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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선운사 주지 법 만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진실된 마음’ 하나로 ‘新 선운사 시대 열겠다

주요 소임을 맡은 이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혹자는 능력을, 누구는 재력을, 또 다른 이는 연륜을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옛 선인들의 삶을, 시대를 앞서 간 현자들의 일생을 거슬러 오르면 이들 단어보다 먼저 띄는 덕목이 있다. 진실한 마음, 즉 진정성이다. 가슴 밑바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의 힘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또 있을까. 사람의 능력이 세상을 바꾼다지만, 진실된 마음은 광활한 우주를 감동시키는 법이다.

지난 5월 2일 남녘 땅 고창 선운사에서 15대 주지 법만 스님의 진산식이 열렸다. 당일 새벽까지 쏟아지던 폭우가 거짓말처럼 개이고 봄날의 화사함이 도량 가득 들어 선 터라 축하 차 선운사를 방문한 이들의 기쁨은 남달랐다. 전날의 폭우와 행사 당일의 햇빛 찬란함은 공교롭게도 선운사의 과거와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듯 했다.

최연소 본사주지 취임

“저의 진정성을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부디 제가 초심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고 질책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원에서 수행만 하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열심히 기도하고 정진하는 일 뿐입니다. 원로 대덕 큰스님들의 덕화가 미치고 사부대중의 수희동참이 이뤄질 때 비로소 저의 기도는 원만회향 될 것입니다.”

진산식에서 법만 스님은 ‘진정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변하지 않은 초심과 진실한 마음으로 선운사의 변화를 이끌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간곡한 당부였다. 몸은 대중을 향해 있었지만 말은 스스로를 향하고 있었다.

스님은 지난 3월 5일 선운사 주지 선거에서 당선됐다. 연륜을 들고 나온 전 주지 스님을 큰 표차로 이기고 15대 선운사 주지로 낙점을 받은 것이다. 세납 45세, 법납 25세.(실제로는 세납과 법납 모두 2~3살이 더 많다.) 교구본사 주지로서의 최소 요건을 갖췄을 뿐 아니라, 현직 교구 본사 주지 스님 가운데도 최연소다. 그럼에도 선운사 대중들이 스님을 택한 이면에는 스님의 진정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스님 또한 주지로 취임하는 그 순간까지 대중들과의 이런 무언의 약속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선운사는 과거 189동의 전각에 89암자를 거느렸던 큰 가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본사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쇠락한 것이 사실이지요. 돌이켜 보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님은 서해안 시대의 개막으로 선운사의 앞날이 어느 때보다 밝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선운사는 이런 시대 흐름을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스님의 설명이다.

“전임 주지 스님께서 지난 4년 동안 사중을 잘 이끌었습니다. 경영 능력이 탁월한 분이지요. 따라서 사찰 경영 능력에 있어 전임 주지 스님과 저를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다만 대중 스님들이 변화 가능성에 있어서 저에게 더 큰 점수를 준 것 같아요.”

그렇다고 선운사 대중들이 스님의 진정성에만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스님은 출가 이후 수행의 길만을 고집한 눈 푸른 수좌이다. 그러나 1995년 선운사 산내 암자인 참당암 주지로 부임하면서 이후 10여 년에 걸쳐 30억원이 넘는 불사를 통해 도량을 일소하면서 스님의 사찰 경영 능력은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또 참당암에 도솔선원을 개원해 ‘선원 하나 없는 본사가 본사냐’는 세간의 비아냥까지 잠재웠던 인물이다. 스님은 어쩌면 진정성과 경영 능력을 동시에 겸비한 역대 조사들이 선운사에 내려 보낸 마지막 히든 카드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님이 불교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80년이다. 전북대 사범대학 3학년 때 2학기 등록금을 들고 떠났던 여행은 우연히 고창 선운사로 이어졌고, 이곳에서 스님은 운명의 시계추를 바꿔버렸다.

“10대 때부터 고민이 많았어요. 또래의 아이들이 갖는 진학이나 이성 문제는 아니었어요. 삶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죽은 다음엔 어떻게 되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화두를 들고 있었던 셈인데 그때는 몰랐어요. 다만 너무 일찍 세상이 재미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구나 하는 깨달음 뿐이었지요.”

진정성 공약으로 밝은 미래 약속

등록금 아니, 노자도 모두 떨어진 스님은 선운사로 발걸음을 돌렸고 공양 한 끼를 얻어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리고 선운사에서 묵은 하룻밤. 그러나 그 하룻밤 사이 스님의 저울추는 서서히 불연을 향해 돌고 있었다.

“사찰에서 밤을 보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지요. 하늘 가득 아득하게 펼쳐진 별무리, 적막한 도량. 지금 생각해도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소쩍새가 울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옆방에서 들려오는 노스님의 해소 소리. 삶의 리얼함이랄까. 자연의 영원성이랄까. 참 야릇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품고 있던 고민들이 이곳에서는 풀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기더군요.”

스님은 일주일 만에 머리를 깎았다. 딱 3개월만 해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스님의 행자 생활은 혈압으로 몸져 누워있던 남곡 큰스님의 병수발로 시작됐다. 큰스님의 대소변에, 사중의 울력까지 그야말로 방바닥에 등 붙일 여유조차 없던 빡빡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초발심은 날로 퍼렇게 살아났고, 화두도 갈수록 성성해져 갔다. 스님은 비구계를 받은 이후 줄곧 수좌의 삶만을 고집했다. 제방선방을 돌며 수행에만 전념했다. 사중 일에 관여하지 않았고, 종단 정치에는 고개를 돌렸다. 대신 안거 철이 지나면 틈틈이 기차역이나 터미널을 찾아 밑바닥 인생들과 함께 뒹굴며 수행의 날을 벼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1994년 종단에 변동이 일면서 선운사의 적지 않은 스님들이 징계를 받는 등 사중에 암운이 드리운 것이다. 대중들은 스님에게 본사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고, 결국 스님은 1995년 선운사로 돌아와 산내 암자인 참당암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됐다.

“당시 경주에 있는 동국대를 다니면서 부산에 ‘금강선원’이라는 작은 포교당을 운영했어요. 안거 때는 선방에 가고 해제 후에는 공부와 포교를 병행하던 시절이었지요. 예나 지금이나 부산 신도들의 신심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절 살림도 넉넉하고 수행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었지요. 그런데 본사에서 복귀를 요청하니 처음에는 내키지 않더군요. 부산 신도들과의 신의도 있고, 혈혈단신 나름대로 객지에서 터도 닦았는데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하니….”

그래도 본사가 위급에 처해 있다니 개인의 안위만을 따질 수는 없었다. 결국 신도들의 양해를 구한 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운사로 돌아왔다. 참당암은 당시 폐허나 진배없었다. 2년 동안 10여명의 주지가 바뀌었고, 초파일 법회에 불과 20여명의 불자가 참석할 정도니 교세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그런 와중에도 스님은 먼저 선원을 개원했다. 공간이 없어 임시로 큰 요사를 사용했지만, 수좌회에 선원 통보도 하고 방함록에 올리는 등 명실상부한 24교구 선운사의 선원이 생긴것이다.

“선방에 방부를 들이면 물어봅니다. 본사가 어디냐고. 선운사라고 하면 한마디씩 보태지요. 선운사에도 선방 다니는 스님이 있냐고. 또 강원도, 선원도 없는 교구가 본사일 수 있냐고 따지는 스님들도 있었지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어떤 때는 분심마저 일기도 했습니다. 그런 뜻에서 참당암에 선원을 개원한 것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스님은 1998년 1년여에 걸친 불사 끝에 참당암에 새로운 선원을 신축했다. 명칭은 도솔선원(兜率禪院). 선운사가 자리 잡은 도솔산의 아름다운 이름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스님은 이외에도 10여년을 도량 불사에 매진, 대웅전을 해체 보수하고 전각들을 손봤다. 그리고 선원에 이어 요사채와 해우소에 이르기까지 30억 원에 이르는 불사를 척척 해냈다.

“선원 신축은 부산 포교당 시절 신도들과 암자를 마련하기 위해 함께 모았던 재원을 사용했어요. 신도들 중에 반대하는 이도 있었지만 설득을 했지요. 암자를 짓는 것보다 본사의 선원을 짓는 것이 훨씬 큰 공덕이라고. 말없이 따라와 준 부산 신도들의 고마움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교육·환경·복지에 매진할 터

사격을 갖춰가자 신도들이 점차 늘기 시작했다. 신도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도량을 정비해 나가는 스님의 모습에 적잖은 감탄들이 쏟아졌다. 스님은 특히 고창군 지역의 신도들에게 많은 공덕을 들였다. 수시로 달력과 염주를 나눠주고, 집집마다 돌며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노력들이 쌓이자 장맛비에 계곡 물 넘치듯 신도들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50명, 100명, 300명. 이렇게 늘어난 신도가 현재 600세대. 작은 농촌 지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참으로 장대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선운사 생태 반드시 지키겠다”

“참당암에는 많은 추억들이 간직돼 있습니다. 조금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아쉬움도 많아요.”

그러나 본사 주지로서 더 큰 살림을 맡게 된 스님은 선운사의 새로운 역사를 위한 다양한 계획들을 준비하고 있다. 불교교양대학을 설립하고 문중 스님들의 노후 복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리고 교육, 환경, 복지 등 중생의 삶을 기름지게 할 대사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할 계획이다. 또 흩어져 있는 연백문도회의 화합과 단합에도 작은 힘을 보탤 요량이다.

허나 스님은 최근 선운사 인근에 조성되는 생태숲 사업과 관련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전임 주지 스님이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우겠다는 고창군의 취지에 동감, 숲 조성에 필요한 대지의 30%를 무상 제공했지만 군이 당초의 약속을 어긴 채 일방적으로 공사를 강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번 생태숲 사건은 선운사의 현재 위상을 거짓 없이 보여준 부끄러운 자화상”이라며 “이번 일을 선운사의 위상을 새롭게 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말했다. 전국 최연소 본사 주지. 그러나 연륜을 넘어서는 진실한 마음과 젊음의 힘이 스님의 말 속에 파릇하게 돋아났다.
 
고창 선운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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