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선법회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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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보신문
  • 승인 2007.04.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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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 찬탄-실천하는 스승이 선지식
보살같은 원력-자비 갖췄으면 귀의처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 스승이나 선지식을 만나야 된다고 했는데, 저희들로써는 올바른 선지식이 누구인지 가늠할 길이 없습니다. 어떤 분을 의지해서 구도의 길을 가야 합니까.

세간의 모든 학문과 기술도 그러하겠지만 구도의 길에 있어서 선지식을 만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부처님은 구도에 있어 올바른 선지식을 만나는 일은 도의 전체를 이룰 만큼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간혹 혼자서 경을 보고 혼자 수행법을 택하여 수행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수행의 발전을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칫, 오류에 빠질 수 있으므로 즉시 생각을 달리하여 참된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나라의 불교 현실에서 정법을 찾고 올바른 스승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도량이 기복과 가피와 영험을 중심으로 신도들을 이끌고 있고, 그나마 수행을 가르친다 하여도 출가한 스님이 아닌 재가 불자들이 수행을 지도하는 분들을 만나 가르침을 듣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래에는 명상 바람을 타고 불교계 밖에 갖가지 마음공부를 말하는 단체들이 생겨났고, 수행을 상업적 수단으로 삼아 ‘나도 깨달았다’ ‘너도 깨달았다’ 하면서 선지식 행세를 하기도 합니다.

불교의 전통이 잘 살아 있는 미얀마나 태국 같은 곳에서는 누구든 간에 부처님이 설하신 삼장에 근거하지 않은 설법을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수행 좀 했다 해서 마음대로 자기의 체험을 남들에게 가르치거나 멋대로 경의 내용을 해석하면 교단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남방불교 승단의 호법기구는 스님들의 계율은 물론 설법의 내용까지 간섭하여 부처님의 정법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심의합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불교는 비빔밥과 같이 되어서 정과 사가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선지식과 악지식이 무엇이 다른지 도무지 가를 수가 없습니다. 종단의 호법기구는 스님들의 기강에만 문제를 삼을 뿐, 스님이나 수행자들의 설법내용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법이 횡행하고 사이비들이 판을 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선지식은 부처님처럼 법을 환히 깨달은 분입니다. 일체 번뇌를 타파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대자비심으로 갖가지 방편을 자재할 줄 아는 스승은 더 할 나위 없는 선지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분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스승을 의지해서 수행의 좌표로 삼아야 하느냐, 한 마디로 팔정도를 찬탄하고 실천하는 스승입니다. 부처님이 몸을 버리고 반 열반에 드실 때에 마지막 제자가 120세의 노인이었던 슈바드라였습니다.

이 슈바드라의 질문 가운데 ‘부처님이 반 열반 후에 많은 종교가 생기고 많은 스승들이 나타나 이것이 진리다고 외칠 것인데 그때에는 누구를 따라 가르침을 배워야 됩니까’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곧 ‘팔정도를 설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는 스승으로 삼아도 좋다’였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불자로서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어 왔던 팔정도가 역시 선지식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진을 하고 깨달음을 말하며 기이한 신통을 구사한다 해도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실천하고 설하지 않는 수행자는 절대 선지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팔정도, 여기에 부처님이나 대보살들과 같은 원력과 자비를 갖춘 분이라면 그야말로 일체중생의 모범이며 귀의처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유마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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