 전에도 약혼한 사이라면서 둘이 왔길래 덕담을 했어요. 지구상에 인구가 60억인데 60억대 1로 선택했으니까 서로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 6억 인구 중에 딱 한 사람 서로서로 선택했잖아요. 서로 고마운 줄 알고 그게 고마움이 느껴지면 일상 살아가는데 고마운 일들이 많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래서 섭섭한 것보다 고마운 것을 찾아가면서 살면 진짜 사랑을 한다.

이기적인 사랑을 하면 자기한테 이익 안 되면 돌아가 버려요. 그러니까 자꾸 도장 찍는 거예요. 상대가 있는데 같이 잘해야지 한 사람만 잘 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수단으로 그렇게 하면 섭섭하거든요. 수단이 아닌 정말 ‘나다-너다’가 없는 그 자리에서 보면 서로 고마운 것을 하루에 한 개도 안 보이던 것이 보여요. 그렇게 되면 사랑 안 할래야 사랑 안 할 수가 없어요. 왜 도장 찍어요?

애착하는 것은 정말로 이건 사랑하더라도 상대편을 굉장히 피곤하게 하고 괴롭히는 겁니다. 이게 심하면 의처증, 의부증이 나와요. 그래서 애착하는 것, 이게 사람만이 아니라 재물도 그렇고 애착은 좋은 게 아닙니다. 애착하면 진정으로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없어요. 양변을 여의고 보는 사람이라야 만이 진정으로 그게 사람이 되었든 물건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애착을 여읜 사람이 욕심을 여읜 존귀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衆中尊)이라고 한다.

무슨 말이냐? 우리 자성 속에 번뇌 망념이 있더라도 이 소리인데, 마음에 있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나다-너다’ ‘깨끗하다-더럽다’를 초월한 사람이 이해관계로 싸우는 그 세속에 들어가 살더라도 하는 말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양변을 여의었기 때문에 자성이 거기에 물들지 않아 그것을 중중존(衆中尊)이라 이름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불이익을 주는 사람에게도 웃으면서 연민할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마음이 허공처럼 한량없이 넓은 사람이에요. 양변을 여의면 마음이 굉장히 넓어져요. 허공 같이 넓어지니까 어떤 자기 불이익을 받더라도 이해하고 용서합니다. 그 용서도 그냥 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부처님인데 잠시 착각에 빠져 자기에 집착하다보니까 나한테 이렇게 불이익을 주는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당신이 부처다” 전제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깔보거나 업신여기거나 하지 않아요. ‘너는 중생이니까 나는 상대 안 해!’ 이러면 깔보면서 교만에 빠지는데, 그렇지 않고 ‘당신이 부처’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평등하게 보는 겁니다.

부처님이 하는 연민은 상대편을 깔보는 게 아닙니다. 존중하는 거예요. 집에서 시험해 보세요.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처님으로 존중해놓고 이해하시면 훨씬 자기 마음도 교만하지 않고 훨씬 효과가 날 겁니다. 자기 존경하는데 싫다고 하는 사람 어디 있나요.

범부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삼귀의계를 받는다.

우리 존재원리가 부처님인줄 모르고 중생으로 알고 착각에 빠져 매일 싸운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처님인줄 알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삼귀의계를 받는다. 또 이 삼귀의계는 밖에 있는 부처님, 밖에 있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 스님 이렇게 보고 날마다 밖에 있는 삼보를 향해서 삼귀의계를 받는다는 것이죠.

그러나 만약 부처님에게 귀의한다고 할진대는 부처가 어느 곳에 있으며, 만약 부처를 보지 못 한다면 곧 귀의할 바도 없다.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했는데 부처님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귀의해서야 되겠느냐? 하십니다.

이미 돌아갈 바가 없다면 그 말이 도리어 허망될 뿐이다.

‘귀의한다’는 그 말이 헛소리다. 부처님도 없는데 어디에 귀의하느냐? 이 말이에요.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알고 귀의해야 그것이 진실한 귀의가 되지요. 자기가 부처인줄도 모르고 부처님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귀의한다고 하면 이 말은 허망합니다.

우리가 믿는다, 믿는다고 하는데 뭘 믿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내 밖에 있는 부처님을 믿는 것은 바로 믿는 게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부처님, 그럼 자기 안에 있는 부처님은 어떤 부처님이냐?

‘나다-너다’ ‘옳다-그르다’를 초월해 있는 부처님이에요. 그걸 믿어야 돼요. 그걸 안 믿으면 믿는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또 잘못 믿는 사람이 있어요. 밖에 있는 부처님 믿고 자기 부처는 안 믿고 자기는 중생이라고 학대하다 보면 진짜 중생이 되어 버려요. 자기 스스로 학대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자기 부처님을 찾아서 너의 본래모습대로 당당하게 살아라 이겁니다. 그래서 기도하거나 염불하거나 봉사하시거나 참선하시거나 뭘 하시든지 좋습니다. 그 믿음에 대한 것을 바로 하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염불하시는 분도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열심히 염불하시고 기도하시는 분도 그걸 발견하기 위해서 열심히 하시면 참선하는 분도 열심히 하시며 봉사하는 분도 열심히 하시면 그것이 진짜 봉사이고 염불이고 기도이고 참선입니다.

밖에 있는 부처님한테 자꾸 귀의하고 믿고 뭔가 부처님이 나한테 주실 거라고 생각해서 자꾸 밖으로 찾고 추구하면 이것은 바로 믿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안 되면 섭섭하지요. 이 문제 해결해줄 줄 알고 내가 일주일 동안 용맹기도를 했는데 결과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그런 허망한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도 바로 해야 됩니다.

자성불(自性佛)을 믿는 얘기가 계속 나왔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그걸 바탕으로 하고 그걸 제가 정견(正見)이라고 말하지요. 그것을 바로 믿고 거기에서 자기 능력에 따라서 참선하실 분 참선하고 염불하실 분 염불하고 기도하실 분 기도하고 봉사하실 분 봉사하고 그렇게 하면 목표는 같습니다.

여기에는 우열이 없습니다. 다만 참선은 늘 하는 얘기지만 손가락 보다 달을 표현하는 말을 많이 쓰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른 수행보다는 더 많습니다. 왜냐? 거기에는 항상 달 얘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다른 수행에서는 달 얘기도 하긴 합니다. 하지만, 확률적으로 손가락 얘기를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남아 불교도 역시 손가락 얘기를 많이 하고 있고요. 이 참선은 다른 수행방법보다는 달 입장에서 항상 법을 쓰고 있기 때문에 순간 깨침을 할 수 있는 그런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참선의 또 한 가지 장점은 위빠사나나 다른 수행 방법은 테크닉에 가깝습니다. 자기가 계속 걸어가는 거 주시하고 말하는 거 주시하고 하는 테크닉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참선은 진발심이 나서 화두 의심만 고리가 걸렸다 하면 단박에 깨칠 수가 있습니다. 남악회양 스님이 마조 스님한테 ‘수레가 안 가면 수레를 때려야 되느냐? 소를 때려야 되느냐?’ 했듯이 테크닉은 수레를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발심이 나서 의심만 잘 걸렸다 하면 이것은 소를 사정없이 회초리로 때린 것이기 때문에 정말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로 바로 순간적으로 가버릴 수가 있어요. 그런 점이 참선의 장점입니다.

그런데 참선도 테크닉에 가깝게 하는 분이 있습니다. 앉는 것 배워서 그것에 집착하는 분들이 있어요. 앉는 거 배우고 의심하는 방법을 배워 가지고 억지로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테크닉입니다. 거기에다가 염화두니, 송화두니 해가지고 염불하듯이 ‘이뭐꼬?’ ‘이뭐꼬?’ 하는 것은 진짜 테크닉이에요.

참선도 사실은 이런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찌 보면 대다수입니다. 그러나 그 법 쓰는 것만은 다른 수행 방법보다는 달 입장에서 하기 때문에 다르다. 이런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정견을 갖추고 바른 신심이 생겼을 때 가능한 것이지 그게 안 되면, 되면 되고 안되면 말고 식으로, 로또복권 뽑는 것과 같이 그냥 하루아침에 한 방에 뭐가 된다고 기대하고 하면 실패할 확률이 많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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