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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신라 진성여왕

기자명 법보신문

탕녀-개혁가 상반된 평가

“삼촌인 각간 위홍과 불륜…신라멸망 장본인”
“고려 유학자 김부식 의한 억울한 누명” 이견”

우리 역사에는 세 명의 여왕이 등장한다. 신라의 선덕과 진덕, 진성이 그들이다.

그 중 선덕과 진덕여왕은 지혜롭고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해 여성으로서의 행복마저 포기했던 성군(聖君)으로 표현되는 반면, 진성여왕은 줄곧 ‘탕녀’라는 이미지로 그려져 왔다.

숙부인 대각간 위홍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던 여왕, 위홍을 지나치게 신임해 국정을 도탄에 빠뜨렸고, 위홍이 죽은 뒤에는 몇몇 미소년들을 총애해 민심을 흉흉하게 했으며, 최치원과 같은 인재를 포기함으로써 결국 신라멸망을 부른 주역으로 역사서들은 평가하고 있다. 과연 그녀는 신라 천년의 왕국을 멸망시킨 주범이었을까. 『삼국사기』의 기록에서처럼 정말로 그녀는 몹시 남자를 밝혔던 음란한 여인이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 ‘그렇다’는 단정적 평가를 내리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없지 않다.

진성여왕이 재위에 있었던 기간은 887년부터 897년까지 약 11년간이다. 역사학자들은 신라사회를 상·중·하의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그 중 하대는 신라사회의 붕괴가 이루어진 시기로 파악된다. 신라 하대사회가 시작된 765년 혜공왕 대부터 진성여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약 120년간 무려 20명의 왕이 바뀌었고, 그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6년이었다. 진성여왕이 즉위할 즈음 이미 신라의 정치적 장악력은 지금의 경북 지역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견훤이 후백제를 자칭한 것도 진성여왕대였으며, 궁예의 후고구려 또한 이 때 위세를 떨쳤다. 여왕 재위 10년에는 서라벌 지근거리인 서부 모량리까지 도적떼가 쳐들어올 정도로 혼란은 심각했다.

이 같은 정황으로 볼 때 이미 120여 년간 혼란의 시기에 접어든 신라사회는 붕괴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따라서 진성여왕의 실정을 신라사회의 붕괴를 초래한 ‘결정적인’ 계기로 파악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실시한 첫 번째 정책은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모든 주와 군의 조세를 1년 간 면제하는 조치였다. 그런데 3년 뒤 국내 여러 주와 군에서 납세를 하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어려워졌다. 이에 왕이 사신을 파견해 납세를 독촉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이는 신라의 조세제도가 이미 붕괴된 지경에 이르렀으며, 진성여왕이 실시한 면세조치 또한 지방정부로 전달되지 않았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또 지금까지는 최치원이라는 유능한 학자가 대당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입국했으나 진성여왕에게 제안한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관직을 버리고 전국을 유랑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894년 “최치원이 시국에 관한 의견 십여 조목을 작성하여 바치자 왕이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해가 885년이니 진성여왕이 즉위하기 2년 전이다. 한림학사를 역임하던 그가 6두품 출신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 관위인 아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진성여왕의 은덕이었다.  따라서 진성여왕이 최치원의 시무 10여조를 받아들인 것은 일종의 개혁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해야 옳다. 그녀는 또 치세기간 동안 신라 전통 향가를 집대성해 『삼대목』을 발간했다. 신라 향가를 집대성했다는 것은 당시 대당유학생이나 유학자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신라 고유의 문화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문화정책의 일환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모순이 극에 달했고, 진골 귀족들이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는 신라사회에서 고작 6두품 출신인 최치원의 개혁안이나 진성여왕이 꿈꾸던 문화정치는 쉽게 실행될 수 없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적어도 개혁의 실패는 어리석은 여왕이 인재등용을 거부한 탓이 아니라, 당시 신라사회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한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특히 최치원이 지은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에 “(진성여왕의) 은혜가 바다같이 넘쳤다”는 표현이 있는 것은 적어도 최치원이 진성여왕 개인을 원망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단서라 할 수 있다.

진성여왕이 후대인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탄을 받은 요인은 바로 ‘화려한’ 남성편력 문제다. 진성여왕의 남편 내지 연인으로 알려진 각간 위홍은 그의 숙부였다. 『삼국사기』에는 “여왕이 평소 각간 위홍과 더불어 정을 통해 왔는데, 즉위 2년부터는 위홍이 늘 들어와 일을 마음대로 처리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위홍대각간을 여왕의 남편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다면 숙부와 조카의 사랑은 패륜에 해당된다. 하지만 신라인들의 눈에도 그들의 사랑이 패륜으로 비춰졌을까.

신라 진흥왕의 두 번째 비 숙명궁주는 진흥왕의 동생이었고,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 또한 자신의 숙부인 입종과 혼인해 진흥왕을 낳았다. 태종무열왕은 자신의 딸을 김유신에게 시집보내고, 김유신은 자신의 두 여동생을 태종왕의 정실과 후실로 보냈다.

신라 진골사회에서 결혼은 순수한 골품을 지키기 위한 혈통의 보전이었으므로 근친혼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신라사회에서 숙부와 조카의 결합은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게다가 그녀는 신국(神國) 신라의 국왕이었다. 자유연애가 만연하던 시절, 일국의 국왕이 자신의 연인 몇 명을 총애한 것이 ‘음탕하고 문란한 행위’로 묘사되는 경우는 진성여왕이 유일하다. 만약 그가 남자였다면 그것이 그토록 문제가 되었을까. 위홍이 죽자 진성여왕이 그에게 혜성대왕의 칭호를 올렸다는 사실 또한 당시 위홍이 여왕의 공인된 남편이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김부식이라는 고려 유학자에 의해 ‘불륜의 관계’로 전락하고 만다.

진성여왕은 독실한 불자였다. 그녀는 즉위 전부터 경문왕과 함께 개선사 석등을 시주하고, 즉위 직후에는 황룡사에서 백고좌법회를 열어 직접 가서 설법을 들었으며, 자신의 병이 깊어지자 승려들에게 도첩을 주고, 초파일이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행사를 참관했다. 파주 보광사는 진성여왕의 명으로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며, 널리 알려진 것처럼 합천 해인사 또한 진성여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절이다.

진성여왕이 이처럼 불교와 관련된 여러 활동을 펼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나라를 안정시키려 한 시도로 보인다. 진성여왕은 또 선종세력을 포섭해 국가를 안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당대 선승들에게 진성여왕의 그런 노력은 통하지 않았다. 진경심희를 국사로 초빙하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절중을 불러 국사로 삼으려 했지만 이 또한 냉정하게 거절당했다. 이어 성주산문의 낭혜무염을 초빙하고자 했으나 그는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신라 왕실로 오지 않았다. 이들이 국사라는 명예로운 지위를 거절한 것은 이미 그들이 지방 호족세력과 밀접하게 결탁돼 있었고, 신라왕실의 멸망을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도 여왕은 여전히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 무염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자 곧 왕실의 의사를 보내며 완쾌를 기원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얼마 뒤 무염은 세상을 떠났고, 이 소식을 들은 진성여왕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했다.

진성여왕은 재위 초기에는 부처님께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빌었으며, 사랑하는 연인 위홍이 죽었을 때는 그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아마 스러지는 자신을 일으켜달라고 발원했을 것이다.

그동안 그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매우 가혹했다. 고려 김부식을 비롯해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겐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문란한 정치’의 대명사로 각인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평가는 수정을 거치지 않은 채 현재의 역사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사 개설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서에서 그녀는 신라 멸망을 이끈 장본인으로 기술되고 있다. 말년의 진성여왕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고, 남 탓도 하지 않았다. 모든 문제를 자신의 부덕 탓으로 돌린 채 책임을 지고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는 결단을 내렸다. 897년 여름 진성여왕은 “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이 결정되었노라”며 태자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진성여왕 혼자의 힘으로 신라사회의 붕괴를 막는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런데도 쇠락해가는 나라의 여왕으로 즉위한 그는 ‘여자라는 이유로’ 그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했다. 왕위에서 물러난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그녀의 마지막 발걸음이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절망으로 이어졌음을 알게 한다.

효공왕이 당나라 소종(昭宗)에게 보낸 ‘사사위표(謝嗣位表)’에는 진성여왕을 “사심이 없고 욕심이 적으며, 다병(多病)한 몸에 한가함을 사랑하고, 적당한 시기라야 말을 하는 인물”로 적고 있다. 그 한가함을 사랑했던 한 여인은 패망을 앞둔 나라의 국왕이었기에, 동시에 ‘욕망’을 애써 숨기지 않았던 여자이었기에 대표적인 요부(妖婦)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은 그녀에 대한 일방적인 평가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비록 실패했을지언정 적어도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알았던 개혁가로 평가돼야 마땅하지 않을까.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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