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 앞 측백나무가 조주 선풍을 지키다
뜰 앞 측백나무가 조주 선풍을 지키다
  • 법보신문
  • 승인 2007.05.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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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종(禪宗)사찰 순례기

8. 백림선사(柏林禪寺)

<사진설명>백림선사 관음전 앞엔 잣나무가 아닌 측백나무가 조주종심선사의 선풍을 알리고 있다.

“어디서 왔느냐?”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상서로운 모습(瑞像)은 보았느냐?”
“상서로운 모습은 보지 못하였고, 누워 있는 여래를 보았습니다.”
“너는 주인이 있는 사미냐, 주인이 없는 사미냐?”
“주인이 있는 사미입니다.”
“누가 너의 주인이냐?”
“정월이라 아직 날씨가 차갑습니다. 바라옵건대 스님께서는 존체 만복하소서.”

어린 나이에 고향 조주(曹州)의 용흥사로 출가한 이후 경과 율을 익히는 대신 참선을 하며 여기 저기 총림을 두루 돌아다니던 조주종심(趙州 從·778∼897) 스님이 남전보원 선사를 찾아 나눈 첫 문답이다. 마조의 법을 이은 남전은 이때 조주의 그릇을 알아보고 곁에 두어 법을 전했다.

숭산에서 구족계를 받고 여러 곳을 참례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했던 조주는 남전에 이르러서야 짐을 풀어놓고, 남전 선사가 입적하기까지 40여 년을 시봉하면서 육조 혜능 이후 마조도일, 남전보원으로 이어져온 법을 얻었다. 조주 스님은 남전 선사(778∼835) 입적 후 나이 60이 되어 제방으로 행각을 나서면서 “일곱 살 먹은 아이라도 나보다 나은 이에게는 내가 그에게 물을 것이요, 백살 먹은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한 이는 내가 그를 가르치리라”고 했다. 이후 마조, 백장, 약산, 도오, 위산 등 중국 선 불교에 있어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을 찾아 법거량을 했다.

조주 스님은 20여 년의 행각 끝에 80세가 되어서야 고향 인근의 조주 관음원에서 납자들을 제접하며 법을 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막힘 없이 선리를 설파한 조주의 선풍은 구순피선(口脣皮禪)으로 불리기도 했고, 천하조주(天下趙州)라 칭송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최상승의 법력과 완전무결한 정법안장을 상징하는 고불(古佛)로 추앙되기도 했다. 특히 조주의 무(無)자 공안은 종문의 제1공안처럼 보편화되어 현재 한국불교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화두가 되었다. 또한 그 유명한 ‘뜰 앞의 잣나무’,‘청주의 베옷’,‘진주의 큰 무’등의 공안도 조주 스님으로부터 생겨났고 『벽암록』100칙 가운데 조주 스님과의 인연으로 생겨난 공안이 12칙이나 될 정도로 뛰어난 선지식이었다.

천 년 버틴 조주탑이 객 맞아

<사진설명>백림선사 정문 양쪽에 걸린 주련이 조주선사의 주석처였음을 말해준다.

하북성의 성도 석가장에서 130km 가량 떨어진 조주현 조주시. 여기 조주시에 거침없이 선리를 설파하며 천하를 제압했던 선불교의 거장 조주종심 선사가 40년 동안 주석했던 백림선사(柏林禪寺)가 있다. 백림선사 산문의 양쪽 기둥에는 ‘절 안에는 천년을 버텨온 조주탑이 있고, 산문은 조주의 만리교를 마주 대하고 있다’는 뜻을 담은 ‘사장진제천추탑(寺藏眞際千秋塔) 문대조주만리교(門對趙州萬里橋)’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오후 4시 30분이면 문을 닫는 이곳 사정을 알면서도 일정 상 5시가 되어서야 백림선사를 찾은 순례단은 관리인들의 배려(?) 덕분에 쪽문으로나마 절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백림선사는 달마에서 혜능까지 옛 조사들의 선풍이 서려있는 사찰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넓고 평탄한 대지에 입구에서부터 순례객의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절에 들어서자 산문에 새겨진 것처럼 천년을 버텨온 조주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본래 이름이 조주고불진제광조국사탑(趙州古佛眞際光祖國師塔)인 조주탑은 8면 7층의 전탑으로 당대에 건립하고 원대인 1330년에 중건했으며 높이가 33미터다. 탑의 기단은 여러 층으로 나누어 쌓아 올렸고, 가장 아래 부분은 평범한 사각형의 벽돌로 겹겹이 튼튼하게 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용, 코끼리, 기린, 모란꽃 등이 부조되어 있다.

현재의 백림선사는 도량 규모와 선풍이 중국에서 최고라고 할 정도다. 근대 중국불교에서 최고의 선지식으로 추앙 받고 있는 허운 화상에게 1951년 비구계를 받고 임제종과 운문종의 법을 이은 정혜 스님이 이곳 백림선사와 임제사에서 불교개혁운동을 일으킨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백림선사는 본래 196∼220년에 창건돼 관음원으로 불렸다가 남송대에 영안원으로 개칭되었고, 이후 원나라 때 백림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100여년 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백림선사는 80년 대 후반부터 정혜 스님이 방장으로 주석하면서 대작불사를 추진해 오늘날의 웅장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사진설명>천 년을 버텨온 조주탑.

조주탑을 지나면 뒤쪽으로 관음전이 있다. 바로 이 관음전이 옛적 관음원 자리이고 그 유명한 화두, ‘뜰 앞의 잣나무’가 탄생한 곳이다. 조주 스님이 후학들을 제접하던 어느 날 한 학인이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하고 묻자, 문 밖 나무를 보며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고 답했다. 이에 학인이 “화상께서는 경계를 들어 사람에게 보이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조주 스님은 “나는 경계를 들어 사람에게 보이지 않느니라”고 했다. 그러자 학인이 또 다시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하고 물었고, 조주 스님은 다시 “뜰 앞의 잣나무니라”하고 답했다.

소박한 대웅전 옆엔 만불전이

관음원 자리에 새로 세워진 관음전은 2층 전각으로 아래층은 관음전, 위층은 장경루다. 그리고 전각 앞쪽에 오래된 측백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지금까지 잣나무로 알고 있었던 나무는 다름아닌 측백나무였다. 마침 길을 지나던 노승에게 “잣나무는 어디 있느냐”고 묻자, 노승에게 돌아온 답은 “잣나무는 보지 못했고 잣은 먹어 보았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않은 선문답이 되고 말았다. 측백나무가 잣나무로 바뀐 사연은 간단했다.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의 백(柏)을 한국에서 측백나무가 아닌 잣나무로 해석한 탓이다. 어쨌든 그것이 잣나무든 측백나무든 향나무든 근본 의미가 달라질 것은 없으니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다.

관음전 뒤쪽으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소박한 모습의 대웅전을 짓누르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우뚝 솟은 만불전이 그 주인공이다. 2년 전에 완공한 만불전은 1만 명이 동시에 법회를 볼 수 있다는 그들의 자랑만큼이나 위세가 당당하다. 백림선사에는 이밖에도 방이 450개나 되는 요사채, 일반 신도용 요사채인 운수루, 선당, 선방, 박물관 등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주석교의 화두를 낳았던 조주교는 4km 거리에 있음에도 날이 저물어 보지 못했다. 다만 조주 시내 한복판 사거리에 있는 송나라 때의 금강경탑(조주다라니경당)은 절로 향하는 길에 먼저 볼 수 있었다.

늦은 시간 불청객이 되어 찾은 백림선사는 이곳에서 수행중인 100여 명의 스님들 법력 때문인지, 조주의 선풍이 되살아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생동감을 전하고 있었다.

하북성 조주시=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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