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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인욕의 승리

기자명 법보신문

상업화에 忍은 어리석음으로 치부돼
인욕은 서로 화합케하는 공존의 원리

우리의 문화는 농경의 문화이다. 네 계절이 분명한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문화이다. 봄이 되면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가꾸고 가을에는 거두어들여 겨울에 한가로이 지냈다.

이러한 순환적 주기 속에서 느긋하게 기다리는 품성이 이루어져 참는 미덕이 형성되었다. 그러함에도 수양의 한 방편으로 항시 ‘참아라’ 하고 가르쳐 왔다. 여인의 삶에 어려움이 시집이라는 남의 집을 내 집으로 삼고 사는 일이다. 그러기에 시집보내는 어머니는 ‘참을 인(忍)’자 셋만 가지면 무엇이든 이겨낼 것이라고 타일러 보낸다.

농경의 사회에서는 참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루어낼 수가 없다. 아무리 조급히 굴어도 봄날에 뿌린 씨앗은 여름 지나 가을이라야 수확할 수가 있고, 겨울철의 배고픔이 있어도 참고 견디면 봄철의 새 싹이 주린 창자를 채워준다. 기다림의 참음이 그대로의 자연 순응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문화는 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곧 농경문화가 상업문화로 변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생산 수단이 있더라도, 상업적 유통이 없으면 생산적 결과의 이용이라는 실리가 없다. 이 상업의 유통에는 기다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생각할 수가 없다. 촌각을 다투어 이윤이 되는 장소로 이동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상황의 변화에서 현대인의 심성도 변해 가고 있다. 기다림의 참음이 아니라 ‘빨리’라는 내달음의 발길을 재촉하게 된다.

바다 건너 어느 대학의 강의실에서 끔찍한 살상이 있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따지기 이전에 왜 순간적 충동을 참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온 지구인의 한결같은 바람일 것이다. 여기에서 새삼 ‘참을 인(忍)자 셋만 가져라’ 한 우리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실감하게 한다. 이것이 종교적 이념의 신조로 넘어가면 그냥 참음이 아니라, ‘욕을 참아라[忍辱]’라 한다. 우리의 역사에는 이 인욕의 실천으로 시공을 뛰어넘어 살아 있는 분이 있다.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處容)이다.

처용은 동해 용왕의 아들이었는데 헌강왕에게 보내져 당시 서울인 경주에서 살았다. 헌강왕은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미인으로 아내를 정해 주었다. 그러나 활량기가 많은 처용은 밤마다 장안 거리를 휩쓸고 놀았다. 이 틈을 엿본 역신(疫神)이 그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밤늦게 돌아온 처용이 이 상황을 보고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처용가’이고, 가사의 내용은 네 개의 다리 중에 둘은 나의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이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춤까지 덩실덩실 추었다.

이 광경을 보고 견딜 수 없게 된 역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넙죽 절을 하며 ‘이제부터는 당신의 그림자가 있는 곳도 얼씬 않겠노라’ 하며 떠났다. 이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그려 집 앞에 매달았다. 돌림병을 맡은 역신이 ‘얼씬도 않겠다’ 했으니, 병의 예방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추었던 춤은 ‘처용무’가 되었고, 처용의 얼굴은 ‘처용가면’이 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으니, 순간적 인욕의 처신이 시공을 초월해 살아남게 한 것이다.

상황을 바꾸어 처용이 잠자는 역신을 불러 일으켜 결투의 일격을 가하여 통쾌하게 승리한 것으로 설정해 보면, 이것이 현대인의 실상일 것이다. 그렇게 되었으면 처용은 지금까지 생존할 수가 없다. 격투의 항복은 순간의 승리이지 영원한 승리가 될 수 없다. 마음으로 감복된 승리가 영원한 승리이다. 고려시대에는 처용가에다 살을 붙여 “신라시대소성대 천하태평라후덕(新羅盛代昭盛代天下泰平羅睺德)”이라 했으니, 여기 라후의 덕인 라후라(羅睺羅)는 부처님 당시 뛰어난 10대제자 중에 인욕으로 일컫는 분이다. 처용은 바로 부처님의 제자 라후라의 인욕의 화신인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노래 처용가를 세계문학의 앞자리에 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sosuk0508@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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