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비구들을 교화하시며 ‘바라나시’ 외곽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다. 당시 야사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바라나시에서 손꼽히는 장자의 아들로 밤마다 사람들을 불러들여 춤추고 노래 부르는 등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춤추다 쓰러져 자던 야사는 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가 하염없이 걸으며 자신을 향해 물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지금까지 학문, 벗, 노래, 춤, 보석, 그 어떤 것도 그의 공허감을 메워주지 못했다. 새벽녘, 바라나시 교외의 숲길에서 야사가 가슴을 치며 외쳐댔다. “괴롭다. 아! 너무 괴롭다.” 그때였다. 망고나무 숲 속 어디에선가 맑고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너라, 야사여! 이곳에는 괴로움이 없느니.”
부처님께서 야사를 부르며 하신 말씀이었다. 그 ‘이곳’은 번뇌가 사라지고 지혜와 복이 가득한 부처님의 땅이요, 도량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지혜롭고 복되며 안락한 삶을 이룰 수 있다.
최근에 ‘희망의 인문학’ 이라는 책을 봤다. 인문학이라는 개념의 유래는 라틴어의 후마니타스(humanitas)다. 이것은 ‘인간다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가르침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한편 고결하기도 하다.
미국의 빈민교육 활동가인 얼 쇼리스가 1995년 뉴욕 맨해튼에서 노숙자, 마약 중독자, 범죄 전과자, 빈민 등을 대상으로 클레멘트 홀에서 인문학 교육을 시작했다. 이 홀의 이름을 따서 강좌를 ‘클레멘트 코스’라 부른다. 현재 여러 나라에서 실행중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시작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난다.
최근에 미국 이민 1.5세대인 한국인이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에서 전대미문의 총기범행을 일으켜 세계를 충격 속에 빠뜨렸다. 부모가 세탁소에서 일을 하며 힘들게 살아가느라 자식 돌볼 겨를이 없는 사이 잘못된 길로 너무 많이 가버린 탓이다. 소시민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런 학생이 ‘인간다움’에 대한 성찰의 기회가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사람이 처음 태어나서는 착한 성품이 비슷하나 환경에 따라 습성에 차이가 벌어진다.
그래서 ‘자식을 낳아 기름에 가르치지 않음은 아버지의 허물이요, 가르침에 엄격하지 않음은 스승의 태만이다(養不敎 父之過 敎不嚴 師之惰)’고 했다. 옥을 쪼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하고,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의로운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충족되지 않은 탐욕과 괴로움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여기는 분노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았다.
행복은 무엇일까? 그것은 빈방에 모이는 햇살과 같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현재 하는 일에서 행복을 느껴보라. 페르시아의 격언에 “과수원을 잼으로 만드는 것은 인내심”이라 했다. 지루한 일상을 견디는 힘이 괴로움으로부터의 구원이요, 행복의 비결이다.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