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두석장 박 문 열
⑦ 두석장 박 문 열
  • 법보신문
  • 승인 2007.04.1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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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쇠 두드리며 마음 밭을 갈다
<사진설명>40년 두석장의 길을 걸은 그에게서 무소유 삶을 사는 선승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자물쇠에 관심이 많았던 박문열 씨는 진주의 장석수집가 태정 김창문 씨가 7단 자물쇠를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가 머무르고 있는 진주로 향하고 있었다. 대중 전통가구에 달린 자물쇠는 기역자로 구부러진 쇳대를 넣은 후 고삐를 빼는 단순한 형식의 2단 자물쇠. 그러나 패물이나 주요 문서를 넣어두는 조선시대 대감 집 가구의 자물쇠는 2단이 아닌 5단, 6단 등 차원 높은 기기묘묘한 자물쇠였다.

1992년 자물쇠를 주제로 설립한 사립 박물관인 태정박물관에 도착, 그 유명한 7단 자물쇠를 본 순간 그는 이 자물쇠를 복원시켜보자는 원력을 세웠다. 1979년부터 매년 장석 관련 유물을 한 가지씩 재현해 전통공예대전에 출품해 오던 박문열씨였기에 그의 이러한 생각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40년 장석제작 고집

그러나 7단 자물쇠를 육안으로 볼 수는 있었지만 사진은 물론 스케치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별도리 없던 그는 자물쇠를 열고 끼워보며 개폐방법을 외우고, 손가락 끝의 미세한 세포 감각까지 동원해 쇠의 두께 까지 익혔다.

곧바로 서울 공방으로 직행한 그는 이 7단 자물쇠 복원에 전력 매진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침식을 잊고 7단 자물쇠를 재현해 보려 했지만 실패만 거듭. 분명 치수는 다 맞는 듯 한데 쇳대가 자물통의 구멍 안으로 전혀 들어가지를 않는 것. 조선시대 자물쇠는 언뜻 보기에 이리저리 몇 번 움직이면 장치를 풀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사진설명>황동촛대.

자물쇠에 붙어 있는 아주 작은 장치 하나도 이미 결정된 단계, 즉 4단계에서 우측으로 돌린 후 앞으로 민 다음 다시 오른쪽 아래로 비틀어 빼야만 함에도 이를 1,2,3,5,6,7 단계에서 조작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수십여 차례에 걸쳐 다시 시도해 본 후 무릎을 탁 쳤다. 쇳대를 45도 각도로 구부려야만 구멍 안으로 들어가게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난관을 극복하며 재현한 7단 자물쇠는 1993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경기도 벽제에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박문열 두석장의 작업실.(031-969-1455) 공방이라고는 하지만 작업실은 컨테이너였다. 올해 59세인 그는 일평생 두석일만 해 온 장인답게 날카로우면서도 초롱초롱한 눈을 갖고 있었으며 인터뷰에 내내 던진 한마디 한마디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옹골찬 초로라는 강인한 인상이 첫 눈에 박힐 정도다. 키 역시 150센티미터 정도인데 “어려서 옥수수죽만 먹어서 그렇지”란다.

1950년 경북 경주에서 3남 4녀 막내로 태어난 그는 휴전 이듬해 목수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과 함께 상경, 마포구 도원동 효창공원 인근 방공호에 터를 잡았다. 어머니는 시장에 떡을 팔러 나가고, 형과 누나들 마저 학교로 흩어지고 나면 남는 건 어린 박문열 혼자였다. 그는 깡통을 들고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고 이도 여의치 않으면 구호소에서 나눠주는 옥수수죽을 얻어 와 좁은 방공호 안에서 혼자 먹었다. 쓸쓸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네다섯살의 어린 박문열에게 이러한 가난은 그저 일상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림에 남다른 재주가 있어 자주 상을 타곤 했다.

“남들이 버린 크레파스로 그렸지. 간혹 길에서도 주울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휴지통 뒤져서 찾았어. 나만 그런 것도 아니야. 당시 가난한 학생 다, 다 그렇게 살았어요.”

초등학교 졸업 후 주물공장에서 일 하던 그는 1968년 누이의 소개로 시가 쪽 인척인 윤희복씨를 만난다. 윤희복 씨는 당시 인사동에 공방을 두고 고가구 장석을 만들고 있던 장인이었다. 두석장 여정의 첫 걸음이었고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본격적으로 장석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금속을 녹여 쇠까치(금속덩어리)를 만들고 일일이 망치로 두들겨 편 후 정으로 쪼아 형태를 만들어 갔다. 당시에는 정 종류도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정 하나로 장석도 자르고 무늬도 새겼다.

<사진설명>비밀자물쇠류.

“평안도 박천에서 유래한 숭숭이 반닫이는 시우쇠를 정으로 쪼아 무늬를 투각시키는 작업인데 어렵지만 참 재미나게 배웠지.”

이 때 배운 기법으로 1998년 전통공예대전에 출품한 ‘숭숭이 반닫이 장석’은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장석에 다양한 무늬를 새겨 넣기 위해 상감, 박상감, 은입사, 투각, 양각 등의 기법도 하나씩 스승으로부터 배워나갔다. 그는 스승으로부터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발전을 위해 독학도 마다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인사동을 찾았다.

“인사동에 나가면 다양한 금속품의 세계를 경험해 볼 수 있었거든. 외출 할 때 붓과 먹을 넣을 수 있는 묵호, 붓을 올려놓는 필가하며 다양한 작품들이 즐비했지.”

그의 이러한 독학은 전통장석 뿐 아니라 현대감각을 살린 창의적인 작품을 만드는데 유용하게 작용했다고 술회한다.

“선조들 작품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 좀 떨어져서 보면 아름답고, 가까이서 보면 오묘해. 시우쇠 하나도 허투루 만드는 법이 없고. 근데 요즘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게 있어요. 아름다우면서도 오묘한 장석이 절대로 목가구의 미려함을 해치지 않는다는 거야. 상생이고 조화라 할 수 있지요.”

목가구와 장석의 조화. 이는 두 장인의 조화요, 덕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20년 동안 변치 않는 우정을 나누는 장인 한 사람이 있다. 박명배 소목장.

“바늘과 실 같은 존재라 할까? 지금은 박 소목장이 팩스로 보낸 목가구 그림(사진)만 봐도 어떤 장석을 써야 할 지 금방 알아채.”

그의 장인 손길은 경복궁과 창덕궁, 전통사찰에 배어있다. 부여정림사지, 통도사 금강계단, 영광 불갑사 대웅전, 통도사 금강계단, 불갑사 대웅전, 구인사 조사전, 속리산 법주사, 창덕궁 낙선재 및 내의원, 경복궁 내 건청궁, 등의 장석물 보수와 전통자물쇠를 제작했다.

“장인은 가난하게 살다 가는 법”

마포에 작은 임대 아파트가 있지만 그는 대부분의 일상을 이곳 벽제 작업실에서 보낸다. 고정 수입이 없는 그로서는 전통복원 불사에 참여해 나오는 수입이 전부다. 하지만 이도 여의치 않다. 정부 주도하에 이뤄지는 복원사업이라 해도 대목과 소목, 단청 부분에 비해 장석 분야는 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아. 강의 수입도 있거든.”

<사진설명>백동평안도반닫이.

그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제공한 대치동(大峙洞) 전통문화 체험관 ‘한국문화의 집’(Korea Cultural House)에서 두석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그래도 그의 살림이 넉넉지 않음은 자명한 일.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휴전 이후의 가난한 서민의 고통을 이겨 낸 그이지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음에도 별다른 살림 변화는 없어 보이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장인은 이런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배고파야 해. 배부르면 작품이 나오지 않는 법이야. 배고파야 살기 위해서라도 연구하지 안 그래요? 장인은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가는 겁니다.”

무소유의 삶을 사는 그에게도 바람은 있다.

“경기도 한적한 곳에 한 이백평 땅만 있어도 좋기는 하겠어요. 작업실과 함께 쇳물 녹이는 가마도 설치하고, 형편 닿으면 작은 전시관도 마련해 내 작품도 보여주고 싶지. 희망사항일 뿐이야.”

사실, 그는 올해 당장 작업실을 어디론가 급히 옮겨야 할 처지다. 작업실 터가 매각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정 하나를 들고 해맑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옛날 보다는 참 좋아진 거예요. 작업 공구도 다양해져 그만큼 일하기도 수월하고 무엇보다 두석장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잖아. 후학들은 나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일 할 수 있을 거야.”

인터뷰 도중 처음 보는 미소에서 장인으로서의 열정과 덕이 단박에 느껴졌다. 그의 호는 심경(心耕). 쇠를 두드리며 마음을 가는 사람 박문열 두석장. 그에게서 마음 한 자락을 갈고 닦는 탁마의 선기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목가구 장석 만드는 사람
두석장(豆錫匠)이란

<사진설명>복장함.

일반적으로 두석장이란 목조가구에 붙이는 각종 장석(裝錫)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경국대전』‘공전조’(工典條)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일찍이 금속공예가 분업화되어 두석장, 은장, 금박장, 환도장, 조각장 등의 장인들이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있었다.

문갑, 탁자, 미닫이 같은 소목가구에는 수자문(壽字文), 쌍용문(雙龍文) 등의 장식문양 뿐만 아니라 손잡이 장식이 필요했는데 이를 전문적으로 만든 사람이 두석장이었다. 장석은 구리와 주석을 합금해 만들었는데 이를 ‘두석’이라 이름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황동, 백동은 물론 시우쇠(철)를 사용해 장식을 만드는 사람을 통털어 두석이라 했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수공업의 발전과 함께 민간수공업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돼 있다.

2000년 7월 22일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선정된 두석장 제 64호 박문열 씨는 목조가구에 주로 쓰이는 손잡이, 자물쇠 뿐만 아니라 은입사 문양 등의 상감기법까지 터득해 쇠를 이용한 독특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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